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fe.daum.net/roma3/HgBR/655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수확할 일꾼 (루카 10,1-9)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루카만 나와 함께 있다며, 주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를 완수하시려고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다고 한다. (2티모 4,10-17ㄴ)
사랑하는 그대여, 10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11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 12 티키코스는 내가 에페소로 보냈습니다. 13 올 때, 내가 트로아스에 있는 카르포스의 집에 두고 온 외투와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져오십시오.
14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행실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15 그대도 그를 조심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말에 몹시 반대하였습니다.
16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불리하게 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17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신다. (루카 10,1-9)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2티모4,10-17ㄴ)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 (11)
음침하고 축축한 로마의 토굴 감옥에 수감되어 말년을 쓸쓸하게 보내고 있던
노(老)사도 바오로 곁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인물이 바로 루카였다.
루카는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서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에 동행했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단순히 동행한 정도가 아니고 팔레스티나에서부터
로마까지의 멀고도 험난한 해상 여행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도 바오로를 수행하였다.
그는 사도 바오로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였다.
또한 그는 콜로사이서 4장 14절에서 언급된 대로 '사랑하는 의사'이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서 죽음과 대면하고 있는 노(老)사도였던 사도 바오로의 건강과
안위를 돌볼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지닌 의사였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사도 바오로의 제1, 2차 로마 수감 생활 동안 그와 함께 있어서
(콜로4,14; 필레몬1,1,24; 2티모4,11)서신을 대필하기도 한 비서요,
신실한 친구이기도 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 선교사, 의사, 비서, 친구로서 사도 바오로와
언제나 함께한 진실한 주님의 종이었다.
이제 티모테오가 올 것임을 확신한 사도 바오로가 그에게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방문할 때에 '마르코를 데려올 것'을 요청한다.
요한 마르코는 예루살렘 출신으로서(사도12,12) 사도 바오로의 제1차 선교 여행에서
사도 바오로 일행을 떠나 개인적으로 행동했던 불명예스러운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13,13).
제2차 선교 여행 때 사도 바오로는 이런 전력이 있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동행을
거부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바르나바와 결별하기도 했다(사도15,36~41).
그러나 콜로사이서 4장 10절이나 필레몬서 1장 24절을 참고하면,
마르코는 사도 바오로가 1차로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에
그와 함께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베드로 전서 5장 13절에 따르면, 마르코는 사도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후, 이전의 사도 바오로와의
반목을 털어버리고 다시 그의 신실한 협력자가 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서로 반목했던 자들이 복음 안에서 다시 화해하고, 한 뜻으로
주님 복음을 위해 힘쓰는 모습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마르코와 동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이유는 마르코가 사도 바오로 자신의 일에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원문을 보면,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일'을 '디아코니안'
(diakonian)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이 단어는 교회와 관련된 봉사, 또는 하느님 나라와 관련된 봉사와 일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것을 볼때,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복음 선포에
마르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져 오십시오.'(13)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가져올 것을 부탁한 것은 외투(겉옷) 이외에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로 번역된 '타 비블리아, 말리스타 타스 멤브라나스'
(ta biblia, malista tas membranas; my scrolls,
especially the parchments)였다.
여기서 '책들'로 번역된 '타 비블리아'는 일반적으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지칭하는 단어이지만, 본문에서는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이라는 문구로
한정되어 있어 양피지 책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양피지 책들'로 번역된 '멤브라나스'(membranas)는 라틴어의
'멤브라나'(membrana)로 표현되는 단어로서 '얇은 가죽'을 뜻한다.
무두질한 가죽이 페르가모에서 최초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parchments'로 표기되는 양피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언급된 '멤브라나스'는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 가죽 위에
필사한 책'을 뜻한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가죽 종이는 파피루스에 비해 훨씬 비쌌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들, 곧 일반적인 책에는 파피루스가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가 가져오기를 부탁한 '양피지 책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떤 학자는 이것을 재판을 대비하기 위한 로마 시민권 증명서라고 하기도 하며,
다른 학자들은 희랍어 구약 성경이나 주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을 수 있지만, 모두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은 말년의 사도 바오로가 특별히 보기를 원한 귀중한 내용의 책임에는 틀림없다.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복음 (루카10,1-9)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1~3)
시나이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에는 제자들의 수가 70인으로 되어 있지만,
바티칸 사본과 베자 사본 등에는 72인으로 되어 있어 파견받은 사람의 수효를
확정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70이나 72라는 숫자는 문자적 의미 외에도 상징적이며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
70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수로 여기는 7에 충만한 수의 의미를 갖는 10이 곱하여진 숫자이다.
그리고 72는 12의 6배, 즉 12사도의 6배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당시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의 실제적인 수효임과 동시에
앞으로 모든 믿는 이들에 의해 온 세상에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임을 상징하는
의미도 지닌다(창세10장; 창세46,27; 민수11,16~25참고).
또한 루카 복음 10장 1절에 72인을 수식하고 있는 '다른'이라고 번역된 '헤테루스'
(heterous)는 형용사로서 명백히 12명의 사도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둘씩 보내시며'에 해당하는 '아페스테일렌 아우투스 아나 뒤오'(apesteilen
autous ana dyo; sent them two by two)에서 '보내시며'로 번역된 '아페스테일렌'
(apesteilen)는 '파견하다'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apostello)의 부정과거형으로써
12사도의 파견 때에도 사용된 같은 단어이다(루카9,2).
이것은 보냄을 받는 72인의 제자들이 12사도와는 확실히 다른 별개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이유'나 '목적',
'권한'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둘씩'에 해당하는 '아나 뒤오'(ana dyo; two by two)의 의미는
아마도 서로 돕고 격려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마르6,7; 코헬렛4,9),
그들의 사명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기에,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율법의 요구를(신명19,15; 민수35,30)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갑작스런 도래와 함께 그때 올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의 준엄함에 대해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루카12,12)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직접 전해 듣고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가진 고을들이
그렇지 못한 소돔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심판의 엄정섬을 전제하고 급격하게 온다면,
시급하게 선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추수하는 행동은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모으는
종말론적인 과업을 뜻한다.
여기서 '수확'에 해당하는 '테리스모스'(therismos; harvest)는
'수확'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수확의 대상인 거두어 들여야 할 곡식 및
수확의 과정을 의미할 때도 사용된다.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수확은 농경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주제이다.
하지만 '수확'이란 예수님께 있어서 하느님의 나라의 여러 국면들을
설명하는 좋은 소재였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일 소지를 미리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확을 기다리는 완전한 무르익은
곡식과도 같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따라서 여기서의 예수님의 명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로
빨리 들어오게 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루카 복음 10장 2절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시급한 데 비해서, 이 일을 몸소 행할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또한 지금 파견을 받고 있는 일흔두 제자들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다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인에게 또 다른 일꾼들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로 번역된 '데에테테'(deethete; ask; pray)는
단순히 '요청하다'는 의미 이상의 '기도하다', '간구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테오마이'(deomai)의 부정 과거 명령법으로서, '너희들은 간구하라'는
매우 간절하면서도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천국의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할
당시의 그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시는
주님의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말씀이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사실은 루카 복음 10장 3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0장 16절에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양'('프로바타'; probata)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어린 양'('아렌'; aren; lamb)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보다 이 단어를 통해
제자들의 '연약함'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양은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짐승이다.
또한 '양'이 착한 것의 상징이라면, '이리'는 악한 것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양과 같은 제자들이 이리 떼와 같은 세상의
악한 세력들과 영적 싸움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가운데로'에 해당하는 '엔 메소'(en meso; among)라는 전치사구는
이미 그 자체로 '가운데'라는 뜻이 있는 '메소'(meso)와 '~안에'라는 뜻의
전치사 '엔'(en; in)이 결합되어 '한가운데 속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어린 양과 같이 연약하고 착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교하기 위해 험악하고 공격적인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자들은 험하고 공격적인 세상 속에서 마땅히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태10,16).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은, 즉 선교활동은
일차적으로는 잃은 자녀를 되찾는 활동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인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고,
자기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자녀로서
살도록 인도하는 일이 선교활동입니다.
또
선교활동은 하느님을 위해서 일할 일꾼을 모집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곧 하느님의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라는 말씀은, 하느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는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선교사들이 적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을
할 때에는 ‘기도하면서’ 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기도하지 않고서 자신의 힘으로만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 되어버립니다.
원래
이 말씀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라는 뜻인데,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시는 말씀도 아니고,
사도들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 하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기도’에 있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와 비슷합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은 하느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협력자로서 참여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빨리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청하는 것은,
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되돌아오고 일꾼이 되기를
희망하고 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 말씀 뒤에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선교활동은
적과 싸우는 일이 아니라,
‘잃은
양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리 떼’ 같다고 느껴져도 그들은 적이 아닙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랑으로, 슬기롭고, 순박하게 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양의 본성’을 잃으면 안 됩니다.
‘이리
떼’ 같은 세상 사람들을 ‘양들’로 변화시키려면,
더욱더 예수님의 양떼로서 일해야 하고, 예수님의 양떼답게 살아야 합니다.
복음은
‘말’로도 전할 수 있고, ‘글’로도 전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삶’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다면,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실천하면서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그 자체로 복음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일이 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는 지시는,
세속적인
욕심이나 욕망을 버리고
‘빈 마음’으로 가라는 지시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선교활동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얻기 위한 활동이 아닙니다.
한
명이라도 더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활동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복음을, 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 준다는 기쁨 외에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 ‘빈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바로
그 ‘빈 마음’이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지시는,
세속의
인연에 연연하지 말라는 지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라는 가르침과
같은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
선포’ 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길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누구에게나’ 인사해야 합니다.
적대적인 사람에게도 인사해야 하고, 그런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친한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라는 지시가 아니라,
선교활동과는 상관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지시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6).”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의 참 평화를 증언하고 전해 주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주님의 참 평화를 전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평화는 오직 사랑과 평화로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미움’으로는
주님의 참 평화를 증언할 수도 없고, 전해 줄 수도 없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미움
때문에 이미 평화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 있으니,
그 경우에 평화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화를 잃으면 안 됩니다.
고난과
시련을 만나도, 사람들이 박해하고 미워해도,
내적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변함없는 사랑,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이리
떼’ 가운데에서 ‘양’으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해서,
‘양’으로서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이리’로 변신한다면,
몸은
편해지겠지만, 신앙인의 자격을 잃게 되고,
복음을
증언하고 선포할 자격도 잃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실상 신앙인으로서 사는 것이 아닌 것, 즉 죽은 것과 같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