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승천 대축일] 마니피캇 (루카 1,39-56)

요한은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나 민족들을 다스릴 아들을 낳는 것을 본다. (묵시록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5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10 그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라고 한다. (1코린 15,20-27ㄱ)
형제 여러분, 20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24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25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27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마리아가 찾아오자 엘리사벳은,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시다고 외치고,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한다며 화답한다. (루카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성모 승천 대축일 제1독서(묵시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궤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 두개의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11,19; 12,1~5)
요한 묵시록 11장 19절에는 하느님의 계약궤가 보인 후, 최후 대재앙의 징조들 곧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었다고 계시한다. 여기에 언급된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과 지진과 큰 우박은 모두 종말론적인 심판과 하느님의 현현의 맥락에서 나오는 전용 술어이다.
묵시록에서 이와 관련하여 언어적 병행을 이루는 최초의 언급은 4장 5절인데, 이것은 종말론적 심판의 진원지가 하늘 어좌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심판의 강도가 어떠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하늘 어좌에서 시작된 종말론적 심판은 묵시록이 진행될수록 그 강도가 더할 나위없이 점증한다.
묵시록 8장 5절, 11장 19절, 16장 18절이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데, 그 중에서 11장 19절은 모든 계약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느님께서 일련의 말세의 대재앙을 통해 당신의 계약을 이루실 것을 시각적 이미자와 청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매우 생생하게 잘 드러낸다.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 두개의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12,1)
사도 요한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환시 가운데서 본 것은 한 여인이었다. 여기서 '여인'으로 번역된 '귀네'(gyne)는 앞서 언급된 '표징'(세메이온; semeion)과 동격을 이룬다. 따라서 요한이 본 큰 표징 가운데 첫 번째의 것은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사도 요한의 환시에 등장한 여인은 태양을 입고 있었다. 본문에서 '입고'로 번역된 '페리베불레메네'(peribeblemene)는 '착용하다', '옷을 입다'라는 뜻을 지닌 '페리발로'(periballo)의 완료 동사이다.
이것은 '호 헬리오스'(ho hellios; the sun; 태양)의 목적격으로서 '태양을'으로 번역된 '톤 헬리온'(ton hellion)과 함께 쓰여 태양을 옷삼아 입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묘사는 즉시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지극히 위대하십니다. 고귀와 영화를 입으시고 빛을 겉옷처럼 두르셨습니다.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시고' (시편104,1~2) 라는 시인의 노래를 연상시킨다.
또한 '새벽빛처럼 솟아오르고, 달처럼 아름다우며, 해처럼 빛나고, 기를 둔 군대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 (아가6,10)을 연상시킨다.
하느님께서 옷을 입은 것과 같이 빛을 입으신 것처럼,이 여 인은 옷을 입은 것과 같이 태양을 입고 있었다. 이것은 이 여인이 하느님의 속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태양을 입고 있는 이 여인은 명백히 묵시록 17장 4절에 언급된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는 여자' 곧 대탕녀 바빌론과 대조된다.
다음으로 이 여인의 발밑에 달이 있었다. 본절에서 '발끝에'에 해당하는 '휘포카토 톤 포돈 아우테스'(hypokato ton podon autes)에서 '밑에' 혹은 '아래'로 번역된 '휘포카토'는 본래 공간적으로 '아래'란 뜻이다.
여기서는 '발'을 뜻하는 '호 푸스'(ho pus)의 속격 '톤 포돈'(ton podon)과 함께 쓰여 지배와 군림의 비유적 뉘앙스를 드러낸다. 또한 여기서 '달'(he selene; the moon)은 고대 월력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여인이 달을 밟았다는 것은 그녀가 시간에 대한 완전한 통치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그녀는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쓰고 있었다 ('스테파노스 아스테르논 도데카'; 'stephanos asteron dodeka'; a crown of twelve stars on her head).
일반적으로 면류관(화관)은 승리와 왕권의 상징이다(묵시2,10). 또한 숫자 12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묵시21,12)나 어린양의 열두 사도와 관련된다(묵시21,14). 특히 여기서는 간택받은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별'은 약속의 자손을 나타낸다(창세15,5). 따라서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은 승리한 하느님 백성의 충만한 수효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 역시 묵시록 12장 3절에 묘사된 붉은 용의 머리에 있는 일곱개의 작은 관과 날카롭게 대조된다.
요약하면, 본절에 묘사된 한 여인은 하느님의 속성을 지니며 시간의 흐름 즉 역사에 대한 통치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고, 심지어 열두 지파나 열두 사도가 상징하고 있는 모든 간택받은 하느님의 백성과 관련된다.
이 여인은 우선 문맥상 하느님의 백성, 곧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묵시1,17). 이 여인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위해 예비된 그의 '신부'('헤 귀네'; 'he gyne'; 신부)이다 (묵시19,7).
본문에 언급된 태양과 달과 별은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영적 신부이신 하느님의 교회, 즉 하느님의 계약의 백성이 지니는 영광스러움의 빛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2)
찬란한 영광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를 상징하는 여인, 곧 어린양의 신부(아내)는 아기를 배어 해산하게 되자 아파서 괴로움으로 울부짖는다.
사도 요한은 본절에 언급되는 동사의 시제를 모두 현재형으로 쓰면서 마치 해산하고 있는 여인 곁에서 해산의 전과정을 목도하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즉 아기를 배어 고통중에 해산하는 여인의 모습을 시각적이면서도 청각적으로 매우 생생하고 실감나게 드러낸다.
본문에서 '아기'로 번역된 '가스트리'(gastri)는 문자적으로 '복부', '자궁'을 뜻하는 '가스테르'(gaster)의 여격으로서,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 '엔'(en)과 '소유하다' 라는 뜻을 지닌 원형 '에코'(echo)의 현재분사 '에쿠사'(echusa)와 함께 여인이 자궁 속에 아이를 수태하고 있는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렇다면 본문에 언급된 아이는 누구인가? 묵시록 12장 5절에 의하면, 그 사내아이는 장차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이다(묵시12,17). 그러므로 이 아이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3)
사도 요한은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묵시록 12장 1절에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라는표현을 상기시킨다.
즉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묵시록 12장 1절에 언급된 동일한 표현을 구사함으로써 묵시록 12장 3절 이하의 내용과 묵시록 12장 1~2절에 언급된 내용을 구조적으로 병행시킨다.
즉 그는 여인이 해산하는 장면과 크고 붉은 용의 등장을 이중 노출(double exposure) 기법을 사용하여 뚜렷하게 대조한다. 이것은 앞으로 여인이 낳을 아이와 붉은 용 그리고 여인과 붉은 용과 관련하여 그 어떤 사건이 발생할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큰' 에 해당하는 '메가스'(megas)는 '커다란', '위대한'이란 뜻으로 용의 대단한 위엄과 용모를 짐작케 한다. 또한 '붉은'으로 번역된 '퓌르로스'(pyrros)는 대체적으로 '살인', '학살', '살기' 등 호전성을 자극하는 색깔이란 점에서 본문에 언급된 용의 호전성과 공격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요한8,44).
구약 성경에서는 용에 대한 암시가 대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곧 이스라엘의 적대자와 결부되어 나타난다. 시편 74장 13~15절, 이사야 27장 1절, 이사야 51장 9절, 에제키엘 29장 3절, 욥기 40장 18절, 욥기 40장 15절에 언급된다. 구약 성경에서 용과 관계된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하느님의 적대자로 간주된다.
사도 요한은 이방 신화나 이교 문헌들이 아니라 바로 구약 성경의 이러한 용의 이미지를 빌어와서 '사탄'(묵시12,9)을 상징화한 것이다(묵시20,2).
이 용은 본절에서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는데, 사탄의 외양이 이처럼 자세히 묘사된다.
'머리'(kephallas; 케팔라스)는 주로 지식과 지능, 나아가 권세를 상징한다. 더군다나 용의 머리의 수효가 '일곱'(hepta; 헵타)인데, 묵시록에서 숫자 '7'은 완전함과 충만함을 상징하므로(묵시1,4; 5,1; 13,1; 17,3), 붉은 용이 일곱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용이 강력한 악의 세력임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또한 용은 열 뿔을 가지고 있는데, '열 뿔'('케라타 데카'; kerata dek)은 틀림없이 다니엘 7장
7절, 8절에서 다니엘이 본 네 번째 짐승 환시와 병행된다.
'뿔'(kerata)이 본래 '권세'나 '힘'을 상징하고, 숫자 10 역시 7과 더불어 완전함과 충만함을 상징한다면, 용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언급된 열 뿔 역시 사탄의 강력한 권세에 대한 상징적 묘사로 이해된다(묵시록 13장 1절과 묵시록17장 12절의 바다에서 나온 짐승도 동일한 표현임).
나아가 사탄을 상징하는 크고 붉은 용은 그가 가진 일곱 머리에 일곱 관(작은 면류관)을 썼다. 그런데 본문에서 '작은 관'으로 번역된 '디아데마타'(diademata)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묵시록 2장 10절에서 순교자적 충성을 요구하면서 약속했던 '생명의 화관'과 대조된다.
'디아데마타'는 '둘러싸다', '둘러감다' 라는 뜻을 지닌 '디아데오'(diadeo)에서 파생한 명사 '디아데마'(diadema)의 복수형이다(묵시13,1참조). 이것은 본래 페르시아 왕들이 그들의 관을 두르는데 사용한 푸른 띠를 가리킨다.
이것은 '작은 왕관을 그 머리에 많이 쓰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묵시19,12)에 대한
거짓 모방이다. 따라서 사탄이 쓴 일곱 작은 관은 '승리의 면류관이 아니라 찬탈한 권위의 면류관' 곧 거짓 면류관이다.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서 있었습니다' (4)
본문에서 '꼬리'(ura; 우라)를 사용하여 자신의 위엄과 용모를 자랑하고 있는 용은 마치 '전갈같은 꼬리에다 침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꼬리에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칠 권한이 있었던'(묵시9,10) 메뚜기(황충)을 연상시킨다.
메뚜기의 꼬리가 사람을 해치는 권한을 지니고 있듯이, 용의 꼬리 역시 하늘의 별의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에 던질 권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꼬리를 부각시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머리가 정정당당함을 상징하는 것과 반대로 정당한 방법이 아닌 부정한 방법, 즉 속임수를 사용하였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 묘사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던지는 용의 행위는 다니엘 8장 10절, 곧 '그것은 하늘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지더니, 그 군대와 별들 가운데에서 일부를 땅에 떨어뜨려 짓밟았다'라는 어구와 관련된 듯이 보인다.
여기서 '삼분의 일'(to triton; 토 트리톤)이 일곱 나팔 재앙 시리즈(묵시8,1~12)에서 언급된 '삼분의 일'이 함축하듯이 '제한'과 '한정'의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면, 이것은 하늘의 별들을 모조리 땅으로 쏟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떨어뜨렸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곱 나팔 재앙이 피조계와 사람에 대해 치명적이듯이, 본문의 용의 행위 역시 그 결과가 치명적이다(묵시9,1참조). 여기서 언급된 하늘의 별 삼분의 일 역시 천사의 자리에서 타락한, 부분적인 마귀 세력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땅으로 던져진 별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본절 하반절에 언급된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라는 문구와 관련된다. 즉 용이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진 것은 여인이 해산할 바로 그 아이를 삼키기 위한 일종의 예비 과정이다.
본문에서 '앞에 지켜 서'로 번역된 '헤스테켄 에노피온'(hesteken enopion)은 '앞에서'(before)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에노피온'과 '자리잡다', '서다', '세우다'라는 뜻을 지닌 '히스테미'(histemi)의 미완료 능동태가 함께 사용된 것이다.
'헤스테켄'은 미완료 능동태로서 이제 막 해산하려는 여인에 대한 용의 도전이 계속되고 있음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낸다. 용이 여인 앞에 이와같이 버티고 서 있는 것(stood before; stood in front of the woman)은 여인이 해산하면 아이를 삼키기 위해서이다.
또한 본문에서 '삼켜 버리려고'로 번역된 '카타파게'(kataphage; devour)는 '먹어치우다'는 뜻을 지닌 '카테스티오'(katesthio)의 부정 과거 가정법이다.
이 표현은 탈출기 1장 16절과 예레미야서 51장 34절을 연상시킨다. 탈출기 1장 16절에 파라오는 '너희는 히브리 여자들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 밑을 보고 아들이거든 죽여 버리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라고 말하며,
예레미야서 51장 34절은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나를 잡아먹고 나를 무너뜨렸다. 그는 나를 빈 그릇으로 만들었다. 그가 용처럼 나를 삼켜 나를 진미로 삼아 자기 배를 채우더니 다시 뱉어 냈다.'라고 하며 네부카드네자르의 이스라엘 침공을 묘사한다.
말하자면, 파라오가 히브리인 남아를 살해하라고 명령한 것과 같이 그리고 네부카드네자르가 이스라엘을 삼킨 것같이, 본문에서 붉은 용으로 상징되는 사탄은 아이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삼키려고 한다.
사탄의 이와같은 시도는 실제로 영아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려는 헤로데의 시도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내내 계속되다가 십자가 처형으로 절정에 달한 바 있다.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5)
묵시록 12장 5, 6절에서는 민족을 다스릴 아이의 출생과 여인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묘사하고 있다.
붉은 용의 위해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아들을 낳았다. 본문에서 여인이 아이를 해산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 Incarnatio)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또한 본절의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라는 것은 '너는 그들을 쇠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는 시편 2장 9절의 노래와 같다.
동일한 표현이 티아티라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약속인 묵시록 2장 27절에서도 언급되고,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심판을 수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강력한 면모는 묵시록 19장 15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한편, 본문에서 '들어 올려졌습니다'로 번역된 '헤르파스테'(herpasthe)는 '이끌려 가다', '끌어 올리다'라는 뜻을 지닌 '하르파죠'(harpazo)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그런데 본문은 누가 그 아이를 하느님 대전과 그분의 어좌로 올려 갔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느님께와 그분의 어좌로' 승천하신 사건을 가리킨다면, 성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주도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본절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이 누락된 채 강생과 그의 승천 사실만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용이 여인을 경계한 것이 아무 소용없었다'라는 사실, 곧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패배시키기는 커녕,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어좌 앞으로 유유히 올라 가심으로써 사탄에 대한 승리를 확증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태양을 입은 여인은 하느님의 속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달을 밟고 있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 즉 역사(歷史)에 대한 완전한 통치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또한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쓰고 있다는 것은 12지파와 12사도를 상징하는 간택받은 교회, 승리한 하느님 백성의 충만한 수효를 의미하며, 이것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정배인 성교회를 상징한다.
그러나 동시에 가톨릭 교회는 이것을 성부의 딸이시요, 구세주의 모친이시며 성령의 정배(짝)이신 성모 마리아에게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 안된다.
그렇다면, 이 시대 교회의 시간 안에서 교회의 영혼이신 성령님과 함께 성령님의 정배(짝)이신 성모 마리아에게 천주 성삼께서 구세사 안에서 부여하신 크나큰 특전과 영광과 권세를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달을 밟고 있는 성모님, 사탄과 적대 관계이신 성모님의 시간표는 세상 종말과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과 맞물려 있고,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성모 승천 대축일 복음 (루카1,39-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1~53)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53절까지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속성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루카 복음 1장 51절의 '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29,14).
이 단어가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strength; mighty deeds)와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는 '~위에','~을 넘어서', '~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나타나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루카 복음 1장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미치지만, 반면에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루카 복음 1장 51절은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1장 52절은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라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으로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통치자들'과 '비천한 이들','끌어내리시고'와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단어들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루카 복음 1장 52절은 이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mighty; rulers)는 '주권자','통치자' 등을 의미하는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통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왕좌'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ier thrones)은 그 통치자들이 앉는 '권좌들', '보좌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을 얼마든지 그 권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는 '낮은 지위의', '천한', '겸손한'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이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카 복음 1장 53절에서도 52절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 '좋은 것'과 '빈손', '배불리시고'와 '내치셨습니다'라는 단어들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은 복수형으로 일차적으로 경제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보면 부자들은 그들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등과 같은 산상설교의 표현처럼, 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자들과 교만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아가톤'(agathon)는 '선한', '적합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로서,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로 번역된 '에네플레센'(eneplesen; He has filled)은 '채우다', '만족하다'는 의미를 가진 '엠피플레미'(empiplemi)가 원형인데, 이 단어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로서 부족함이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빈손으로'라고 번역된 '케누스'(kenus; empty away)는 '빈', '헛된', '내용이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좋은 것으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케누스'(kenus)는 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엄중함을 부각시켜 주며,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심판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교만한 자라면 얼마든지 '텅 빈' 가난뱅이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와 대조를 이루는 '내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엑사페르테일' (eksapesteilen; he has sent)은 '밖으로'란 뜻의 '에크'(ek)와 '내보내다'란 의미를 가진 '아포스텔로'(apostello) 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는 자들을 빈 손으로 멀리 내보내시어 가까이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성모 승천>
‘성모 승천’에 관해서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실 때 아무 흠 없이 동정성을 간직하신 그분께서
사후 당신의 육신을 아무 부패 없이 간직하셔야 마땅했다.
태중에 창조주를 모셨던 그분은 하느님의 집에 거처하셔야 마땅했다.
성부의 정배가 되신 성모님께서는 하늘의 신방에 거처하셔야 마땅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 아드님을 바라보시며
아드님을 낳으실 때 피하신 그 고통의 칼로 당신의 심장이 찔리우신 그분은
아드님께서 영광 중에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것을 바라보셔야 마땅했다.
천주의 모친께서 아드님이 지니신 특권들을 누리시고
천주의 모친과 여종으로서 모든 피조물로부터 공경을 받으셔야 마땅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제르마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기록한 대로 당신은 ‘아름답게 나타나시고’ 동정인 당신의 육신은
온전히 거룩하시며 온전히 정결하시고 온전히 하느님의 거처가 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육신은 무덤의 부패를 모르고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시면서
불사불멸의 빛 속에서 변모되어 새롭고도 영광스러운 생명을 얻어
온전한 해방과 온전한 생명을 마땅히 누리셔야 했습니다.”
(출처 - 교황 비오 12세의 교황령 ‘지극히 인자하신 하느님’)
창세기에 있는 아담의 족보를 보면 ‘에녹’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 되었을 때, 므투셀라를 낳았다. 므투셀라를 낳은 다음,
에녹은 삼백 년을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아들딸들을 낳았다.
에녹은 모두 삼백육십오 년을 살았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창세 5,21-24).”
여기서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라는 말과 “삼백육십오 년을 살았다.” 라는 말은,
에녹이라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한 신앙인이었음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라는 말은,
에녹이 승천했다는 뜻이라고 해석됩니다.
우리는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족보 외에는 에녹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떻든 에녹은 최초로 승천한 인물입니다.
집회서 저자는 ‘에녹’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 위에 창조된 자로서 에녹과 비슷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지상에서 들어 올려졌다(집회 49,14).”
열왕기 하권에는 엘리야 예언자의 승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2열왕 2,11).”
집회서 저자는 ‘엘리야’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집회 48,9.11).”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고,
항상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고(루카 1,28),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고,
모든 면에서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으로서,
에녹과 엘리야보다 더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성모님께서 승천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신앙인들이 성모님의 승천을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 11,5-6).”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성인들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4-55)”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1테살 4,16-18).”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려면 성모님처럼 지금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3-4).”
여기서 “너희는 그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에는,
“너희는 그 길을 알아야 한다.” 라는 뜻도 들어 있고,
“너희는 그 길만 걸어야 한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고, 오직 그 길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이 말씀은,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원래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고 힘든 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속 사람들의 눈에는 재미없고 힘들고 어렵게만 보이는 길이겠지만,
예수님과 성모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들에게는 기쁨과 평화와 행복의 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