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간 화요일]자선 (루카 11,37-41)
바오로 사도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다고 한다. ( 로마 1,16-25)
형제 여러분,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17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9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21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23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25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다고 놀라는 바리사이에게,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며,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루카 11,37-41)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1,16-25)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8)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는 인간의 보편적인 타락상과
믿음을 통한 의화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안에서 로마서 1장 18절부터 1장 32절까지는 본론의 도입부로서
타락한 이방인들의 범죄와 하느님의 유기(버리심)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로마서 1장 18절은 불경건한 이방인에 대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이다.
여기서 '진노'로 번역된 '오르게'(orge; the wrath)는 본래 '자연스러운 충동', '기분',
'천성', '기질'등을 의미했는데, 점차 '강한 내적 열정을 나타내는 격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구약에서 '오르게'(orge)는 불의에 대해 반응하시는 하느님의 공의로운 속성을
묘사하는데 쓰였으며, 로마서 1장 18절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하느님의 '오르게'는 죄에 대해 그분께서 나타내시는 반응이며,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정당한 분노라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관점이다.
그는 로마서 1장 18절에서 이 '오르게'의 출처가 '하늘'임을 강조한다.
'하늘에서부터'로 번역된 '아프 우라누'(ap' uranu; from heaven)에서
전치사 '아프'의 원형 '아포'(apo)가 나타내는 것은 어떤 것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진노가 시작되는 '하늘'은 물리적인 공간인 허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곳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거처, 즉 옥좌(보좌)로 인식되었으며(마태23,22 ;
사도7,55), 비유적으로는 초월적이며 전능하신 하느님과 동의어로 나타나기도 한다(루카15,18.20).
따라서 이 '오르게'의 출처가 '하늘'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진술은
죄인들이 결코 초월적이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수 없음에 대한 경고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러한 피할수 없는 진노는 '모든 불경(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나타난다.
여기서 '불경'에 해당하는 '아세베이안'(asebeian)의 원형 '아세베이아'(asebeia;
godlessness; ungodliness)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예배하다'라는 뜻이 있는
'세보마이'(sebomai)의 합성어로서 '예배하지 않음','신(神)을 믿지 않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상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을 가리키며,'불의'의 발판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의'로 번역된 '아디키안'(adikian)의 원형 '아디키아'(adikia; unrighteousness;
wickedness)는 이처럼 '경건치 않은', '불경(不敬)한' 자들의 당연한 결과로서
'부도덕한 삶의 총체'를 가리킨다.
이런 죄를 짓는 자들의 특징은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 즉 '알레테이아'(alletheia; truth)는 문맥으로 볼 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명백히 계시된 하느님의 업적과 자취이며,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이 바로 바른 삶임을 알게 하는 지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진리를 '불의'(아디키아)로 억누르고 있어서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여기서 '억누르는'으로 번역된 '카테콘톤'(katechonton; hold; suppress)은
'~을 하지 못하게 억누르다','막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테코'(katecho;
루카4,42; 2테살2,6.7; 필레몬1,13)의 현재 분사로서,
그들의 부도덕한 삶을 버릴 수 없어서 명백히 계시되어 있는 하느님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억눌러 불의로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런 자들에게는 당연히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진노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시점은 언제인가?
이것은 '나타나고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아포칼륍테타이'(apokallyptetai;
is being revealed)가 계속됨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로 쓰였다는 데서 암시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진노가 최종적으로는 최후의 심판 때에 완전하게 나타나지만,
지금 현 시점에 있어서도 부분적으로는 계속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느님의 공의(정의)의 속성이 범죄를 방치할 수 없어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범죄하는 자로 하여금 회개하여 구원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11,37-41)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38~41)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는 행위는 당시 유대 사회의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으며,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부정과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다.
이 제의적 식사 관습은 바리사이들 뿐만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에게서
조차도 철저하게 지켜온 규범이었다(마르7,3.4).
사실 식사전에 손을 씻는 행위는 단지 의식적인 차원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것이 무슨 거룩한 계명인 것처럼 우월감을 가지고
매우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래적 정식을 왜곡한 유대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며, 강하게 책망하시기 위해 의도적인 행동을 하신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겉으로는 식사 전에 손도 씻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는 등 거룩하고 고결한 삶을 사는 것처럼 행했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말씀의 참된 뜻을 왜곡하고, 그 속마음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멸시하는 등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여기서 '탐욕'에 해당하는 '하르파게스'(harpages; greed)는
'억지로 끌고 가다', '탐심을 가지고 붙잡다'라는 뜻을 지닌
'하르파조'(harpazo)에서 온 말로서 '강탈', '약탈', '착취'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히브10,34; 마태23,25).
루카복음 16장 1~13절의 '약은 집사의 비유'가 끝난 다음에 바로
루카복음 사가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루카16,14)이라고 하면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원색적인 평가를 한다.
또한 마르코 복음 12장 40절에는 바리사이들이 돈에 대한 탐욕으로
'과부들의 가신을 등쳐' 먹는 행위까지 한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속마음은 '사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사악'에 해당하는 '포네리아스'(ponerias; wickedness)는
'악한 성품의', '타락한'이라는 뜻을 지닌 '포네로스'(poneros)에서
유래하여 '시기심', '악의'(로마1,29)를 의미한다.
루카 복음 15장 11~32절에 나오는 '되찾은 이들의 비유'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상징하고 있는 큰 아들은 분명히
작은 아들이 돌아온 사실과 또한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잔치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루카15,28).
이처럼 죄인들과 세리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지독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의 회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심과 시기심으로 인해 그들이 그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바리사이들은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하고, 외적 행위만 깨끗하고
거룩하게 잘 꾸미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내면세계도 아름답게
보아 줄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바리사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신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들아'에 해당하는 '아프로네스'(aphrones;
you foolish people)는 '어리석은', '지각이 없는'을 뜻하는
'아프론'(aphron)의 복수 호격이다.
말하자면, 옳고 그름과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고,
영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
자칭 타칭 의인이요, 존경받는 자들이라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겉 뿐만 아니라 속도 만들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보이지 않는 속의 정결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종교적 형식 준수를 통해
겉만 거룩하게 보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강력하게 비판하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카 복음 11장 41절의 '속에 담긴 것'에 해당하는 '타 에논타'
(ta enonta; what is inside)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데, 음식, 마음, 재물로 보는 경우가 그것이다.
루카복음 11장 39절의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는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그런 탐욕과 사악의 마음으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했기에
그런 마음을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에서 부정한 재물을 되돌려 줄 뿐
아니라, '자선'에 해당하는 '엘레에모쉬넨'(eleemosynen; alms)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는 말씀은 자선의 결과
그들 자신이 깨끗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된 것들이
깨끗해진다는 말이다.
그들과 관계된 '모든 것'('판타'; panta; all thing; everything)은
부당한 방법으로 축재했다는 죄의식을 비롯한 하느님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선하게 되면, 재물을 옳게 사용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화와 양심의 자유가 그들을 더러운 탐욕과 사악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신앙생활>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9-41).”
이 말씀은,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하느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이라는 말씀은,
바리사이들의 정결 예식을 가리키는 말씀인데,
뜻으로는 ‘겉만’ 깨끗이 하는 위선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라는 말씀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마음은 추악하고 불결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깨끗하다.’ 라는 말을
‘의롭다.’, 또는 ‘거룩하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위선자들은 겉으로는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속은 의롭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은 자들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겉으로만 의롭고 거룩한 척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그런 위선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 6,1).”
이 말씀에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라는 말은,
‘사람들에게만 보이려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그들 앞에서’를 ‘그들 앞에서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말은, 그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의식하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만 깨끗한 척, 의로운 척, 거룩한 척 합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마태 23,5).”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속을 모르고,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때가 많아서,
위선자를 보아도 그 사람이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이 정말로 깨끗하고,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겉과 속을 모두 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해야 하고, 의로워야 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속이 깨끗하고 의롭고 거룩하다고 해서
겉으로는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적으로도, 또 외적으로도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실 정말로 내적으로 거룩한 사람은 그 거룩함이 저절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또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속으로나 겉으로나 깨끗한(의롭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즉 깨끗한 사람이라고 하느님의 인정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은
‘사랑 실천’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찬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보속하려면,
‘사랑 실천’부터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는 말과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말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는 말은 모두 뜻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속에 담긴 것’이라는 말은,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는 뜻인데,
만일에 그 재산이 탐욕과 사악으로 얻은 재산이라면,
즉 남에게서 빼앗은 것이라면 당연히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일도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에 속합니다.)
회개한다면서 그 재산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 회개입니다.
정당하게 얻은 재산이라고 해도 재산에 대한 애착심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루카 18,22).”
이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기 때문에(마르 10,21)
그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어떻든 그 부자는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그 애착심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부자는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 자선을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 실천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루카 18,22).”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에게 모자란 것 하나는 바로 ‘사랑’입니다.
(재산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곧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아까워하지 않고 모두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여기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말에는,
“나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 없이는 구원도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예수님의 말씀에 연결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보여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깨끗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보여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신앙생활의 출발점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기본 방식이고,
신앙생활을 완성시키는 최종 목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