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세례자 요한의 머리 (마르코 6,17-29)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이러한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마르 6,17-29 참조).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한 것은 4세기 무렵 그의 유해가 있던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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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라며, 내가 너를 유다의 임금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고 하신다. (예레미야 1,17-19)
그 무렵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17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헤로데는 자기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손님들을 즐겁게 하자 그에게 맹세한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게 한다. (마르코 6,17-29)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제1독서 (예레1,17-19)
"너는 허리를 동여메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7)
예레미야서 1장 11~16절에서 하느님께서 예레미야가 예언자 소명에 대해 확신을 갖도록 두 가지 환시를 주셨음을 밝혔다.
이제 예례미야서 1장 17~19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본격적으로 사명을 시작하도록 촉구하시고, 약속을 통해 그를 격려하시는 내용이 소개된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라'고 명령하신다.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의복으로, 저녁에는 이불로 사용되었다. 저녁에는 펼쳐서 이불로 사용하고, 아침이 되면 다시 그것을 몸에 두르고 허리를 묶어 일상복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어나 허리를 동여매는 행위는 일상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를 마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허리를 동여맨다는 표현은 상징적으로 전쟁을 나갈 준비가 마쳐졌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서 1장 1절의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라는 명령은 영적인 의미로 볼 때, 예레미야가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소환되어 지휘권을 위임받은 것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을 향해 반역을 일으킨 남부 유다 백성을 진압하기 위해 어떤 다른 무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통해 그들과 싸우도록 명령을 받은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여기서는 예례미야서 1장 8절에서 언급한 내용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예레1,8)
사실 예레미야서 1장 17~19절의 내용은 예레미야에게 주님께서 강력한 주권으로 예언자의 소명을 주시는 예레미야서 1장 8절의 내용을 확대시켜 보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여 명령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서 1장 8절의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는 권고는 예레미야서 1장 17절에서 그대로 다시 나타나며,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는 약속은 예레미야서 1장 19절에서 그대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맥으로 볼 때 약간 다른 면이 있다. 예레미야서 1장 8절에서는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소명 앞에서 주춤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자 사명을 사양하는 태도에 대해 하느님 편에서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한 의미로 이러한 명령이 주어졌다.
반면에 예레미야서 1장 17절에서는 사명을 받고 그 임무의 막중함을 알고도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전능하신 하느님보다 눈에 보이는 권력자들이 더 크게 느껴져서 사명을 그르치거나 뒤로 물러서는 행위를 한다면,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불신앙적 태도임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주어진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복음(마르6,17~29)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28~29)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살로메는 드디어 참수당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가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준다.
여기서 '그것을'로 번역된 '아우텐'(auten; it)은 3인칭 단수 대명사 여성 목적격이다. 이 대명사의 성(姓)이 여성인 것은 잘려나간 '머리'를 가리키는 명사 '케팔레'(kephale)가 여성 명사이기 때문이다.
살로메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갖다 줌으로써 그렇게도 세례자 요한에게 분노하며 죽이고자 했던 헤로디아의 소원은 마침내 성취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쟁반에 담겨져 있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보자마자 헤로디아는 그녀의 긴 머리핀(바늘)을 뽑아 세례자 요한의 혀를 수없이 찔러서 뽑아 버렸다고 한다. 사악한 여인은 자신의 비행을 고발하는 진리와 정의의 혀를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의(義)를 말하다가 비록 참수당했지만, 세례자 요한의 그 정신은 복음에 그대로 기록되어 대대로 칭송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에 모셨지만, 제자들은 사랑하는 스승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목이 잘려나가고 없는 몸뚱아리만 장사지내야 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선구자이며 최후의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루카7,28)은 30여년 남짓한 짧은 생애를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공적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14장 1~12절의 말씀이 나오니 더 많은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8~11).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에서 '부추기는 대로'에 해당하는 '프로비바스테이사'(probibastheisa; being before instructed; prompted)는 '~앞에'라는 뜻을 지니는 전치사 '프로'(pro)와 '폭력을 사용하다', '강제로 들어가다' 등의 뜻을 지니는 '비아조'(biazo)가 결합되어 '앞으로 내세우다', '선동하다'라는 뜻을 지닌 '프로비바조'(probibazo)의 분사 수동형이다.
이것은 어린 살로메가 간교하고 사악하며 잔인한 어머니 헤로디아의 강압에 가까운 권유에 따라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리 가져다 주십시오'에서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도스'(dos; give)는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부정 과거 명령형은 반복되는 동작이 아니라 단 한번에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동작을 요구할 때 쓰인다. 또한 '이리'라는 뜻의 부사 '호데'(hode; here)가 사용되어 바로 잔치가 벌어진 그 장소에서 이 일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살로메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른 변명을 하지 못하도록 세례자 요한의 즉각적인 처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임금은 괴로웠지만'에서 '임금'('호 바실류스'; ho basileus; the king)이라는 말이 세례자 요한의 순교 기사가 수록된 마태오 복음 14장 1~12절 가운데서 여기만 나온다.
1절에서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분봉왕'('테트라아스케스'; tetraarches; tetarach)이라는 표현이 한 번 나온 후, 계속 '헤로데'(Herodes)란 이름이 나오다가 본문에서 '분봉왕'이 아니라 '임금','왕'이라는 직함이 등장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처형 결정의 기로에 놓인 이러한 시점에서 특별히 '임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임금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자가 임금으로서의 권한만을 행사하는 데 대한 조롱과 고발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괴로웠지만'에 해당하는 '뤼페테이스'(lypetheis; was sorry; was distressed)의 원형 '뤼페오'(lypeo)는 여기서 수동형으로 쓰였는데, 이럴 경우 '슬퍼하다', '마음이 상하다', '고민스럽다' 등의 다양한 뜻을 지닌다.
당시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의로운 이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이 들고 마음이 상했을 것이고, 또한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세례자 요한을 처형한 뒤에 있을지도 모르는 소요 사태에 대하여 고민도 하는 혼란 가운데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원문 성경에는 '맹세'에 해당하는 '투스 호르쿠스'(tous horkoos; the oath's sake; of his oaths)가 복수형으로 나와 있어서 헤로데 안티파스가 그 자리에서 여러 차례 맹세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맹세를 되돌릴 수가 없었다.
당시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6장 21절에 의하면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이었다.
자신의 그릇된 맹세와 다른 사람의 이목 때문에 불의(不義)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례자 요한의 처형을 명령한 이러한 행동에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비열함이 잘 나타난다.
한편, '소녀'에 해당하는 '코라시오'(korasio; girl; damsel)의 원형 '코라시온'(korasion)은 '처녀'를 뜻하는 '코레'(kore)의 지소어(指小語)로서 '작은 소녀'라는 뜻을 가지며 다소 경멸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소녀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평화'를 뜻하는 '샬롬'(shalom)에서 파생한 '살로메'이며, 당시 나이는 15세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평화'였으나 그녀는 전혀 평화에는 기여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던 위대한 예언자를 죽게 함으로써 역사에서 악녀로 길이 기억되고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 14장 11절을 보면, 죄와 쾌락에 눈이 어두워 실로 주어서는 안되고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을 태연스럽게 주고 받는 비극의 역사가 연출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구약성경 에제키엘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네가 그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곧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고 살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네가 악인에게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의 악과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에제 3,17-19).”
이 말씀은 예언자의 사명과 책임, 그리고 예언자에 대한 보상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언자에게는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여기서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꾸짖은 것은,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해서였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악인이라도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에제 33,11).”
그런데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회개하기는커녕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세례자 요한은 실패한 예언자처럼 보입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회개시키지 못하고 살해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임무를 죽을 때까지 수행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충실한 예언자였고, 그런 점에서 성공한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순교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하느님의 계획이었나? 또는 하느님의 섭리였나?”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또는 섭리)’ 라는 말을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악한 일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라,
그 악한 일에서 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세례자 요한이 살해당한 것은 하느님의 계획도 아니고, 섭리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예언자가 살해당하는 것을 바라시는 분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악인들의 회개와 구원입니다.
만일에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회개했다면,
그러면 세례자 요한은 살해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신 대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회개하지 않은 것과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은, 그들 자신들이 구원받기를 스스로 거부한 일이고,
자기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표지다.’ 라고 말하는가?”
이 말은, 결과적으로 볼 때 그렇게 해석된다는 뜻이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처음부터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죽도록 준비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일에나 “이 일은 하느님의 뜻이다.”,
또는 “이 일은 하느님의 섭리다.” 라는 말을 적용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식민 지배와 전쟁 등 우리 민족의 고난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그런 고난을 극복하고 더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많은 고난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
그래서 정말로 좋은 나라 건설에 성공하게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전 과정에 대해서 하느님의 섭리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박해자였던 사울이 위대한 사도 바오로가 된 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스테파노가 사울의 박해를 받고 죽은 일 자체는 하느님의 뜻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일도 아니고, 섭리도 아닙니다.)
‘인간 구원’이라는 거대한 사업은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각 개인의 구원은 각자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과 멸망을 향해서 가는 길.
예언자들은 우리에게 ‘인간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과
생명을 얻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일이니 자기 책임이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모든 일을 미리 다 알고 계시지 않은가?
그러니까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뜻대로 되는 것 아닌가?”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시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구원과 생명의 길을 선택하기를 바라십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에게 조금이라도 선한 마음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고,
잘만 하면 그들을 회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었을 텐데,
그러면서도 일이 잘못되면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앞에도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권력자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편안하게 사는 길과
죽을 때 죽더라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고난의 길.
그때 악마의 유혹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유혹했던 악마가 세례자 요한을 그냥 놓아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든 세례자 요한은 편안하게 사는 길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사실 모든 신앙인에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예언자적 사명이 있습니다(마태 5,13-16).
이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고난과 박해를 겪을 수도 있는데,
그게 무서워서 사명 수행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소금’으로 만들어버리는 선택을 하는 것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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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이 탄생하였을 때, 유다의 온 산악 지방 사람들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하고 말하였습니다. 아기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루카 1,76)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사명은 그분을 이스라엘에 알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였고, 헤로데 영주에게 바른말을 하여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한에게 앙심을 품은 헤로디아는 그를 죽일 기회를 얻습니다. 그녀의 딸 살로메는 고관대작들이 모여 있는 잔치에서 춤을 잘 춰 헤로데의 환심을 사자, 상으로 요한의 목을 청합니다. 물론 이는 헤로디아의 간계입니다.
헤로데 임금의 명으로 참수당한 요한의 목을 본 헤로디아는 승리감에 도취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수난은 하느님의 섭리로 이미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요한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메시아를 어떻게 다룰지 예언하였습니다. 요한의 수난은 우리에게 회개의 세례와 수난의 세례를 받도록 초대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