[위령의 날 ]진복 팔단 (마태 5,1-12ㄴ)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욥은,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기어이 보리라고 고백한다. (욥기 19,1.23-27ㄴ)
1 욥이 말을 받았다.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고 한다. (로마 5,5-11)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시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고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신다. (마태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11월 2일 위령의 날 제1독서 (욥19,1.23-27ㄴ)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5)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and that in the end he will stand upon the earth."
욥은 앞에서 자신의 사연이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23절, 24절)
자신의 사연과 무죄함이 후대에라도 전해져 입증되기를 갈망하였다.
이어지는 본절에서는 욥은 구원자되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진실성을 변호해 주실 것이란 희망을 피력한다.
이러한 문맥의 흐름은 극한적 고통에 처한 답답하기 짝이 없는
욥의 심리적 상태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욥은 애타는 자신의 상황,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피력해 왔었다.
또한 누차 친구들의 말이 그릇된 것임을 지적해 왔었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친구들은 더욱 강도를 높여
자신을 단죄하고 비난하는 말을 내뱉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다시 무언가를 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변론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러한 자신의 사정을 의롭게 판단하실 하느님을
증인이요, 변호인, 재판관으로 청하면서,
그분이 자신의 말을 공정하게 증언하고,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의롭다고 판단하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욥의 상황이나 심경등을 감안해서 이해할 때,
본절의 내용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여기 본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표현은 '구원자' 이다.
본절에서 '나의 구원자' 에 해당하는 '꼬알리'(goalli ; my redeemer)는
'구속하다','친족으로서 행동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까알'(gaal)의 분사형에
1인칭 소유격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 사용된 '까알'(gaal)은 타살당한 친척을 위해 대신 복수하거나(민수35,12),
가난하여 어려움에 처한 형제(친족)의 소유지(기업)를 되사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레위25,25.26),
또는 친족이 자식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잇는 등(룻기2,20)의 행위과 관련된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욥의 억울함을 하느님께서 구원자가 되셔서 해결해 주시고,
그 진실성을 증언해 주실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욥이 극심한 고난과 혼란 가운데서도 구원자의 등장을
염원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즉 욥은 인간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구원자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성숙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천주 성자 제2위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본절의 이같은 표현은 욥이 지금 자신을 누구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고,
막연하게나마 하느님께서 구원자로서 등장하실 것을 염원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의미는 후반절의 '그분께서는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는
표현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여기서 '그가 ~서시리라' 에 해당하는 '야쿰'(yaqum)은 '서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라는 의미를 지닌 '쿰'(qum)의 미완료형이다.
여기서 '일어선다'는 것은 특정 공동체에서 자기 의사 표명을 위해,
또 법정에서 누군가를 변호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욥은 장차 하느님께서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입증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친히 서실 것임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진술을 함에 있어, 욥은 '나는 알고 있다네' 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알고 있다네'에 해당하는 '야다으'(yadah)의 완료형에 1인칭 주격 접미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 사용된 '야다으' 동사는 주로 남녀가 동침하는 것과 관련해서(창세4,17,25),
실제적으로 사물을 보거나 생생하게 현장에 참관해서 듣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즉 가장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 확실한 앎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욥이 본문에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은 구원자로서
하느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염원하는 바가 얼마나 간절한지를 부각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일면 자신의 무고함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확증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6)
"and after my skin has been destroyed,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
본절은 욥이 하느님을 뵙고 그분 앞에 설 것을 확신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본절의 표현 가운데 '몸으로'는 두 가지 해석이 갈라진다.
이에 해당하는 '우밉베사리'(umibbesari; 내 몸으로; yet in my flesh)는
접속사 '와우'(wau)에 '~로부터'(from)란 의미를 지닌 전치사 '민'(min),
그리고 '몸'(살) 을 의미하는 명사 '빠사르'(basar; flesh)에
1인칭 소유격 대명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표현에 대해 첫번째 해석은 전치사 '민' 을 분리의 의미로 보고,
욥이 죽은 후에 육체의 장막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느님을 뵈올 것이라는 견해이다.
또 다른 해석은 '민'을 출발의 의미로 보아,그 자신의 몸으로부터 하느님을 뵈올 것이란 견해이다.
이것은 욥이 죽기전에 지금의 재난으로부터 해방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의 몸으로 하느님을 목도하게 될 것임을 나타내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이 두 가지 견해 가운데 전자의 의미를 취하며,
'민'(min)을 분리의 의미로 본다.
이것은 본절의 상반절인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라는 표현과 어울리며,
욥이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 그것을 확신한 사실이
본서 전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측면을 감안할 때에도
전자가 더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앞서 9장 32절에서 욥은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뵐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것에 대하여
회의와 절망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분은 나 같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나 그분께 답변할 수 없고
우리는 함께 법정으로 갈 수 없다네." (욥9,32)
따라서 본절인 19장 26절은 이와 정반대되는 내용처럼 비쳐진다.
그러나 이것은 앞선 내용과 배치되는 내용으로 인식할 수만은 없다.
이것은 두 본문 사이에 그 전제, 즉 욥이 가정하는 상황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9장 32절은 육체가운데 있는 현 상태, 즉 이승에서는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과 만나 쟁론할 수 없다는 의미인 반면,
본절은 자신의 가죽이 썩은 후, 곧 내세에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다는 의미이므로,
이것은 결코 충돌되거나 모순되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욥은 특별 계시가 완성된 신약 시대의 백성들처럼, 죽음 이후 인간은
하느님의 최종 심판을 받고 천국과 연옥과 지옥으로 가며, 종국에는 천국과 지옥에서
영원한 삶을 산다는 등과 같은 내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욥기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욥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영속적으로 유지된다는 것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정도의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1월 2일 위령의 날 첫미사 복음 (마태5,1-12ㄴ)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11~12)
마태오 복음 5장 11~12절은 10절에 나오는 여덟번 째 행복의 보충 내용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3절~10절까지의 전체 팔복(八福)의 보충 내용으로서의 성격이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 때문에'에 해당하는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
(heneken dikaiosynes; for righteousness)와 비교할 때, '~때문에', '~을 위하여'
라는 뜻을 지니는 '헤네켄'(heneken; for)은 동일하고, 다만 '의로움'(디카이오쉬네스;
dikaiosynes)이 '나'(에무; emou; me)로 바뀌어진 것만 차이가 있다.
사실 마태오 복음 5장 6절과 10절에 나오는 '의로움'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
(dikaiosyne; righteousness)는 윤리적인 의로움인 동시에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종교적인 의로움이다.
즉 죄인을 심판하고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인 '공의'(公義)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은 6절보다 종교적인 측면이 더 강한
의로움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느님의 의로움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삶은 바로 '의로움', '의'(義)의 전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다는 뜻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마태오 복음 5장 3~10절까지 나오는 팔복(八福)의 서술에서는 모두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토이'(autoi; they)인 3인칭 남성 복수 주격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5장 11절과 12절에서는 '너희'에 해당하는 '휘마스'
(hymas; you)라는 2인칭 복수 대명사가 나온다.
이렇게 인칭이 바뀐 것은 지금까지 말했던 객관적인 진리를 이제는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태오 복음의 일차적 독자였던 초대 교회 시대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현실, 즉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미래에 주어질 하느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결코 좌절하지 말 것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도 들어 있는 것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하느님의 거룩함을 훼손시키는
신성모독자로 취급되어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또한 로마 지배 세력으로부터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반국가사범이란 죄목으로 잔인하게 처형당했으며,
일반 믿지 않는 대중들로부터는 자신들의 믿음 생활 때문에 질시받고
부도덕한 자들로 매도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마태오 복음 5장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을
삼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셨는데, 이러한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애통해할 수 밖에 없기에, 이제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두 번 거듭 명령형을 사용해서 이러한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제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기뻐하고'에 해당하는 '카이레테'(chairete; rejoice)의 원형
'카이로'(chairo)는 '기뻐하다', '안녕하다'는 뜻으로서,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며 행복에 겨운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아갈리아스테'(agalliasthe; be glad)의
원형 '아갈리아오'(agalliao)는 '영화롭게 하다', '높이다'는 뜻이 있는 '아갈로'
(agallo)와 '뛰다', '솟아나다'는 뜻이 있는 '할로마이'(hallomai)의 합성어로서
밖으로 넘쳐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희열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특히 이 두 단어가 모두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지금 극한 고난의 상황에 있어도
그 기쁨이 넘쳐나야 함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박해는 절망과 고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받게 될 영광과 기쁨의 약속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상'으로 번역된 '미스토스'(misthos; reward)는
'품삯', '임금', '보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박해를 이겨낸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이 상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당신의 기준에 다라 각자에게
적절한 상을 주신다(마태20,1~16; 루카17,7~10).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에게 '상이 크다'는 약속에서 '크다'에 해당하는
'폴리스'(polys; great)는 크기가 크다(large)는 뜻이 아니라 양이 아주 많은
(much) 것을 뜻한다.
이것은 천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상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 지상의 어떤 보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갖가지 보상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미래에 종말론적으로 주어질
이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믿는 이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추가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박해받았던 사실을 회상케 하며,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자들도 '나 때문에'(마태5,11) 즉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과 하느님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시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듯이, 이제는 제자들이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신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여
헌신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죽음, 연옥,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
바오로 사도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1-2).”
지상에서의 인생은 천막집, 즉 임시 거처일 뿐이고,
하늘나라에서의 인생은 우리의 진정한 집입니다.
‘죽음’은 임시 숙소에서 영원히 살게 될 그 집으로 이사를 가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일입니다.)
또 ‘부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6-19).”
부활과 내세가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부활도 내세도 안 믿으면서
단순히 현세적인 복을 빌기 위해서만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적인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내세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고 있고,
그 믿음과 희망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부활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격’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4-36).”
그 자격을 심사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는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가 선택한 이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태 24,30-31).”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란다면,
심판관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천국은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즉 성인들이 가는 곳이고,
지옥은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곧장 지옥으로 가야 할 정도로 악하게 산 것도 아니고,
천국으로 직행할 정도로 완전하게 산 것도 아닌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을 우리는 연옥이라고 부릅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가운데가 아닙니다.
(또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의 중간 단계도 아닙니다.)
지옥은 완전히 끝나버린 곳,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입니다.
연옥은 희망이 남아 있는 곳이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보속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가운데가 아니라,
천국의 부속실, 또는 대기실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옥은 천국과 완전히 분리되어 따로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6).”
그런데 연옥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보속을 어떻게, 얼마나 하는지는 모릅니다.
또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들의 보속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입니다.
(연옥 영혼들의 보속을 도와주기 위해서, 기도하고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기도와 선행과 사랑 실천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도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우리 덕분에 보속 기간이 단축된 연옥 영혼들이
천국에 들어간 다음에 우리를 도와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서, 즉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은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한 일입니다.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4-45).”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1요한 5,14-17).”
(죄인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이 말은, 그 죄인이 살아 있는 사람이든지
이미 죽은 사람이든지 간에 모두 적용되는 권고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이기 때문에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11월은 교회 전례력으로 위령 성월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달입니다. 특히 위령 성월 첫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며, 둘째 날은 ‘위령의 날’입니다. 성인들은 하느님 뜻대로 이 세상을 살다가 천국에서 하느님과 일치된 삶을 누리고 있지요. 따라서 성인들을 본받아 연옥 영혼들도 빨리 하느님 곁에 갈 수 있도록 첫째 날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둘째 날을 ‘위령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위령의 날을 맞아 우리는 저마다 특별히 기억해야 할 분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께 되돌아가신 조상님들, 부모님, 남편이나 아내, 형제와 친척, 친지, 그리고 은인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잠시 그렸으면 합니다. 그분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 더욱이 요즈음,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고인들을 잊어버릴 때가 많지 않습니까? 따라서 오늘만큼은 그분들을 위해 기도드리며, 그분들이 남긴 뜻과 못다 한 일들을 기억하고, 이를 가꾸어 나가는 데 부족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그날을 잘 맞이하도록 하루하루 의미 있게 지내며 가족과 이웃, 그리고 하느님께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