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월요일] 겨자씨의 비유 (마태 13,31-35)
증언판을 들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것을 보고 돌판들을 깨 버리고는, 주님께 돌아가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뢴다. (탈출 32,15-24.30-34)
그 무렵 15 모세는 두 증언판을 손에 들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왔다. 그 판들은 양면에, 곧 앞뒤로 글이 쓰여 있었다. 16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며, 그 글씨는 하느님께서 손수 그 판에 새기신 것이었다.
17 여호수아가 백성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진영에서 전투 소리가 들립니다.” 하고 모세에게 말하였다. 18 그러자 모세가 말하였다. “승리의 노랫소리도 아니고, 패전의 노랫소리도 아니다. 내가 듣기에는 그냥 노랫소리일 뿐이다.”
19 모세는 진영에 가까이 와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과 수송아지를 보자 화가 나서, 손에 들었던 돌판들을 산 밑에 내던져 깨 버렸다. 20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그들에게 이렇게 큰 죄악을 끌어들였습니까?” 22 아론이 대답하였다. “나리, 화내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악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23 그들이 나에게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저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빼서 내시오.’ 하였더니, 그들이 그것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불에 던졌더니 이 수송아지가 나온 것입니다.”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큰 죄를 지었다. 행여 너희의 죄를 갚을 수 있는지, 이제 내가 주님께 올라가 보겠다.”
31 모세가 주님께 돌아가서 아뢰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
3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 34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일러 준 곳으로 백성을 이끌어라. 보아라, 내 천사가 네 앞에 서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내 징벌의 날에 나는 그들의 죄를 징벌하겠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며 모든 것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마태 13,31-35)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31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제1독서 (탈출32,15~24. 30~34)
"모세는 진영에 가까이 와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과 수송아지를 보자 화가 나서, 손에 들었던 돌 판들을 산 밑에 내던져 깨 버렸다.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19~20)
'춤추는 모습'에 해당하는 '우메홀로트'(umeholoth)는 직역하면 '그리고 춤들'이다. 여기서 '춤'이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은 춤추는 사람들이 많았고, 다양한 형태의 춤들이 보여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고대 근동 지방의 우상들은 대부분 풍요다산을 기원하여 숭배되던 것이었으며, 그 제의에 있어서 성적인 요소가 들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수송아지 우상 앞에서 추었던 춤도 이러한 제의적 춤으로써 음란하고 광란적인 집단 군무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화가 나서'에 해당하는 '와이하르 아프'(waihar aph)에서 '와이하르' (waihar)의 원형 '하라'(hara)는 '불타다', '뜨거워지다', '성내다' 등의 뜻이 있고, '아프'(aph)는 '코', '콧김' 등의 뜻이 있다.
여기서는 '와우'(wau; and) 계속법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춤추는 것을 보자마자 '콧김이 뜨거워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분노가 극에 달해 거친 숨을 내쉬고 있음을 매우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또한 '내던져 깨 버렸다'에 해당하는 '와야쉴레크~와이샵베르'(wayashilek~ wayishaber)는 직역하면 '그러자 그는 던졌다 ~ 그리고 그것을 깨뜨렸다'이다.
즉 모두 '와우'(wau; and) 계속법으로 시작하여 모세가 크게 화를 낸 후, 바로 이어서 돌판을 던졌고, 바로 이어서 돌판이 깨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절 전체는 '와우'(wau; and) 계속법이 5번이나 나와 모든 행동이 순식간에 이루어졌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시나이 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를 본 모세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손에 들고 있던 십계명 돌판을 내던져 다시 회복할 수 없게 산산 조각낸 것은 모세가 인간적인 감정을 자제하지 못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이집트에서부터 시나이 산에 이르기까지 온갖 위험과 고난의 상황에서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신 하느님의 자애와 은총을 생각할 때, 모세는 거룩한 분노(의노)를 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세의 행동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막기 위한 뜻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모세가 들고 있었던 돌판에는 우상 숭배를 단죄하는 항목이 있었다. 즉 우상을 만들어 섬기면 하느님께서 조상들로부터 그 죄악을 삼대 사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는 제1계명이 그것이다(탈출20,4~6).
따라서 이 계명대로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에 큰 화를 당하기 때문에 모세는 이 계명이 기록한 돌판을 깨뜨린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분노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모세의 돌판 파쇄 사건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후에 다시 새로운 돌판을 주셨다(탈출34,4).
한편,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수송아지 우상을 불에 태워 만든 가루를 섞은 물을 마시게 한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가 저주와 고난와 멸망을 가져다 주는 것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하며, 우상 숭배의 허망함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다 (민수5,24; 예레8,14; 시편80,6참조).
연중제17주간 월요일 복음 ( 마태13,31-35)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1~33)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13장에서 천국에 관한 비유 가운데 세번째 비유인 겨자씨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겨자씨 비유의 주제는 천국('하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he basileia ton uranon; The kingdom of heaven)이 처음에는 미약하게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놀랍게도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 비유의 핵심 단어인 '겨자씨'로 번역된 '시나페오스'(sinapeos; a mustard seed)의 원형 '시나피'(sinapi)는 '겨자씨'뿐 아니라 '겨자' 자체도 의미한다.
이 겨자의 씨앗은 비록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작지만, 그것이 땅에 심겨져 완전히 다 자라면 3m가 더 될 만큼 커지게 된다.따라서 겨자는 그 씨앗의 원래 크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하는 식물의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겨자씨를 소재로 하여 천국을 설명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씨앗이 싹이 나서 자란 후에는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도 비록 작고 미미한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완성된 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릴 만큼 외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한편, '뿌리다'는 의미로 번역된 '에스페이렌'(espeiren; and sowed)의 원형 '스페이로'(speiro)는 마태오 복음 13장 3절에서 '씨를 뿌리다'는 의미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한 동사로서, 큼직한 씨앗이나 묘목을 손으로 하나하나 심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은 씨앗들을 흩뿌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새들'에 해당하는 '타 페테이나'(ta peteina; the birds)는 13장 3절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가 버리는 '악한 자'(19절)를 상징했지만, 여기서는 인생이라는 고통스럽고 기나긴 여행에서 지친 심신을 쉬러 몰려드는 보편적인 인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깃들이다'는 의미로 번역된 '카타스케눈'(kataskenun; lodge; perch)의 원형 '카타스케노오'(kataskenoo)는 원래 '자신의 천막을 치다', '자신의 거처를 정하다'는 의미이며(사도2,26), 구약 희랍어 번역본인 칠십인역 (LXX)에서는 주로 '천막에 거주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샤칸'(shakan)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창세9,27; 민수14,30; 35,34).
광야 생활에서 유목민들이 그들의 천막에서 거처하며 쉬는 것처럼, 공중을 날아다니다 피곤에 지친 새들은 상당히 성장하여 그늘까지 제공하는 겨자나무(마르코 4,32)의 가지 틈새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고 쉼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뇌와 슬픔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지친 영혼들도 안식처를 찾아 헤매다가 천국의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될 때,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자신의 참된 안식처를 얻게 되는 것이다(마태11,28.29).
이제 천국의 외적 성장에 초점을 맞춘 겨자씨 비유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천국의 내적 성장을 보여 주는 누룩의 비유를 설명하신다. 이것은 천국이 처음에는 미미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것이지만, 나중에는 한 개인의 인생은 물론 사회를 변혁시키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말'로 번역된 '사타'(sata; measures)의 원형 '사톤'(saton)은 곡물의 중량을 재는 도량형으로서, 히브리어 '스아'(sah)의 역어이며 (창세18,6), 7.33리터 정도의 양이다. 따라서 '서 말'이면 '세 스아', 약 22리터(12되) 정도 되는 밀가루이다. 밀가루 세 스아에 누룩을 섞어 그것을 반죽한 후,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원래 크기의 몇 배로 부풀어 오르게 된다.
여기서 '누룩'으로 번역된 '쥐메'(zyme)는 '열로 끓다', '끓어 오르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제오'(ze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밀가루 반죽 속에서 끓어올라 그것을 부풀게 하는 '효모'(leaven), '누룩'을 의미한다.
신,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누룩은 과월절과 같은 절기 때에 빵반죽에 넣어서는 안되는 재료였으며(탈출13,7),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의 교훈(마태16,6), 전염성이 강한 부도덕한 행위인 불륜(1코린5,6) 등에 비유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누룩'은 부정적인 의미가 전혀 담겨져 있지 않고, 다만 그 발효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밀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간 누룩은 지극히 적은 양이지만 그로인해 밀가루 반죽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천국의 시작 역시 지극히 작고 미미한 것이지만 그 천국을 확장시키는 복음의 능력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통치의 영역과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진다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이 담긴 돌판을 받아들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수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난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 버립니다. 그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렇지만 모세는 다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 이런 모세의 기도를 어찌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우리도 늘 기도를 하고 있지만, 나를 위한 기도보다 다른 이들, 특히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더 중요함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그 작은 겨자씨가 크게 자라나 새들마저 깃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이 우리의 조그만 선행과 사랑이 이웃에게 퍼지고, 더욱 확산하여 큰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나갈 것입니다. 따라서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일부터, 사랑을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 각자는 조그만 변화, 겨자씨와도 같은 ‘나의 작은 변화’를 발견해 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늘 잘못과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도 조금씩 변화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늘 되풀이하는 실수와 잘못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1-32).”
바오로 사도는 어떤 병에 걸려서 일생 동안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그 병을 고쳐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했는데(2코린 12,8),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약한 것을 통해서 강한 힘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오로 사도는 겨자씨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그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는데(1코린 2,3),
그의 업적을 보면 대단히 위대한 사도이고 선교사입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란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이 겨자씨 같은 분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기력하게 사형당한 죄수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공동체는 시골 사람들의 작은 집단으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입니다.
또 사도들은 성령으로 가득 찬 위대한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체포될 때,
베드로 사도는 칼을 뽑아서 저항하려고 했습니다(마태 26,51; 요한 18,10).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 군대를 동원한다면 인간 세상을 단번에 제압할 것입니다.
그러면 온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 떨면서 모두 굴복할 것이고,
당연히 십자가도, 종교박해도, 수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께서 작은 씨를 심어서 큰 나무로 키우는 이유이고,
약한 것을 통해서 강한 힘을 드러내는 이유입니다.
(커다란 씨를 심어서 큰 나무로 키울 수도 있지만,
또 강한 것을 통해서 강한 힘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
오늘날의 교회 모습을 보면, 하느님의 방식은 외면하고,
세속의 방식으로만 일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대형화, 세속화, 업적 중심주의 등...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란다고 해도,
그 나무가 다시 만들어내는 씨는 커다란 씨가 아니라 아주 작은 씨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외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해도
하느님의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는 원칙을 버리면 안 됩니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교회는, 또 신앙인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누룩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선교활동은) 이 세상을 하늘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한 활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에서 해야 하는 일은 하나뿐입니다.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고 양들이 이리 떼로 변한다면,
즉 교회와 신앙인들이 세속화되어서 세속과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된다면,
그것은 ‘제 맛을 잃은 소금’처럼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이 세속화되는 것을 피하면서,
세상을 복음화시키기 위한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적대시하고, 세상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구원받을 수 있도록
세상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베드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1-12).”
신앙인은 세상 가운데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이고,
자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서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1-2).”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 자신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세에 동화되는 것은, 즉 세속화되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타락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복음 정신대로 살고 있어야 하고,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서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