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영원한 생명 (마태오 19,16-22)

2017. 8. 20. 오후 7: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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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영원한 생명 (마태오 19,16-22)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자 주님께서는 진노하시어 그들을 약탈자 손에 넘겨 버리시지만, 판관들을 세우시어 구원해 주도록 하신다. (판관 2,11-19)
그 무렵 11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12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 13 그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겼다.
14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어, 그들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겨 버리시고 약탈당하게 하셨다. 또한 그들을 주위의 원수들에게 팔아넘기셨으므로, 그들이 다시는 원수들에게 맞설 수 없었다. 15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들이 싸우러 나갈 때마다 주님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심한 곤경에 빠졌다. 16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17 그런데도 그들은 저희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이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빨리도 벗어났다. 그들은 조상들의 본을 따르지 않았다.
18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판관들을 세우실 때마다 그 판관과 함께 계시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억압하는 자들과 학대하는 자들 앞에서 터져 나오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19 그러나 판관이 죽으면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완악한 행실과 길을 버리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냐고 묻는 젊은이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하신다. (마태오 19,16-22)
그때에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제1독서 (판관2,11-19)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16) 그런데도 그들은 저희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 뿐더러, 다른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17) 

본문은 자신들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판관을 일으키셨다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데만 몰두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일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판관'으로 번역된 '쇼페팀'(shopetim; judges)는 '재판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샤파트'(shapat)의 분사 복수형으로서 명사적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따라서 '판관'은 문자적으로는 '재판하는 자', '재판관'이라는 뜻이며, 개신교에서는 '사사'(士師)라는 단어를 쓴다. 

당시 '판관'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쟁을 재판하고 쟁론을 그치게 하는 으로만 그 성격이 제한되지 않고, 군사 지휘관의 지위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적대자들의 공격에서 구원해 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원문 성경은 복수형을 사용해서 판관이 한두 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나타내 주고,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때와 장소에 적절한 판관들을 세우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하였다'(16)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해 주시도록 하셨다'에 해당하는 '와요쉬움'(wayoshium; which delivered them; who saved them)은 계속적 '와우'(wau)'구원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야샤'(yasha)의 사역능동형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형남성 3인칭 복수 목적격 접미어가 결합한 형태이다. 

직역하면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들(판관들)로 하여금 그들(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다' 이다. 

이처럼 겉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수들에게서 구원한 사람들은 판관들이지만 그 뒤에서 그 일을 계획하고 성취하도록 만드신 참된 지도자는 하느님이심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것이 당신이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행하신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구원자를 보내신, 사랑이 풍성하신 하느님이심이 계시되고 있다(판관2,15.18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받거나 고통을 받는 것을 결코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억누르지도 슬프게 하지도 않으시네" (애가3,33)라는 말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 고난을 사용해서 우리를 완전히 파멸시키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를 그 죄악 가운데서 돌이키기 위한 하느님 자비심의 발로인 것이다. 

'그들은 저희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 뿐더러' (17)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위기에서 구원한 판관들의 말까지도 듣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이없어 하는 저자의 심정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판관기 2장 16절에 나오는 데로 하느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워서 그들을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이처럼 자신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힘을 쓴 판관들에게조차도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판관 시대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적대자들의 압제에서 구원해 준 인도자의 말도 듣지 않는 부도덕하고 몰염치한 존재들이었다. 

'다른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불륜을 저지르고'에 해당하는 '자누'(zanu; they went a whoring; prostituted themselves)'음행하다', '간통하다', '불륜을 저지르다'는 뜻을 가진 동사 '자나'(zana)의 완료 3인칭 복수형으로서, '그들이 간통하였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족속들의 신을 숭배하는 것을 영적 간음으로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 계약을 맺은 참된 주인이신 주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은 마치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간 것과 같은 부도덕하고 있을 수 없는 행위로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경배하였다'에 해당하는 '와이셋타하우우 라헴'(waishethahauu lahem; and horshiped them; and bowed themselves to them)에서 '와이셋타하우우'(waishethahauu)는 '절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샤하'(shaha)의 재귀형 미완료 3인칭 복수형계속적 '와우'(wau)가 접두된 형태로서 '그들이 스스로 절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판관기 2장 12절'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와 동일한 문구로서 이방 신들에게 절한 것이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발적인 뜻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여 준다. 

가나안 땅은 물이 넉넉하고 땅이 기름지며 목초지가 많고 농사가 잘 되는 땅이었는데, 가나안에서 거주하던 이들은 그 땅에서 풍요를 누리는 원인이 햇빛과 바람과 비를 주관하는 바알신과  풍요를 주관하는 아스다롯 여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그러한 사상을 흡수했으며, 이제 더 이상 주 하느님은 가나안 땅에서 그들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신이 못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이방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 탐욕을 품었으며, 가나안의 발전된 문화를 동경하며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받아들이는 우상 숭배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마음의 온전한 정(情)과 사랑을 드리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 즉 사람과 세상의 헛된 우상들인 돈, 물질, 권력, 명성, 쾌락, 지식 그 자체에 마음을 온전히 빼앗겨 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하고 회심할 일이다.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복음(마태19,16~22)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1)

마태오 복음의 병행 구절마르코 복음 10장 21절루카 복음 18장 22절에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대신에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말씀을 다 하셨는데, 복음서 저자들이 각기 그 가운데 하나씩 선별하여 기록했다고 본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라는 말씀을 먼저 하시고, 이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부족한''완전한'대조되는 개념이 된다. '완전한'이란 부족함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처럼 '완전한'에 해당하는 '텔레이오스'(teleios; perfect)는 일차적으로는 결여된 것이 전혀 없는 완벽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하지만 인간이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보면, '텔레이오스'(teleios)'성숙한' 혹은 '목표에 도달할 만한 수준의'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히브5,14).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지고(至高)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이 구절을 통해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19장 17절에서 '계명들을 지켜라'는 우회적인 답변을 통해 그가 계명을 전부 지키지도 못함을 교훈하려 하셨던 것처럼, 마태오 복음 19장 21절에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는 명령으로서 구원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더욱 더 명백하게 하신 것이다.

구원은 어떤 조건을 인위적인 노력으로 충족시킴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 것으로서 전적인 하느님의 은총임을 밝히신다. 

'가서 ~ 팔아 ~ 주어라'

여기서 나오는 세 동사는 모두 부정(不定)과거 능동태 명령형인데, 희랍어에서 부정과거 명령형은 계속 반복되는 동작을 명령하는 현재 명령형과는 달리, 일회적인 동작을 명령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지금 당장 가서 단번에 모든 것을 팔아 다 나누어 주라는 매우 강력하고도 신속을 요구하는 명령인 것이다. 재물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끊어 버리고,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의 구제를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 것에 대한 미련과 집착으로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 하느님의 나라를 최우선적인 가치로 삼아 그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말이다.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보물'에 해당하는 '테사우로스'(thesauros; treasure)'영원한 생명'가리킨다.

'보물'이 상징적으로 쓰일 때에는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것을 가리키며, 쉽게 사라져 버리고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없는, 이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 등과 같은 세속적인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지닌 '영원한 생명'을 나타낸다(마태13,44참조).

한편 '네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에 해당하는 '엑세이스'(ekseis; you will have)는 미래형이다.

앞의 '가서', '팔아', '주어라'현재 명령형을 지금 바로 행하여야 할 명령으로 알아듣고 실천할 때 미래의 영생이 보장됨을 보여 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서, '팔아', '주어라' 현재 실행해야 하는 명령들이 구원을 보장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현재 주어진 이러한 명령은 구원을 보증받은 성숙한 하느님의 자녀가 자연스럽게 생활 가운데 실천할 수 있는 구원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가서', '팔아', '주어라'를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구원을 보증받은 하느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영생을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19,16-19)”

 

여기서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라는 말씀은,

지금의 문맥에서는 “선한 일이 무엇인지 몰라서 묻는 것이냐?”,

즉 “잘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느냐?”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반문하셨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답변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선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선의 원천이신 분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의 계명들을 지키면 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들은 ‘십계명’과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십계명 실천과 사랑 실천만 잘하면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0-22).”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는 말은,

“십계명은 제가 다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로 해석됩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라는 말 뒤에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마르 10,21).

그 젊은이가 십계명과 사랑 실천에 관한 계명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예수님도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잘 지키고 있음을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지향과 의도를 인정하신 것.)

아마도 그 젊은이는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율법만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도 아니었던 것 같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들을 네가 완전하게 실천하려거든”으로 해석됩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재산에 대한 애착심을 버려라.”로 해석됩니다.

그가 좋은 지향과 의도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되지만,

실천에 부족한 점이 있고,

그 부족한 점은 바로 재산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경건한 유대인들처럼 계명들과 율법들을 잘 실천하면서,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자선 행위도 잘 실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천은 자기 재산이 축나지 않는 범위에서 하는 실천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하고 철저한 실천을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재산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비결 같은 것은 따로 없습니다.

과감하게 재산을 자기에게서 떼어놓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냥 버리기만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애착심을 버리는 일도 되고, 사랑 실천도 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는

“재산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면,

네가 바라는 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를 사도들과 같은 수준의 제자로 삼고 싶으셔서

그에게 특별히 하신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사도들처럼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슬퍼하면서 떠납니다.

지상에서는 부유하게 살고 싶고, 저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둘 다 누릴 수는 없다고 하시니까 슬퍼한 것입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재물에 대한 그의 애착심이 컸기 때문이다.”입니다.

(이 애착심은 탐욕과 다릅니다.

탐욕은 죄를 지으면서까지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는 일이고,

애착심은 죄는 짓지 않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아끼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그 젊은이를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애착심’이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가족에 대한 애착심은 재산에 대한 애착심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슬퍼하면서 떠난 그 젊은이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나중에라도 마음을 바꿔서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을 수도 있고,

영원한 생명은 단념하고 그냥 재산이나 지키면서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이야기인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숙제처럼 남아 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끊고

하느님 나라만 향해서 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만 움켜쥐고 살다가 허무하게 인생을 마칠 것인가?

 

송영진 모세 신부



복음 : 마태오 19,16-22 

 어떤 가정주부가 남편의 수입이 적어서 동네에 구멍가게를 냈습니다. 이 아주머니가 정직하고 친절하게 물건을 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점점 많아졌고, 물건이 달리게 되어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놓으며 하루 종일 정신없이 팔아야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퇴근하여 바쁘게 장사를 하고 있는 부인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동네 다른 가게들은 이제 손님이 거의 없대. 저 건너 가게는 아예 곧 문을 닫아야 할 것 같다더군.”

이 말을 듣고 그 부인은 물건을 트럭으로 주문하지 않았고, 파는 물건의 종류도 줄여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물건은 건너편 가게에 가시면 살 수 있습니다.”

그 후로 장사로부터 벗어나 시간이 많아진 부인은 좋아하던 독서에 빠질 수 있었고, 틈틈이 글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빙점’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남긴 미우라 아야꼬 여사의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오늘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완전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미우라 아야꼬도 욕심을 버림으로써 세상에 더 많은 기여를 하는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곧 자신이 가진 것을 버려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재물도 가족도 자기 자신도 미워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따를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느낀 것은 무엇보다도 재물을 버리는 것이 가장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내 육신의 욕망들을 이겨내는 것이고, 또 더 어려둔 것은 내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를 따르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비우셨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립비 2,5-7)

그런데 돈이든 애정이든 육체적인 욕망이든 자존심이든 무엇이든 버리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넘어서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것들은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진 것을 다 벗어던지고 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버리는 것이 완전함이고 완전한 행복임을 믿어야만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믿어야만 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산 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몸에 병이 들어 눕게 되자 불만에 가득 차 신하들을 괴롭혔습니다. 왕은 용하다는 의사를 다 부르고 좋은 약을 다 써보았으나 효험이 없었습니다.

왕은 나라에서 가장 지혜로운 현자에게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현자는 말했습니다.
“임금님의 병은 아무 걱정이 없고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얻어다 입으면 나을 것입니다.”

왕자와 신하들은 방방곡곡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한 사람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행복하다고 소문 난 사람도 한 가지씩의 불행은 꼭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망한 왕자가 어느 시골 오두막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오두막 안에서는 즐거운 웃음과 노랫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왕자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그 집의 주인인 농부에게 왜 즐거우냐고 물었습니다.

“온 가족이 건강하고, 부지런히 일해서 배부르게 먹고 지내니 무슨 걱정이 있나요?”
왕자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당신의 소원을 다 들어줄 테니 입고 있는 속옷을 벗어 주시오.”
그러나 농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 이대로 행복하여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속옷은 입지 않고 삽니다.”

행복한 사람은 꼭 속옷을 입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 그것을 버립시다. 예수님은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버릴수록 더 완벽해지고 더 행복해집니다.


오늘의 묵상

판관 시대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주 우상을 섬겼습니다. 주님의 계명에 순종한 조상들의 모범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약속에 대한 배반이므로 다른 신을 섬기는 불륜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더욱 심화되어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콜로 3,5) 하고 명시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불륜과 욕정, 나쁜 욕망과 탐욕을 섬기지 말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이 많아 하늘 나라의 보물 곧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우리는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못한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보고 ‘재물과 탐욕’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재물 자체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자칫하면 자신의 선행과 재산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장사꾼이 될 수 있습니다.
유다 라삐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율법을 외면적인 삶에서 잘 지킬 수 있지만, 내면의 탐욕을 완전히 없앨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율법을 잘 지키며 윤리적으로 결함이 없는 삶’이 완전한 삶이 아님을 부자 청년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포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완덕의 길에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성 비오 10세 교황처럼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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