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사람의 아들 (루카 9,43ㄴ-45)
즈카르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머무르시어,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주님의 백성이 되리라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 (즈카르야 2,5-9.14-15ㄷ)
5 내가 눈을 들어 보니, 손에 측량줄을 쥔 사람이 하나 있었다. 6 내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 그가 나에게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하고 대답하였다.
7 그때에 나와 이야기하던 천사가 앞으로 나가자, 다른 천사가 그에게 마주 나와 8 말하였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일러 주어라. ‘사람들과 짐승들이 많아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 잡으리라. 9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이르시자,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말씀에 관해 묻는 것도 두려워한다. ( 루카 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제1독서 (즈카르2,5-9.14-15ㄷ)
편의상 제 1즈카르야로 불리는 즈카르야서 1-8장은, 하까이와 동 시대의 예언자 베레그야의 아들
즈카르야 한테서 나온 것이 확실하지만, 제 2즈카르야로 불리는 즈카르야서 9-14장은 훨씬
후대 작품이며,무명의 여러 저자들 한테서 유래하는 신탁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이 둘을 따로 다룬다.
즈카르야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로 '주님께서 기억하셨다'이다.
즈카르야서 1-8장의 주인공 즈카르야 예언자는 하까이 예언자가 마지막 신탁을 선포하기 한 달 전,
곧 기원전 520년 음력 10월에 예언 활동을 시작하여 518년 음력 11월까지 계속하였다.
제1즈카르야서는 예언자의 신탁이 끝난 직후 부터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 마무리 될 때 까지 수집되어
출간되었을 것으로 본다. 곧 제1즈카르야의 저작 연대는 BC 518-515년이다.
즈카르야는 하까이보다 성전이 주는 혜택을 더 많이 강조한다.
성전을 통하여 유다는 좋은 방향으로 완전히 변형되고, 세상은 이상향으로 바뀔 것이다.
제1즈카르야서의 저자는 이 변형을 여덟 개의 환시를 이용하여 묘사한다.
즈카르야서의 환시들은 성경 묵시 문학의 기초를 놓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오늘 독서는 세번째 환시(2,5-9)의 내용이 들어있다.
예언자가 직접 환시의 장면으로 들어간다.
예언자는 측량줄을 잡고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데, 곁에 있던 천사가 다른 천사를 시켜
그 사람에게 예루살렘을 측량할 필요가 없다고 일러준다.
그곳에 주민과 짐승이 너무 불어나서,경계를 지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불벽이 되어 이 도성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도 있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일러 주어라. '사람들과 짐승들이 많아 예루살렘은 성벽없이
넓게 자리 잡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2,7-9.14-15)
'내가 에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의 '불 벽'이 무엇일까? 불의 의미가 무엇일까?
창세기 3장 24절에도 '하느님께서 사람을 내쫓으시면서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는 말씀이 있고,히브리서12장 29절에는 "우리의 하느님은
태워버리는 불이십니다"(탈출24,17참조)라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외경과 두려움의 대상이며, 초월적인 대상이다.
동시에 접근하면 태워버리고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튼튼한 방어벽과 보호벽이 되어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예루살렘을 측량줄로 재는 세번째 환시는 에제키엘의 성전을 재는 환시(에제40-48장)와
아모스의 다림줄 환시(아모7,7-10)와 흡사하다.
세번째 환시가 끝나고 신탁(2,10-17)이 하나 끼어드는데, 주님께서 온 천하 사방에 흩어진 당신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시고, 시온과 백성 가운데에 머무르시어 이스라엘을 온전히 회복하실 것임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제1즈카르야의 일관된 주제는 회복과 변형이고, 이것이 여덟 환시를 관통한다.
황폐해진 유다와 예루살렘은 회복되고, 유다를 약탈하던 민족들이 그분과 결합하여 그분의 백성으로 바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전 건립과 예루살렘성 복구를 통해 야훼 유일신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모든 것이 회복되고 변형되며 축복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지금 안 풀리는게 무엇이 있나? 무엇때문에 안 풀리는지? 성찰해야 된다.
하느님과 나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자.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9,43ㄴ-45)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4)
루카 복음 9장 44절의 '이 말'에 해당하는 '투스 로구스 투투스'
(tus logus tutus; these sayings)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 말'에 해당하는 원문은 복수형이고, 희랍어 지시 대명사는 바로 앞의 내용을
받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루카 복음 9장 43절에서 찾아야 한다.
한글 새 성경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라고 전한다.
말하자면,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사람들의 놀란 말들'을 뜻한다.
풀이하면, 예수님께서 '나의 가르침과 기적으로 인해 놀라서 떠들어대는
이 사람들의 소리를 잘 기억해라. 왜냐하면(gar; '가르') 내가 바로
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넘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한탄하고 계심이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단지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게 될 것 때문이라기 보다는,
당신의 말씀과 영적을 보고 '하느님의 위엄'이라고 할 정도로 따랐던 그들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아프셨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들을 위해 당신 자신의 몸을 내놓으셔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더 예수님을 상심케 했을 것이다.
루카 복음 사가는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9장 43절과 44절을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다.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3ㄴ-45).”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데,
루카복음에는 수난 예고 말씀만 있고, 부활 예고 말씀이 없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부활 예고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17,23; 마르 9,31).
아마도 루카가 부활 예고 말씀을 생략한 것 같은데,
왜 생략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자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려고 생략한 것일 수도 있다고 짐작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들을 보고 놀라워했다는 말에는,
놀라기만 하고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제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나라’를 세상의 왕국들과 같은 나라로 오해하고서,
세속적인 권세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수난 예고 말씀의 바로 뒤에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루카 9,46).
이 논쟁은 아마도 “‘예수님의 나라’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라는 논쟁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도 부족했고,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놀라기만 하고 믿지는 않은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라는 말씀에는
당신이 수난을 당하더라도 믿음을 잃지 말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4,29).”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은 힘이 없어서 당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왜 꼭 그런 식으로 실현되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어떻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서 나아가신 일은,
수난, 죽음, 부활의 전 과정을 향해서 나아가신 일입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과 승리와 영광을 향해서 가신 일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 당신을 죽일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넘겨지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하느님의 어떤 섭리와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그 섭리와 계획을 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빠스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라는 말에서
‘감추어져 있어서’ 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은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는 알아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 신비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깨닫게 되고 믿게 됩니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라는 말은,
제자들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을 듣는 것 자체를 싫어했고,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두렵고 싫어서 그냥 회피하려는 심리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부활 예고 말씀도 하셨을 텐데,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들었고,
수난과 죽음 예고 말씀에 대해서만 놀랐고, 두려워했고,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아직은 이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그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사순절이 지나면 부활절이 온다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신앙인에게는 인생 자체가 십자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인생살이가 다르고, 십자가의 크기가 다르긴 하지만,
인생이라는 신앙 여정이 어렵고 힘들다는 점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다음에는 부활과 승천이 있음을 믿는 것처럼
신앙인의 십자가의 길 끝에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믿고 있으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믿음이 곧 ‘삶’이 되어야 합니다.
눈앞의 시련과 고난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억울해 하지 말고,
흔들림 없이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토마스 사도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다 지나가고 나서
승리와 영광과 생명이 이루어진 다음에 믿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바로 ‘보고서야’ 믿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아직 이루어지기 전에,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더욱더 굳게 믿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