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간 토요일]증언 (루카 12,8-12)

2017. 10. 21. 오전 5: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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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간 토요일]증언 (루카 12,8-12)


바오로 사도는,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진다며,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약속이 보장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로마 4,13.16-18)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 12,8-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9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1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12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제1독서 (로마4,13.16-18)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7)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희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 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18)


로마서 4장 17-21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때에 아들을 얻은 것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동시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실이기도 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서 로마서 4장 17절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유다인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창세기 17장 5절의 인용이다. 

여기서 '내가 ~만들었다'로 번역된 '테테이카'(tetheika)는 '티테미'(tithemi)의 완료시제인데, 여기서 '삼았다', '만들었다', '되게 했다'(have made)는 의미로 쓰였다.


여기서 완료 시제로 쓰였다는 것은 과거의 어떤 결과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상태를 강조한다.

아브라함의 지위가 이미 과거에 확정되었으며, 현재까지 요지부동하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된 이 약속을 유다인들은 혈통적으로 그와 관련있는 자신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오해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민족'에 해당하는 '폴론 에트논'(pollon ethnon)'많은 족속들', '많은 민족들'(many nations)로서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분없이 모든 사람들이란 의미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엄격히 따지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 포함된다.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은 '폴론 에트논'에 속하며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지만(갈라3,7.9), 표면적으로 유다인일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은 사람들은 '폴론 에트논'에서 제외된다.


표면적 유다인들은 그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상속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또한 '내가 ~만들었다'는 뜻의 '테테이카'(tetheika) 동사의 인칭이 1인칭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동작의 주체가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믿는 모든 이들의 조상이라는 자리에 앉게 된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파테라 폴론 에트논'(patera pollon ethnon; a father of many nations)이라는 자리에 앉히셨듯시, 그분께서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도 역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자리에 앉히신다.

이 지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얻지 못한다(요한1,12.13; 에페2,8.9).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17)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4장 17절 상반절에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된 것을 밝혔다.

이제 이어지는 후반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믿은 대상이 바로 부활과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하느님이심을 밝힌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이가 백 세가 되어 자식을 가질 희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였음에도 죽은 이들을 살리시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부활과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하느님을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런 믿음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생기는 인간적인 회의의 시험을 이겨냈다.


성경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라고 가르친다(히브11,1).

그것은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가능성을 부여하는 특별한 능력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바로 이 믿음이 더할 수 없이 큰 재산이었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을 두 가지 능력의 소유자로 요약하며 밝히고 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살리시는'으로 번역된 '조오포이운토스'(zoopoiuntos)'살리다', '생명을 주다'등의 뜻을 가진 '조오포이에오'(zoopoieo)의 현재분사로,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한계를 초월하여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의 출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이러한 능력을 체험하였다(로마4,19).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맘대로 주관하시기 때문에, 수명을 단축시키거나 연장하시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기도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월경이 끊어져 버린 사라의 태를 소생시켜서 이사악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히브11,12)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신 전능하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둘째, 하느님께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창조하시는 능력을 나타내는 말인데, 창조의 능력이 없는 인간은 이 능력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생물과 무생물의 생성 및 보존은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에 의한 것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이러한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을 뿐이다.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아직 보이지 않으며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깊이와 진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원문은 '파르 엘피다 에프 엘피디 에피스튜센'(par elpida ep elpidi episteusen)이다.

여기서 전치사 '파라'(para)는 목적격을 지배하여 '~대항하여', '거슬러'(against)라는 뜻을 나타낸다.


또한 '엘피다'(elpida)'소망', '희망'을 뜻하는 '엘피스'(elpis; hope)의 목적격이다.

따라서 '파르 엘피다'(par elpida) '희망을 거슬러'로 번역하면 좋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던 당시의 상황이 매우 절망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처지와 상황을 바라볼 때에 그에게는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으나, 창세기 15장 5절에 나오는 대로 하늘의 별 수만큼 셀 수 없이 많아지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희망을 가지게 된다.


믿는 이들의 희망의 근거는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한편, '믿었습니다'로 번역된 '에피스튜센'(episteusen)'피스튜오'(pisteuo)의 부정 과거로서 믿음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은 늙어 전혀 아들을 가질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이었으나 하느님의 약속이 진실하다고 믿었으며, 그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분의 전능성(창세18,14)과 신실성(2티모2,13), 그분의 말씀이 지닌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8-9).”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한다.” 라는 말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언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증언’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온 삶으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의 삶’을 뜻합니다.


(말로만 하는 증언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증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들의 ‘삶’을 보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는,


“신앙인답게 살면서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은,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될 것이고,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다.” 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박해받는 것이 무서워서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인이 아닌 척 한다는 뜻인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는,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인이 아닌 척 했거나, 신앙인답게 살지 않은 사람은,


심판 때에 신앙인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고,


구원과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뜻으로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자기의 신앙을 증언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인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보아두셨다가


나중에 그대로 앙갚음하시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 심판의 결과는 사실상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신앙인답게 살면서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는 것은


구원과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고,


반대로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이니 자기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예복을 안 입어서 쫓겨난 사람이 좋은 예입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2,11-13)”


여기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그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입니다.


자기 자신이 잘못한 일이니 변명할 말이 아예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이 말씀은, 어떤 죄든지 회개하면 모두 용서받을 수 있지만,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넓은 뜻으로는,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배반자 유다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유다는 만일에 그가 회개하기만 했다면


예수님을 배반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잘못을 뉘우치기는 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마태 27,3).


(죄를 뉘우치는 것은 회개의 시작일 뿐이고, 그 자체가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은총의 상태를 원래대로 회복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더욱이 유다는 용서받기를 포기하고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5).


그것은 용서받기를 거부한 것과 같고, 구원받기를 거부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용서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원히 배반자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11-12).”



이 말씀은, 박해를 받을 때 인간적인 말재주로 피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대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알려 주신다는 말씀은,


성령께서 대신 말씀하신다는 뜻도 아니고,


해야 할 말을 옆에서 불러주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신앙인들이 박해를 극복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도록 노력하는 일이고,


또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믿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박해 상황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코린 2,1-5).”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입니다.


일은 하느님(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써’ 쓸모 있는 도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묵상

우리가 하는 말이나 몸짓은 자신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그 내면이라는 것이 때로는 단순히 생각이나 느낌에 관계된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자신의 전 존재나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랑한다는 고백, 충성하겠다는 맹세, 신앙의 고백은 어찌 보면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 삶의 방향을 정해 주고, 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이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의 울타리 안에 속하게 되는데, 그분을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분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을 갖고, 그분과의 인연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고, 그분과의 만남의 역사가 됩니다.

 
자신의 내면 전체가 예수님으로 가득 찬 사람은 그것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그 향기를 뿜어냅니다. 그 향기는 세상의 풍파와 박해 속에서 더욱 진하게 뿜어져 나올 것이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순교의 빛나는 영광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날 바쁜 세상살이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내 삶의 결단이 따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삶의 방향과 정체성이 온전히 정립되어 있을 때는, “내가 어떻게 답변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안에 계시는 그분께서 대신 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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