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모세의 자리 (마태오 23,1-12)

2017. 8. 25. 오후 6: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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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모세의 자리 (마태오 23,1-12)

위선자의 무리, 바리사이파 사람들

모압 여자 룻은 보아즈의 아내가 되어 오벳을 낳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이다. (룻 2,1-3.8-11; 4,13-17)
엘리멜렉의 아내 1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 가문으로 재산가였는데, 이름은 보아즈였다.
2 모압 여자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들로 나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뒤에서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그래 가거라, 내 딸아.” 하고 말하였다. 3 그래서 룻은 들로 나가 수확꾼들 뒤를 따르며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 가문인 보아즈의 밭에 이르게 되었다.
8 보아즈가 룻에게 말하였다. “내 딸아, 들어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갈 것 없다. 여기에서 멀리 가지 말고 내 여종들 곁에 있어라. 9 수확하는 밭에서 눈을 떼지 말고 있다가 여종들 뒤를 따라가거라. 내가 종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였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 있는 데로 가서 종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셔라.”
10 그러자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11 보아즈가 대답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
4,13 보아즈가 룻을 맞이하여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가 룻과 한자리에 드니, 주님께서 점지해 주시어 룻이 아들을 낳았다. 14 그러자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오늘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 15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에게는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 아기가 그대의 생기를 북돋우고 그대의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았다. 나오미가 그 아기의 양육자가 된 것이다.
17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며,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고,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마태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제1독서(룻기2,1~3.8~11;4,13~17)

"오늘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 (14ㄴ,ㄷ)

베틀레헴 아낙네들은 룻에게 아들을 낳게 하신 분이 바로 주 하느님이심을 알고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에 해당하는 '빠루크 예흐와'(baruk yehwa; praise be to the LORD)에서 '빠루크'(baruk)'축복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빠라크'(barak)의 수동태 분사로서 '축복을 받는', '찬양을 받는'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주님께서 찬미를 받으신다'는 뜻이다.

베틀레헴 아낙네들은 나오미에게만 주님을 찬미하라고 명령하지 않고, 나오미와 더불어 주님을 찬송한 것이다. 룻이 아들을 낳은 사실이 그들에게도 커다란 기쁨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않게'로 번역된 '히쉬비트'(hishybith; has left without)의 원형 '샤바트'(shabath) 동사가 전치사 '민'(min)을 수반하지 않고 사역 능동형 완료로 사용되어 '끝나게 하다', '그치게 하다'는 뜻이 된다.

이 동사 자체가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에 앞의 부정어 '로'(lo)는 이 문장이 이중으로 부정된 상태임을 드러내어 강한 긍정의 표현이 된다.

즉 아낙네들은 후손이 없어 영원히 그 가문의 이름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으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대를 이을 자가 생겨 기뻐하고 있는 나오미에게 부정을 통한 강한 긍정으로 축하했던 것이다.

한편 대를 이을 자가 구체적으로 보아즈인지 아니면 룻이 낳은 아들인지에 관해 의견이 많지만, 룻기 4장 14절 후반절과 15절의 내용이 룻이 낳은 아들에 관한 것임을 볼 때 후자로 이해된다.

그리고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한 축복의 말들은 룻기 1장 21절("나 아쉬움 없이 떠나갔는데 주님께서 나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찌 그대들은 나를 나오미라 부르나요?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 주셨답니다.")상당히 대조된다.

룻기 1장 21절에서 나오미는 자신의 처지를 거의 절망적으로 표현했지만, 여기서 베틀레헴 아낙네들은 나오미의 그때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이 아이의 이름'으로 번역된 '셰모'(shemo; his name)'그의 이름'이라는 뜻이며, '기려지기를 바랍니다'로 번역된 '웨익카레'(weiqqare; that may be famous)는 접속사 '와우'(wau)'부르다'는 뜻을 가진 '카라'(qara)의 단순 수동형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형이 결합된 형태로 '그리고 그가 불리워질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완료는 화자의 염원, 기원을 나타내는 권유형이므로 '그리고 그가 불리워지기를 바라노라'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계약의 백성 모두를 지칭한다.

룻기 4장 11절의 보아즈에 대한 축복에서는 같은 지역인 '에프라타와 베틀레헴'이 언급되었으나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언급함으로써, 축복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베틀레헴 출신의 이스라엘 임금 다윗과 더 멀게는 온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과 '모든 계약의 백성'에게 끼칠 축복을 보여준다.


2015년 1월 17일 토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복음(마르2,13~17)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복음(마태23,1~12)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5)

마태오 복음 23장 5~7절까지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외적인 경건 과시(5절),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끝없는 명예욕(6절),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얻고자 하는 마음(7절)에 대한 대표적 예이다.

'성구갑'으로 번역된 '퓔라크테리아'(phylakteria; phylacteries)의 원형 '퓔라크테리온'(phylakterion)은 모세 율법 중에서 탈출기 13장 1~10절, 11~16절, 신명기 6장 4~9절, 11장 13~21절 등의 네 부분을 작고 긴 양피지 조각에 기록하여 그것을 작은 상자 속에 봉해 넣은 것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네 손에 감은 표징과 네 이마에 붙인 표지로 여겨라'말씀(탈출13,16; 신명6,8)에 근거하여, 위의 네 부분의 율법의 구절을 기록한 경문을 넣은 성구갑을 이마와 왼팔에 가죽끈으로 고정하여 틈나는 대로 보면서 경건에 힘썼던 것이다.

마태오 복음 23장 5절에서 '넓게 만들고'해당하는'플라튀누신'(platynusin; they make wide; they make broad) 다른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도록 성구갑의 크기를 크게 한다는 뜻이다.

시행 초기인 바빌론 유배 포로기 직후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성구갑을 달고 다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달고 다녔다.

과시욕이 지나치다 못해 어떻게 하면 더 크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한편, '옷자락 술'로 번역된 '크라스페다'(kraspeda; the tassels of their garments)의  원형 '크라스페돈'(kraspedon)'망토 또는 외투의 가장자리에 털실을 꼬아 매달리게 장식한 작은 부속물'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민수기 15장 37~40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흰색과 청색 실로 짠, 이와 같은 부속물을 겉옷의 가장자리에 매달았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실천하게 하는 기능을 하며, 마음과 눈이 쏠리는 데로 욕심을 따라 방종하게 살아 배신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해 주었다(민수15,39).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러한 율법의 정신을 따르려는  마음보다는, 단지 사람들에게 자신을 거룩하게 보이려는 열망으로 '옷자락 술'을 더 크게 만들어 그것을 즐겨 입고 다녔던 것이다.


따뜻한 가슴과 지식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풀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신앙인들이 실행하고 지켜야 할 하느님 말씀들을 말한다고 해도,

그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지도자라면 그를 따르지 마라.”

(또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직책을 수행하고 있을 때,

그가 올바른 지도자인지 보려면 그의 ‘말’이 아니라 ‘행실’을 보아야 한다.”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악마도 성경을 인용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마태 4,6).

성경을 말한다고 해도 악마는 악마일 뿐이고, 악마의 말은 악마의 말일 뿐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도,

악마가 하는 말이 성경 말씀으로 승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독하는 죄가 될 뿐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 말씀’에 관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따라서 강론을 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강의를 하든지 간에

하느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려면,

그 자신이 먼저 말씀대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원칙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 다 해당되는 원칙입니다.

신앙인이란 자신의 ‘삶’으로 믿음을 증언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4).”

희생, 봉사, 헌신이 중요하다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신은 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대사제 카야파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이 말은 온 민족의 멸망을 막으려면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희생이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남을 희생시키는 것은 살인일 뿐입니다.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마태 23,5).”

이 말씀은 위선자들이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고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존경을 받는 일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칭찬과 존경이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게 만드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만 욕심내서

사람들을 속이는 짓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거룩하게, 또 의롭게 행동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위선이라고 부릅니다.

진실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똑같이 행동합니다.

우리는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도, 하느님께서 보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6-7).”

이 말씀은 위선자들의 교만과 허영심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만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거짓 겸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겸손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일부러 낮은 자리를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진짜 겸손과 거짓 겸손을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자기 자신도 그것을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낮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위선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교만한 사람이라는 평을 안 들으려고 의식적으로 자기를 낮춥니다.

위선자는 자기의 행동이 위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 자기가 위선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당신은 위선자다.” 라고 비난하면 화를 냅니다.

(우리는 남의 위선과 교만에 대해서 비판하는 말은 쉽게 하면서,

자기 자신의 위선과 교만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나는 지금 진짜로 겸손한 사람인가?

아니면 겸손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는 것을 좋아할 뿐인 위선자인가?

나의 ‘낮춤’은 진짜 겸손인가, 겸손한 척 하는 거짓 겸손인가?)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8-10).”

이 말씀은, 잘난 척 하면서 남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고 가소로운 일인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간은 모두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들일 뿐입니다.

다 똑같은 처지이니 남들보다 더 귀하고 높은 사람이 있을 수 없고,

업신여기고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똑같이 구원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인간 세상의 제도 안에서 높은 자리처럼 보이는 자리가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높은 자리는 낮은 자세로 더 많이 봉사해야 할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섬기는 직무를 맡은 사람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어떤 직무를 수행하든지 간에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한 위선자로서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는 처지가 되지 않도록...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질책하십니다. 높은 자리를 찾으며 남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알맹이 없는 삶이며 쭉정이 같은 겉치레를 낳습니다. 바리사이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깊이 새겼습니다. 사도는 율법의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2코린 3,6 참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보이려고 선행과 기도를 한다면, 바리사이처럼 ‘회칠한 무덤’이 됩니다. 우리가 모든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신한다면, ‘율법 학자의 교만’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윗자리를 좋아하고 존경받기를 바란다면, 그들의 허영을 배우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는 우리는 그분의 겸손과 고난을 따라야 합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지만, “율법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죄 많은 여러 욕정이 우리 지체 안에서 작용하여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로마 7,5)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갑니다. 율법의 행위로 완성되지 못한 구원이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에 사로잡혀 말로만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율법의 의로움은 외적인 행위로 하느님을 완전히 섬길 수 있다는 자만을 낳습니다. 은총의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성덕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합니다. 성령에 따라 살며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화를 누립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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