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토요일] 탈렌트 비유 (마태 25,14-30)
바오로 사도는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형제에게 실천하고,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라고 한다. (1테살 4,9-11)
형제 여러분, 9 형제애에 관해서는 누가 여러분에게 써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느님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0 사실 여러분은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에게 그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더욱더 그렇게 하고, 11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재산을 맡긴 것에 비유하시며 탈렌트를 잘 활용하는 종이 되라고 하신다. (마태 25,14-3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제1독서 (1테살4,9-11)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11)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1절과 12절에서 자기 일에 충실하고 근면하게 일하라고 권고한다. 사도 바오로는 부지런하게 일할 것을 전에도 권고한 적이 있었는데, 본문과 테살로니카 후서 3장 11절과 12절에서 거듭하여 권고한다.
이러한 거듭되는 권고는 당시 테살로니카 교회에 주님의 재림이 그들 세대에 바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오해하여 신자들 사이에 생업의 포기와 같은 현상이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날이 멀지 않았으니 일상 생활에 매여 있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과 신앙을 지키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시한부 종말론을 외치는 집단에서 직장과 학교를 버리고 오직 그날만을 기다리며 집단 종교 생활을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테살로니카 교회가 시한부 종말론을 믿는 사교 집단은 아니었지만, 당시 팽배해 있던 임박한 종말에 대한 의식으로 말미암아 일부 신자들이 생업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 자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에게 바오로는 자기 손으로 힘써 일할 것을 권고한다.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1절은 등위 접속사 '카이'(kai)로 시작되고, 네 개의 현재 시제 부정사로 구성되어 있어,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0절의 '더욱더 그렇게 하고'라는 부정사와 더불어서 '권고합니다'라는 직설법 동사에 걸리는 문장이다. 따라서 4장 11절은 4장 10절에 논리적으로 연속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조용히 살도록'에 해당하는 부정사 '헤쉬카제인'(hesychazein; to be quiet)의 원형 '헤쉬카조'(hesychazo)는 '고요하다', '잠잠하다'라는 의미이다(사도11,18).
여기에서는 조용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 즉 이리저리 동요되지 않고 차분히 자기 중심을 지키고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였다.
말하자면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흥분되고 들떠 일상적인 일을 내팽개치는 자들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 일에 전념하고'라는 표현에서 '이디아'(idia)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또는 '다른 사람과 조금도 상관없는 자기 자신만의' 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프랏세인 타 이디아'(prassein ta idia; to mind your own business)는 다른 사람의 일에 무례하게 간섭하지 말고 자기의 일에만 전념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시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일상적인 일을 저버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동시에 당시 교회 직원이 아닌 몇몇 형제들이 교회 운영권에 간섭하려 했다는 사실까지 암시하는 대목으로 보인다.
사도 바오로는 그릇된 종말 사상을 퍼뜨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자들에 대해 '자기 일에 전념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이 표현은 당시 그리스 세계의 노동관을 반영한다.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손으로 일한다는 것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으로서 자유민들은 그것을 천박하게 여겼다. 따라서 이교도에서 회심한 자들은 이전의 이런 사상을 버리기 힘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본문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권고이다.더구나 '(제)일을 하십시오'로 번역된 '에르카제스타이'(erqazesthai)가 '힘써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힘쓰며'로 번역된 '필로티메이스타이'(pillotimeisthai)의 원형 '필로티메오마이'(pillotimeomai)는 '좋아하다','사랑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필로스'(pillos)와 '명예'를 의미하는 '티메'(time)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본래 '명예를 좋아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점차 '명예심의 동기로부터 어떤 일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다', '~하기를 열망하다'라는 뜻으로 발전했다. 본절은 부정사 목적격을 동반한 명령적 부정사로 쓰였으므로, '~하기를 열망하다'는 뜻으로 번역된다.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복음(마태25,14-30)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5~29)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주인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 주인을 두려워했다. 그는 받은 탈렌트에 대한 상실의 두려움과 투자로 인한 실패의 두려움을 가진 채, 주인에게서 받은 자본금을 투자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를 가진 그에게 남은 것은 자본금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 돈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기라도 했더라면, 거기에서 이자라도 얻을 수 있었을텐데, 그는 이자 한 푼 얻을 수 없는 땅에 그 돈을 숨겨 두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원금을 보존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나중에 빼앗겨 버리고 만다.
그는 25절에서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라고 말한다. 여기서 '도로 받으십시오'로 번역된 '에케이스'(echeis; here you have)는 '가지다', '소유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에코'(echo)의 현재 2인칭 단수 동사로서 '당신이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당신의 것을 당신이 가지고 있는데, 무슨 불평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라는 뉘앙스를 주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주인이 결코 손해 본 것이 아니라는 변명을 통해 자신의 무책임과 잘못을 덮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인의 기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마구 내뱉은 무책임하고 무례한 표현이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면책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악하고'로 번역된 '포네레'(ponere; wicked)의 원형 '포네로스'(poneros)는 '도덕적으로 사악한'이라는 의미외에도 '고통과 괴로움을 일으키는'이라는 의미(묵시16,2)를 지닌 형용사인데, 종이 나쁜 관리인 정신을 가졌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로 인해 주인에게 괴로움을 끼쳤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더군다나 그는 '게으른' 종이었다.
여기서 '게으른'으로 번역된 '오크네레'(oknere; slothful; lazy)의 원형 '오크네로스'(okneros)는 진보가 늦고 지체되며 나태한 상태를 의미하는 형용사이다. 그러니까 이 게으른 종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주인이 기대한 진보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여기서 '돈'으로 번역된 '아르귀리아'(argyria; money)의 원형 '아르귀리온' (argyrion)은 '은'(silver)을 의미하는 명사 '아르귀로스'(argyros)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은전', '은조각'을 의미한다(사도3,6; 루카19,23).
그 당시 화폐는 주로 은전이었는데, 주인은 그 은전으로 된 탈렌트를 '대금업자들에게' 맡겨두었다가 이자를 받게 해야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대금업자들'로 번역된 '트라페지타이스'(trapezitais)의 원형 '트라페지테스'(trapezites)는 수수료를 받고 돈을 교환해 주거나 고객의 예탁금을 보관한 후 이자를 지불하는 사람, 즉 '환전상'이나 '은행가'를 뜻한다.
또한, 여기서 '돈'으로 번역된 단어와 '대금업자들'로 번역된 단어 둘 다 복수형으로 쓰였으므로, 주인인 한 탈렌트나 되는 많은 돈을 여러 대금업자들에게 분산 투자했기를 내심 바랐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탈렌트'에 해당하는 '탈란타'(talanta; talents)의 원형 '탈란톤'(talanton)은 원래 중량을 다는 '천칭', '저울'이라는 뜻의 단어였지만, 중량의 측정 단위와 화폐 단위로 발전했다.
탈렌트는 무게로는 약 34kg에 해당하며(탈출38,25), 돈으로는 6,000 데나리온의 가치에 해당된다.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 데나리온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탈렌트는 노동자가 약 20년 동안 벌어야 하는 거액이었다.
그리고 영어에서 '재능'을 의미하는 'talent'라는 단어가 희랍어 '탈란타'에서 유래한 것이며, 여기서의 '탈란타'는 '재능'보다는 '사명'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이자'로 번역된 '토코'(toko; interest; usury)의 원형 '토코스'(tokos)는 '산출하다', '낳다'를 의미하는 동사 '티토'(tit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원래 '출산된 것'이라는 뜻이다.
돈의 이자를 '토코스'(tokos)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은 원금에서 증식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이자율은 연리 8%에서 48%의 고리(高利)까지 다양했다.
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돈을 빌려주더라도 이자를 받지 못하게 규정했지만(신명23,19), 타국인과의 거래에서는 이자를 받아도 된다고 하였다(신명23,20). 하지만 신약 시대에는 동족간의 거래에서도 이자를 받는 일이 거의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상황을 예로 들어 '이자' 이야기를 한 것이며, 동족간 돈 거래에 있어서 이자를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또한, '돌려받았을 것이다'로 번역된 '에코미사멘 안'(ekomisamen an)은 현재의 의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루지 못한 과거의 사실에 대하여 아쉬워하는 의미로 '받았어야 했다'(should have received)는 뜻이다. 그러니까 실제는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에게서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겠다'
이 구절의 선언은 한 탈렌트를 받았던 종이 악하고 게을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데 대한 응당의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종은 적극적으로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혹한 징계를 받게 된 것이다.
또한 이 구절은 주인이 원래 의도했던 목적이 악하고 게으른 종에 의해 실현되지 않았어도, 그 목적을 다른 방법을 통해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사명을 성실하게 잘 완수한 자에게는 당연한 보상 외에 또 다른 기대치 않았던 보상을 더해 준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부조리한 현상 가운데 하나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옹호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28절의 징계적 선언이 주인의 자의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영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마르4,25).
마태오 복음 25장 14~30절의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다. 각 종들에게 맡겨진 탈렌트는 그들에게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당한 양이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기에 알맞은 탈렌트를 맡기신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받은 사명과 재능과 은사가 다른 사람들의 그것에 비해 적든 많든, 자기비하나 열등감에 빠지거나 교만해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1코린15,41).
하지만, 우리는 때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 이상의 어떤 열매를 원하신다고 잘못 판단해 버리고, 하느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를 사용한번 해보지 못하고 묵혀두지는 않는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능력 이상의 결과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그에게 부여된 봉사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활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그의 은혜가 넘쳐나며 그의 심령도 성령충만으로 부요해질 것이지만,
반대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그에게 주어진 봉사의 기회를 하찮은 것이라고 무시하며 활용하지 않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그 은사를 상실해 가며, 더 이상 영적인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전락해 간다는 것이다.
탈렌트의 비유>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4-30).”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이 한 말에서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라는 말은,
사람들을 모질게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람이라고 주인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하느님이 너무 무서워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느님 핑계를 댑니다.
십계명은 사람이 지키기에는 너무 어려운 계명이라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고,
교리나 성경이 너무 어려워서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 라는 말은,
주는 것도 없이 빼앗아가기만 한다고 주인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께서는 복은 내려주지 않으시면서
가진 것을 다 바치라는 요구만 하신다.” 라고 불평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은 적게 바치면서도 많은 복을 받고 있는데,
나는 많이 바치고 있는데도 받는 복이 적다.”고 투덜거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켜야 할 계명들만 말하고,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지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라고 교회를 비난합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라는 말은,
주인이 준 돈을 손해 보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말이기도 하고,
자기도 나름대로 일을 잘했다고 생색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가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둔 것은, 일하기 싫어서 아무것도 안 한 것입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는 주인의 말은,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꾸짖는 말입니다.
만일에 그가 어떻게든 돈을 벌려고 노력했다가 손해를 보았다고 해도,
주인은 결과를 보지 않고 노력만 보고서 그를 칭찬했을 것입니다.
“돈을 대금업자에게 맡겼다면 이자라도 받았을 것이다.” 라는 말은,
이익을 얻지 못한 것을 꾸짖는 말이 아니라,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을 꾸짖는 말입니다.
어떻든 세 번째 종의 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의 모습에서 루카복음 13장 25절-27절에 나오는 사람들이 연상됩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루카 13,25-27).”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주님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들의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라는 말에는,
그들이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 것도 아니고,
‘이웃과 함께’ 먹고 마신 것도 아니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 없이 이기적으로 자기 혼자 먹고 마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님 앞에서’ 라는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말이 됩니다.
또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자기들이 보았다는 뜻일 뿐입니다.
이 말에는, 그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았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죄를 지었다는 말은 없는데,
주인은 그들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불의를 일삼은 것과 같다고 선언합니다.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한 사람들’이어서 주님의 집에 못 들어갔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아무것도 안 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1-32).”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분명히 강도들과 공범 관계가 아니고,
직접 어떤 죄를 지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강도당해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사랑 실천을 안 하고) 피해서 지나간 것은
강도들만큼이나 큰 죄를 지은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최후의 심판’ 장면의 왼쪽 사람들에게 내려진 선고가
바로 그 가르침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1-43).”
이 선고는, ‘아무것도 안 한 죄’는 참으로 ‘대단히 큰 죄’ 라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는,
“누구든지 말씀을 실천하면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더 많은 은총을 받을 것이고,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처음에 받은 은총도 잃게 될 것이다.”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마태 25,14-30)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하늘 나라를 어떤 사람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얼마나 더 많은 이익을 남겼는가에 따라서 보상을 해주는 이야기이다.
얼핏 들으면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남겼느냐에 따른 보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서 포상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달란트를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유익하고 덜 받은 사람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리고 일반 사회에서처럼 성과에 다른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에
방법이야 어떻게 되든 많은 이익만 남기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이익을 남기면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가난하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즉 얼마나 많은 물질적인 부를 누리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든지 아니면 축복을 받지 못하였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과연 그런 뜻인가?
아니다.
그러면 달란트란 무엇인가?
우선 달란트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달란트란 그 사람의 어떤 능력이나 재물의 축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음에 이어서 나오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사랑의 행위를 말한다.
사랑은 하느님의 재산이다.
따라서 가난한 이웃에게 베푸는 나의 사랑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요,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나도 이웃에게 베풀어야할 사랑을 말한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이방인이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마태 25,34-36)
라고 말한 사랑이다.
아무리 재능이 탁월해서 많은 일을 하고 그래서 많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성 바오로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 보자.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희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코전13, 1-3)
오늘 복음은 세 가지 시간대를 말하고 있다.
즉 과거는 우리가 달란트를 받은 시간이고,
현재는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는 시간이고,
미래는 우리가 사용한 달란트에 대한 셈에 따라서 상을 받는 시간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내가 달란트를 사용한 것에 대한 셈만 하실 뿐이다.
미래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사용한 것에 대한 평가일뿐
다른 것을 가지고 셈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일까?
오늘 우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지금 내가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거나 아니면 잘못 사용하고 있다면
마지막 날까지 가지 말고 지금 교정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날에 가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차 심판날에 예수님께서 어떤 문제를 내실 것인지를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이고 그 때의 시험 답안지인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은 하나도 실천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성당에만 왔다 갔다 하면,
죽음 후에 천국, 즉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이런 신앙 생활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생각과 같이 잘못된 신앙 생활이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 가서 주인님의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
하느님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그 어떤 사랑도 실천하지 않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바로 한 달란트를 받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가 받은 달란트만큼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많이 실천할 수 있는 좋은 환경, 좋은 자리에 있어서 많은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랑은 활동 범위가 좁고 또 여건이 여의치 못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기 능력껏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만큼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
문제는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얼마나 사랑으로 실천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는지 일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하였느냐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얻을 것이다." (마태 16,24-25)
라는 말씀이 바로 구체적으로 오늘의 말씀을 이야기 한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재산인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일이고
그 사랑은 지금 여기에서 실천되어져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이 다음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는 축복된 말을 듣게 되리라.
유광수 야고보 신부

예수님의 탈렌트의 비유를 듣는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달리 받은 탈렌트로 인한 불공평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받은 탈렌트를 계발하지 않고 숨겨 둔 게으른 종을 탓하는 이야기로 읽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논리에서 읽는다면 이 비유는, 사업 수완이 좋은 종들이 주인에게 칭찬을 받고 얻은 이윤까지 돌려받고, 게으르고 불성실한 종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해 주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이 탈렌트 비유의 본뜻은 아닙니다.
복음서의 비유는,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맡겨 준 하느님의 능력,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사랑해야 하는 의무’를 뜻합니다. 탈렌트는 당시 가장 큰 화폐 단위로 상상을 초월하는 큰 액수지만, 복음서는 이런 큰 금액을 하느님의 사랑에 비유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처지에 맞게 사랑할 능력에 따라, 더 많이 사랑 받은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해야 할 책임을 갖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살면서 남을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작은 일도 더 큰 사랑으로 수행할 수 있고, 사랑을 실천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큰 기회가 주어져도 이기적 자아에 갇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를 통하여 제자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 축복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과 사랑을 어떻게 나누고 가꾸어야 참된 부유함을 얻을 수 있는지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더 큰 부유함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