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요한 19,25-27)

2017. 9. 15. 오전 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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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23주간 금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요한 19,25-27)




부속가 <아래의 부속가는 자유로이 할 수 있다. 11절부터 시작하여 짧게 할 수도 있다.>
1. 아들예수 높이달린 십자곁에 성모서서 비통하게 우시네.
2. 섧고설운 슬픔고통 성모성심 칼에찔려 참혹하게 뚫렸네.
3. 독생성자 수난하니 여인중에 복된성모 애간장이 다녹네.
4. 아들수난 보는성모 맘저미는 아픔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5. 예수모친 이런고통 지켜보는 우리죄인 누가울지 않으리?
6. 십자가의 아들보며 함께받는 성모고통 누가슬퍼 않으리?
7. 우리죄로 채찍모욕 당하시는 아들예수 성모슬피 보시네.
8. 기진하여 버려진채 죽어가는 아들보고 애처로이 우시네.
9. 사랑의샘 동정성모 저희들도 슬퍼하며 함께울게 하소서.
10. 그리스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제마음에 불이타게 하소서.
11.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맘속에 주님상처 깊이새겨 주소서.
12. 저를위해 상처입고 수난하신 주님고통 제게나눠 주소서.
13. 사는동안 십자고통 성모님과 아파하며 같이울게 하소서.
14. 십자곁에 저도서서 성모님과 한맘으로 슬피울게 하소서.
15. 동정중의 동정이신 성모님의 크신슬픔 저도울게 하소서.
16. 주님상처 깊이새겨 그리스도 수난죽음 지고가게 하소서.
17. 저희들도 아들상처 십자가위 흘린피로 흠뻑젖게 하소서.
18. 동정성모 심판날에 영원형벌 불속에서 저를지켜 주소서.
19. 그리스도 수난공로 십자가의 은총으로 보호하여 주소서.
20. 이몸죽어 제영혼이 천국영광 주예수님 만나뵙게 하소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시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한다. (히브 5,7-9)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신다. (요한 19,25-27)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제1독서 (히브5,7-9)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7)

'이 세상에 계실 때'로 번역된 원문에서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없고, '육체'라는 단어가 나온다. '육체로 계실 때' 혹은 '육체를 지니고 계실 때' 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육체'로 번역된 '사르코스'(sarkos)의 원형 '사륵스'(sarx)의 기본 의미는  살'(flesh) 이지만, '몸', '혈육을 가진 인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인간성' 등 다양한 의미들을 나타내어 쓰인다. 

본절에서는 이  '사륵스'(sarx)가 '인간 그 자체' 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강생(육화)하신 예수님의 지상 존재, 즉 인격적인 본성 전체를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가진 인간이셨던 동안, 그분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을 느끼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유혹과 고통을 모두 당하셨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죄가 없었으므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륵스'(sarx)의 생각에 지배되는 사람들의 특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실 때에나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항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마음에 드는) 아들이었다. (마태3,17)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본문은 생명을 독점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보여준다. 여기서 '죽음에서 구하신다' 는 표현의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예수님을 갈바리아 언덕에서 죽기 이전에 건져내신다는 의미가 된다. 

'구하실' 에 해당하는 '소제인'(sozein)의 원형 '소조'(sozo)어떤 위협을 당하지 않게 미리 건져 내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에크 타나투'(ek thanatu; from death)와 함께 쓰이면, 죽음의 위험에서 건져 낸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에크 타나투'(ek thanatu)와 함께 '소조'(sozo ; to save)가 쓰였다는 사실은 본절에 기록된 기도가 겟세마니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지도록 간절히 바치신 예수님의 기도임을 말해 주며, 예수님은 그때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죽음의 위험에서 능히 건져 내실 수 있는 하느님께 드렸던 것이다. 

둘째로, 위와 같은 의미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구하신다' 라는 표현이 죽음 이후의 부활 사건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그 기도가 '들어 주셨습니다' 라는 본절에 후반절의 표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겟세마니의 기도를 염두에 두고서 그 기도의 장면을 묘사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경험하신 분이다. 

본문을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심한 통곡(요란하도록 큰 부르짖음)과 눈물(울음)로 ~ 드렸고' (he offered up prayers and petitions with loud(strong) cries and tears)가 된다. 

루카는 예수님의 그 당시 기도 모습을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루카 22,44) 라고 기록하였다. 이보다도 더 이상 간절하고 애절할 수 없는 마음으로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어디에 나오는가! 

예수님의 얼굴에서 떨어진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얼굴에 있는 모세 혈관이 터져서 피부 밖으로 나온 피가 땀방울에 섞여 땅에 떨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간절하게 기도하셨던 것이다. 

한편, '큰 소리로 부르짖고'로 번역된 '크라우게스'(krauges)의 원형 '크라우게'(krauge)는 '고함', '큰 부르짖음' 이란 뜻이다.  이것은 자신이 억지로 외치려 해서 나는 소리라기보다 극도의 긴장이나 고통의 가운데서 마음을 쓰지 않음에도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소리(통곡)이다. 

더군다나 '심한'이라고 번역된 '이스퀴라스'(ischyras; strong; loud)라는 수식어가 있다는 것은 그분이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분의 심정을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은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태26,38)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전해주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상처가 깊은 사람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 소리가 터져나오고,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찬 사람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듯이 그 순간 예수님은 그와같은 상태에 빠지셨음이 분명하다.

참을 수 없는 긴장과 고통 가운데서 그분은 흘러 나오는 신음 소리만 낸 것이 아니라 울기까지 하셨다. 그분은 아버지께 울면서 기도와 탄원을 드린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한 인간으로서 두려움과 혼란, 절망감에 싸여 우리와 마찬가지로 내적 혼란을 겪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진지하고 애절하고 뜨겁게 기도하셨으나 저자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기도와 탄원'을 올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탄원'에 해당하는 '히케테리아스'(hiketerias)'자신의 고통과 억울함과 원통함을 탄원하는 자'를 의미하는 '히케테스'(hikete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탄원', '간청' 이라는 뜻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 기도와 탄원의 내용을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로 전해주고 있다(마태26,42; 마르14,36; 루카22,42). 

예수님은 그 기도를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셨다(마태26,44). 히브리 사상에서 '세 번'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횟수이다. 히브리인들의 공식 기도가 하루 세 차례였다는 사실도 그들이 하느님께 온전한 기도를  드린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예수님께서 같은 내용으로 세 번이나 동일하게 기도하셨다는 것은 더 이상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간절하고도 완벽하게 기도했음을 나타낸다. 

'그 경외심 때문에' 

본서 저자의 관점에서 본 예수님의 기도와 탄원의 응답을 받은 결정적인 동기와 배경에 대한 언급이다.

하느님께서 중시하시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경건에서 우러나오는 복종 때문에 그의 기도가 아버지께로부터 응답을 받았다는 진술을 하고 있다.

'경외심'으로 번역된 '율라베이아스'(eulabeias)는 '두려움', '경건'을 뜻한다. 기원전 3~4세기 이후부터 사용된 이 단어가 처음에는 '신중함', '세심한 주의', '사리분별'등을 의미했으나 후기 희랍어에서는 '공경'을 뜻하게 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명사가 나타나는 곳은 본절과 히브리서 12장 28절 뿐이다. 라틴어 성경은 이것을 '존경', '경외'(reverentia), 그외 다른 성경은 '경건'(piety), '공손한 복종'(reverent submission)등으로 번역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아버지 앞에 엎드릴 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태도이다. 그분의 이러한 복종은 비굴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공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들어 주셨습니다'  

'들어 주셨습니다'로 번역된 '에이사쿠스테이스'(eisakustheis)의 원형 '에이사쿠오'(eisakuo)는 방향 또는 진입의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eis)'듣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쿠오'(akuo)의 합성어로서 '요구에 따르다', '요구를 들어주다' 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과거 분사 수동태로 쓰였으며, 영어로는 'he was heard'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슨 기도가 어떻게 응답받았는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는 기도는 '대속의 십자가 죽음'으로서 응답받았고 '죽음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는 십자가 죽음 후 '부활'을 통해서 응답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으셨고, 또한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부활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와 탄원이 들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복음(요한19,25-27)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6~27) 

요한 복음 19장 25절과 19장 27절에는 '어머니'라는 뜻의 '메테르'(meter)가 사용되었다. 19장 25절에서는 요한 복음사가가 예수님과 마리아와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했고, 19장 27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사도 요한에게 모친을 부탁하면서 당신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어머니'라는 뜻의 정감있는 '메테르'(meter)란 표현을 했다. 

하지만 요한 복음 19장 26절에서는 '메테르'를 사용하지 않고, 셈족 계통의 언어로서 어떤 거리감을 두는 표현인 '귀나이'(gynai)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여인', '부인'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어떤 여인을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2장 4절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향해 '귀나이'(gynai)라고 불렀고, 지금 자신의 사명을 마무리하는 십자가 형틀 위에서도 어머니를 그렇게 불렀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하느님의 계획하에 치밀하게 이루어진 구원 사업 안에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둘째 하와이신 마리아의 성소와 역할을 규정지어 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마리아가 예수님과 피와 살을 나눈 혈육적 관계 안에서의 모친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고, 공적으로 첫 기적을 베풀어 당신의 신성(神性)을 드러내야 하는 카나의 혼인 잔치 자리와, 인류 구원 사업이 완성되는 십자가의 형틀의 자리와 거기에서 모든 은혜가 내려져서 구원 사업이 계승되는 교회를 대표하는 사도와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그 자리가, 혈육과 육정의 관계를 넘어 각자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성부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자신의 성소와 역할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신, 구약 성경을 통틀어 첫 복음이라고 불리워지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에 해당하는 '잇샤'(isha) 70인역(LXX)에서는 '귀네'(gyne)로 번역되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걱정하여 사랑하는 제자였던 사도 요한에게 맡기기 위해 부르는 호칭으로만 '귀네'(gyne)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의 초기에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약속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여자의 후손'이라는 모티프(motif)를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출산하기 전(前)이나 출산시, 그리고 출산 후에도 평생 동정이시라는 교리를 신덕 도리로 이천년 동안 믿어온 가톨릭을 반대하며, 자신들의 대처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을 부정하는 개신교는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외에도 여러 명의 아들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이 요셉 양부의 형제, 자매의 자녀들인 고종 사촌들이나 마리아의 형제, 자매의 자녀들인 이종 사촌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복음에 나오는 '형제'라는 뜻의 '아델포스'(adelphos)라는 희랍어 단어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촌 형제들도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예수님의 친형제들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를 친형제들에게 맡기지, 왜 이종사촌인 제자에게 맡겼겠는가! 

루카 복음 1장 38절에서 마리아는 구세주의 모친, 교회의 모친, 인류의 어머니로서의 모성을 수락하셨는데, 그 수락한 모성이 요한 복음 19장 26~27절에서 인류 구원 사업이 계승되는 성사적인 인간 집단인 교회를 상징하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가상칠언(架上七言) 중에서 루카복음 23장 34절, 루카복음 23장 43절에 이어서 세번째 말씀인 요한복음 19장 26~27절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사도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선포하심으로써 이제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당신께 나아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시는 것이다.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 오는 것이 가장 구원과 완덕에 이르는 쉬운 길이며 빠른 길이고, 가장 완전하고 완벽하며 안전한 길이라는 말이다. 

마리아론 학자들은 이 길은 바로 마리아의 티없으신 성심께 봉헌하는 것과,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신 마리아의 성덕(聖德)을 본받는 것, 그리고 묵주의 기도로서 마리아의 강력한 중재와 전구에 의탁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완전한 하느님이셨지만(요한1,1), 보통 여느 사람들처럼 이성과 감정을 지니신 온전한 인간이기도 하셨다. 

자신의 손과 발이 못박혀 몸이 찢기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가운데서도(요한19,18.28) 자신의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눈물로 지키고 있던 자신을 낳고 길러준 육신의 어머니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무죄한 당신이 고통받고 죽어야만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의 뜻이 아루어지기에, 마음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어머니를 내려다보는(요한19,25) 아들로서의 심리적, 영적 격정은 그의 온 심장과 오장육부를 파고들어 타는 듯한 안타까운 심정이 되게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이 친어머니처럼 섬겨주기를 바랬던 마리아는 바로 자모이신 성교회, 죄인들의 피난처이신 교회를 상징하는데(십자가의 길 13처), 주님의 구원 사업이 계승되는 성사적인 인간 집단인 교회는 믿음의 모델이며 은총의 전구자이시고, 예수님의 첫 제자이기도 한 마리아를 통해 구원과 성화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이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이어 고통의 성모님을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결합된 성모님의 인생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십자가의 의미를 더 명료하게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잉태하시는 순간부터 십자가에서 아들 예수님께서 처절하게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마음속 깊이 숙고하시고 되새기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의 인생은 복음서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고 증언합니다.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할 때 겪게 되는 인간성 자체의 고통도 포함합니다. 인간은 생존의 욕구,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 소유하고 집착하는 인간의 의지적 욕구가 좌절되는 것을 가장 큰 고통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아에 몰두하고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여기는 교만이야말로 우리 스스로의 고통의 원인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인간이 겪는 이 고통의 의미를 가장 깊이 깨달으신 분이십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모순처럼 다가온 수많은 순간들을 인간 존재의 숙명으로 받아들이시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시는 용기를 보여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둠 속 신앙의 길’을 걸으셨기에, 십자가의 어두움을 넘어 부활의 빛을 만나실 수 있었던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고, 예수님께서 요한 사도에게 맡기신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는 말씀은,

“어머니, 이 사람을 어머니의 아들로 삼아 주십시오.” 라는 뜻인데,

우리 교회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전체 교회를 성모 마리아께

맡기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라는 말씀은,

“이분을 네 어머니로 모셔다오.” 라는 부탁인데,

우리 교회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성모 마리아를 전체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십자가에서 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이 말씀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사람만이

성모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신앙인이 되는 자격을 잃게 되고,

성모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일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성모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신 분으로서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과 성모님이 걸어가신 길은 하나의 길입니다.

신앙인은 바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단 하나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인생의 기준으로 삼아서

충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7-8).”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사는 것이 바로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을 버린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첫 자리에 계신 분입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고난과 시련을 참고 견딘다는 뜻입니다.

그 고난과 시련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겪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성모님의 일생은 십자가의 연속이었는데,

한 번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셨고, 회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이 일생 동안 겪은 십자가들을

운명이나 숙명이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표현하면 어찌할 수 없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것밖에 안 됩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미리 정해져 있는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응답과 순종을 위대한 결단이라고 찬양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선택하셨고, 끊임없이 노력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십자가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선택하는 십자가입니다.

만일에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그래서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우리는 자유인이 아닌 로봇이 될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부터가

선택의 자유에 속한 일입니다. 얻기 싫으면 거부해도 됩니다.

물론 거부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지만, 그것도 자신이 선택한 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일도,

따르는 과정에서 십자가를 지는 일도 모두 의무가 아닙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성모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원해서 응답하셨고, 순종하셨습니다(루카 1,38).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만 따라야 한다.”입니다.

길을 걷다가 힘들면 잠시 주저앉아서 쉬고 싶고,

좀 더 편한 길이 있지 않을까 하며 다른 곳을 바라보기도 하고,

왜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 하며 의심도 하고, 그게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물론 다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도

믿음이 흔들리거나 자신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위기를 겪은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 자체가 크게 창피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래도 된다.”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모님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어렵고 힘든 위기의 순간을

많이 겪으셨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럴 때마다 성모님은 기도하면서 그 위기를 극복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항상 하느님과 함께 계신 분인데,

이 말은 늘 기도하신 분이라는 뜻도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지 못합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질 수도 없고, 유혹이 다가왔을 때 물리칠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모든 면을 다 본받아야 하지만,

우리가 특히 본받아야 할 모습은 바로 항상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모님이 초대 교회 공동체의 기도의 중심이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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