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5일
[성 대 야고보 사도 축일]첫째가 되려면 (마태 20,20-28)
야고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이다. 어부인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세 제자 가운데 하나이다. 열두 사도에는 야고보가 둘 있는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작은[소] 야고보’와 구분하여 ‘큰[대] 야고보’라고도 부른다. 42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데,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2코린 4,7-15)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스승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마태 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A.D.44년에 12사도 중에 처음으로 순교(참수치명)당하는
(장長; 대大)야고보 사도(사도행전12,1~2)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1독서(2코린4,7~15)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룻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7)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8~9)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0)
앞선 코린토 후서 4장 1-6절에서 예수님만을 진실하게 증거한 사도로서의 기본 직분 수행 자세에 대해 피력한 바오로는, 이제 코린토 후서 4장 7절이하 15절에서 약함 속에서 고난을 무릅쓰고 사도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는 사목 자세에 대해 설명한다.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이 보물(보배)' 이란 무엇을 지칭할까? 어떤 이는 코린토 후서 4장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직분' 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문맥상 바로 앞에 나오는 코린토 후서 4장 6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 값진 보물이 값싼 질그릇 속에 담겨 있는 것으로 묘사하며 양자 사이에 극명한 대조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 질그릇 비유는 로마서 9장 20-23절에서 바오로가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과 피조물의 연약함을 효과적으로 대조하기 위해 사용한 적이 있는데, 이사야 29,16; 30,14; 45,9; 64,7; 예레18,6 ; 19,1-11; 애가 4,2; 욥기10,9 등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각각의 비유는 문제의 차이에 따라 그 의미나 강조점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질그릇 비유의 상징어는 그 그릇의 가치가 형편없다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다.
Manson은 바오로가 언급한 질그릇을 두고 '코린토의 잡화점들에서 구매할 수 있는 값싸고 부서지기 쉬운 도기 등잔' 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부서지기 쉬운 도기 등잔과 같다.
왜냐하면,그들은 그들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빛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된 빛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해 이 구절의 의미를 확실하게 밝혀준다.
즉 바오로는 질그릇이란 표현을 통해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성과 연약성을 설득력있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Hughes는 이 비유를 로마 군대의 승전 행진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코린토 후서 2장 14절이나 코린토 전서 4장 9절과 같이, 로마 군대의 승전 행진의 장대한 광경과 관련된 비유를 사용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무리한 견해는 아니다. 그에 따르면, 로마 군대의 승전 행진에 있어서 금과 은을 질그릇에 넣어 운반하는 것은 당시 관례였다.
B.C.167년 마케도니아 전투에서 Aemilius Paulus가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에서 은화를 담는 750개의 질그릇을 운반한 일이 있었다 (Plutarch). 이러한 사실로, 자신이 소유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이 자신의 연약한 육체에 담겨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자각한 바오로에 의해, 얼마든지 차용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견해를 취하든 그러한 사실은, 바오로의 복음 선교 활동이 연약한 자신의 인간적인 본성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지식의 빛을 받아 그것을 전하면서 자기 자신을 내세울 자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높이 드러내실 분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과 비천함을 깊이 아는 자일수록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게 된다.
코린토 전서 15장 31절에서 바오로는 '나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라고 언급하며 시편 44장 23절의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라는 예언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체험적으로 고백한 적이 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요한 복음 15장 20절에서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라고 말씀하셔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고통에 필연적으로 동참하게 될 것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죽음을' 에 해당하는 '네크로신'(nekrosin)은 단순히 '죽음'(dying or death) 그 자체만을 가리키는데, 본 단락에서는 고난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뿐 아니라 그때 수반된 죽음의 고통까지 말한다.
또한 '짊어지고 다닙니다'에 해당하는 '페리페론테스'(peripherontes)는 '지니고 돌아다니다' 라는 의미를 지닌 '페리페로'(periphero)의 현재 분사 능동태이다. 이것은 '항상'으로 번역된 '판토테'(pantote; always)란 표현과 더불어 바오로가 어디를 가든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항상 죽음의 고통을 지니고 다녔음을 말한다.
바오로는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갈라6,17)하고 말한 것처럼 그의 경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가 당했던 죽음의 고통에 날마다 동참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위대성은 이처럼 예수님의 삶을 철저하게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실천한 데 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목적의 의미를 나타내는 '히나(hina)가정법' 구문인 본문은 상반절에 나타난 바오로 사도의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즉 바오로가 날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 죽음의 고통에 몸소 동참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을 그 몸에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예수님' 으로 번역된 '투 이에수'(tu Iesu)는 소유격으로서 바오로 자신의 생명이 바로 예수님께서 구원해 준 생명이며 그 예수님께 속한 생명임을 강조한다. 즉 '생명도'로 번역된 '헤 죠에'(he zoe)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본질적으로 새로운 생명 곧 부활의 씨앗이 되었음을 함축한다.
또한 '드러나게'로 번역된 '파네로테'(phanerothe)는 '분명히 나타내다' 라는 의미를 지닌 '파네로오'(phaneroo)의 수동태이다. 여기서의 수동태는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필리3,10).
예수님께서 질그릇같이 연약한 자신의 몸에 십자가의 고통을 담아냈듯이 그와 일치한 그리스도인들 역시 현세에서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 고통의 길은 바오로가 진술했듯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죽음의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그 고통에의 동참은 결코 무익하지 않다. 이것이 무익한 인내가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 부활의 첫 열매를 쫓아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것이며 그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부활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린토 2서 4장 8절과 9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8개의 분사를 사용한 표현을 통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약의 복음을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원문에는 8개의 분사가 모두 현재형으로 기록되어 현실감을 잘 드러낸다.
여기서 '환난을 겪어도'로 번역된 '틀리보메노이'(thllibomenoi; we are troubled; we are hard pressed)는 원래 '포도즙을 짜기 위해 누르다'라는 뜻을 지닌 '틀리보'(thllibo)의 현재 분사 수동형이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피를 말리는 고통을 당하며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 압박당한 사실을 드러낸다.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 모두 7회 사용된 이 동사는 모두 수동태로 쓰였으며, '환난을 당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고(2코린1,6; 7,5; 1테살3,4; 2테살1,6.7; 1티모5,10), 또한 명사형 '틀립시스'(thllipsis)도 '환난'이란 뜻으로 쓰였다(마태24,9; 로마5,3).
그리고 '난관에 부딪혀도'로 번역된 '아포루메노이'(aporumenoi; we are perplexed)는 본래 '어리둥절해지다', '혼란해지다', '불확실하여 당황해지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레오'(aporeo)의 현재 분사형으로서, 일체의 수단이나 빠져나갈 능력이 없는 곤경에 처한 사도 바오로의 처지를 잘 드러낸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마치 살벌한 군인들에 의해 단단히 포위당해 있는 것과 같은 신세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환난관 난관 속에서도 그는 결코 억눌리지 아니하고 절망하지 아니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법'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엄청난 힘'(2코린4,7), 즉 질그릇 속의 보물이 그를 모든 환난과 난관 가운데서 보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아무리 당혹스런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결코 사도 바오로를 좌절시킬만큼 당혹스럽지 않으며, 제아무리 시련을 당한다 하더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육체의 한계에 도달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도 동일하게 한계에 직면하시지는 않는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자유의 영으로 인간적인 연약함과 제한됨을 초월하여 역사(役事)하신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겪는 것과 같은 이러한 환난과 난관들은 의미없는 고난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2서 4장 9절에서 사도로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계속해서 진술한다.
여기서 '박해를 받아도'로 번역된 '디오코메노이'(diokomenoi; persecuted)는 본래 '사냥하다'라는 뜻을 지닌 '디오코'(dioko)의 현재 분사 수동태이다. 이것은 마치 사냥감을 추적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듯한 사도 바오로의 적대자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사도 바오로 자신이 이러한 사냥감으로 쫓김당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결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히브리서 13장 5절의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이 사도 바오로의 매일의 박해의 경험 속에서도 분명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맞아 쓰러져도'로 번역된 '카타발로메노이'(kataballomenoi; cast down; struck down)는 갑자기 습격을 당한 상태를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경험은 사도행전 14장 19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과 결부된다. 거기서 사도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으로부터 리스트라까지 그를 추격해 온 유다인들에 의해 갑작스러운 습격을 당해 돌로 맞아 생명이 끊어진 줄로 안 지경에까지 처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위협도 그를 멸망시키지 못했다.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들'에게 궁극적인 영원한 멸망은 존재하지 않기에, 현세적 물리적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7월 25일 토요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복음(마태20,20~28)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기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26~28)
'너희 가운데에서'에 해당하는 '엔 휘민'(en hymin; among you)이란 표현은 제자들을 다른 대상과 구분짓는 말로서, 이미 제자들은 이 세상 나라와는 구별되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천국의 본질과 관련해서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치신다.
여기서 '섬기는 사람'으로 번역된 '디아코노스'(diakonos; minister; servant)는 '심부름을 가다'라는 뜻이 있는 '디아코'(diako)에서 유래하여 '일꾼', '하인'(요한2,5.9), '하인'(마태22,13)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초대 교회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는 자를 가리키는 '봉사자', '집사'(필리1,1; 1티모3,12)라는 호칭이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한편, 마태오 복음 20장 27절에서 '첫째가'에 해당하는 '프로토스'(protos; first; chief)는 장소나 시간에 대해 '~보다 앞에'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프로'(pr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여기서는 지위나 계급 등에 있어서 '제일 높은 자'를 가리킨다.
반면에 '종'에 해당하는 '둘로스'(doulos; servant; slave)는 '묶다'(마태13,30), '묶다', '결박하다'(마태12,29)라는 뜻이 있는 동사 '데오'(deo)에서 유래하여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된 '노예'(slave)를 의미한다.
종은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야 한다.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상대방을 섬기는 자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위의 마태오 복음 20장 28절의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육화(강생)하신 목적만을 밝히시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합당한 자질을 갖도록 촉구하는데 있다.
여기서 '몸값'에 해당하는 '뤼트론'(lytron; a ransom)은 '풀다'(마태16,19), '벗다' (사도7,33) 등으로 번역되는 '뤼오'(lyo)에서 유래하여 '의무나 속박에서 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타인의 속박아래에 있는 노예나 죄수에게 자유를 부여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죄와 죽음의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여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죄와 죽음과 사탄의 속박을 끊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무죄하신 당신 자신의 목숨을 그들을 대신하는 제물로 바쳐야 했다.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의노를 풀어드리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와 위격이 같으신 무죄하신 예수님이 죄지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대속(代贖; Redemption)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대속물로서 죽으신 것은 '많은 이들'을 위해서이다. '많은 이들'로 번역된 '폴론'(pollon; many)의 원형 '폴뤼스'(polys)는 수적으로 많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길다는 뜻과 정도에 있어서 광범위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모든'이라는 뜻이 있는 '파스'(pas)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데에 유념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게 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주님의 양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한다고 일러 주지 않으십니까? 고난의 잔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이란 생각할 수도 없지요.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봉사하는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과는 달리 남을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남을 섬기려면 무엇보다 자신을 낮추어야만 합니다. 아울러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처지가 되어야 하지요. 늘 공동선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다른 이들에게 불편이나 손해를 끼치곤 합니다. 그런데도 정작 자기 자신은 이를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상대방의 처지보다는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우리 신앙인에게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더욱 필요하기만 합니다. 그만큼 성격이나 환경, 취미, 관심사, 신앙의 성숙도 등이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만큼 누군가가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에 뜻밖에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말과 행동에서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절실하기만 합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을 어떻게 배려할 수 있는지 묵상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출세와 섬김>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28).”
여기서 ‘다른 민족들’은 하느님을 안 믿는 세속 사람들을 뜻합니다.
세속의 통치자들과 고관들이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 것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 즉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안 믿는 세속 사람들이나 하는 짓을 따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속을 닮으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세속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하면 안 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또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자리는 사실은 높은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이다.
그러니 어떤 직책을 맡았을 때, 그것을 높은 자리라고 착각하지 마라.
섬기는 직책을 맡은 사람답게 사람들을 섬기도록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첫째가 되려고 하지 말고 종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또는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인 것처럼 보이는 자리라고 해도,
그것은 사실은 종의 자리이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서
사람들을 섬기도록 하여라.” 라는 뜻이 아니라,
‘높은 자리’, 또는 ‘높은 사람’ 자체를 부정하신 말씀입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낮추어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섬긴다면,
누구든지 그 사람을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모릅니다.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또 그가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자기가 자신을 낮추고 사람들을 섬기는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겸손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존경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면,
그의 ‘낮춤’과 ‘섬김’은 거짓 겸손이고, 위선입니다.
겉으로는 표시가 안 나도, 속으로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노골적으로 잘난 체 하는 사람보다는
그렇게라도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낫지 않은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람의 속을 보신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가 높은 자리라는 생각 자체를 하면 안 되고,
“나는 높은 사람이다.” 라는 생각 자체를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4-17).”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높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해서,
모두가 다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섬기는 사람이 된다면,
공동체 안에는 높은 자리 자체가 없게 될 것입니다.
모든 자리가 다 똑같이 낮은 자리가 된다는 것은,
결국 모든 자리가 다 똑같이 높은 자리가 되는 셈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된다면,
결국 모든 사람이 다 높은 사람이 되는 셈입니다.
(바로 그것이 실현되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앉는 영광을 차지하려면 십자가를 감수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제자들은(신자들은) 예수님의 뒤만 잘 따라가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길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길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제자로서 나를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느냐?”
라고 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는 말씀은,
“너희가 참으로 나를 따르려면,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을 그대로 걸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섬김’에 관한 당신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두 사도를 꾸짖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3).”
여기서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두 사도의 고난과 순교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고 싶다는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 뜻만 충실하게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