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월요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18-26)

야곱은 하란으로 가다가,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층계를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주님께서 축복을 내리시는 꿈을 꾸고는, 여기가 하느님의 집이라며 기념 기둥을 세우고 베텔이라 한다. (창세 28,10-22ㄱ)
그 무렵 10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11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14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5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16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면서, 17 두려움에 싸여 말하였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18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을 가져다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19 그러고는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성읍의 본이름은 루즈였다.
20 그런 다음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21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22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옷자락을 만진 혈루증을 앓는 여자를 고치시고, 회당장의 죽은 딸을 일으키신다. (마태 9,18-26)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제1독서(창세28,10~22ㄱ)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하면서, 두려움에 싸여 말하였다.(16)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17)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을 가져다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18)그러고는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하였다.그러나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즈였다.19)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로 번역된 '아멘 예쉬 예흐와 빰마콤'(amen yesh yehwah bammaqom)에서, '아멘'(amen)은 '진실로', '참으로'라는 의미인데, 주로 두려움이나 감격을 나타낼 때 사용되며, '빰마콤'(bammaqom)은 '이 장소안에,' '이곳에'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진실로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도다'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에는 죄인의 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난 야곱의 두려움과 함께 낯선 여행길에 하느님을 만난 야곱의 넘치는 감격이 표현되어 있다. 야곱은 하느님께서 브에르 세바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들판인 이곳 베텔에도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격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근동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여러 신들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각 신들은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지역 신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 지역을 벗어나면 지금까지 섬기던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지역 신 개념에 익숙해져 있었던 야곱이 하느님께서 어느 곳에나 계심을 비로소 확인하는 감격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야곱은 지금까지 하느님을 알고 있었지만, 조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베텔에서 야곱 자신의 하느님과 일대 일로 접촉하게 되어 야곱 자신의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잠언 8장 17절의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나는 사랑해 주고 나를 찾는 이들을 나는 만나 준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야곱처럼 하느님과 일대 일로 만나 그 하느님을 나의 마음에 모심으로써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게 해야 한다.
한편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로 번역된 '웨아노키 로 야다티'(weanoki
lo yadathi)에서 1인칭 대명사인 '아노키'(anoki; 나는)가 독립적으로 쓰인 것은 야곱이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알지'로 번역한 '야다티'(yadathi)의 원형 '야다'(yada)는 지적으로 아는 것은 물론, 감정적으로 깊이 동조하고 있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까지 가리키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이며, '로'(lo)는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은 야곱이 하느님을 어느 지역에만 국한되어 계시는 지역신으로 알았고, 하느님을 마음속에 모시며 살아 오지 못했으며,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지 못했음을 베텔에서 하느님을 뵙게 되었을 때 깨달을 수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얼마나 두려운'에 해당하는 '마 노라'(ma nora)에서 '마'(ma)는 의문 부사로서 '어떻게', '얼마나 많이', '이 얼마나'란 의미이며, '노라'(nora)의 원형 '야레'(yare)는 '전율하다', '떨다'는 뜻으로 공포심에 사로잡혀 떠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하느님이나 부모, 임금, 성전과 함께 사용될 때는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고 크게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단순 재귀형 수동 분사로 사용되어 야곱이 현재 하느님을 뵌 것에 대하여 스스로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야곱은 죄인된 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보고 만난 것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즉 종교적 경외심에 사로잡혀 크게 떨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집'이라고 번역된 '뻬트 엘로힘'(beth ellohim)에서 '집'에 해당하는 '빠이트'(baith)는 '짓다'(욥기27,8; 코헬렛2,4), '세우다'(룻기4,11; 예레45,4)라는 뜻이 있는 '빠나'(bana)에서 유래하며 일차적으로는 '세워진 집'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단어가 임금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궁전'(2열왕21,18; 1역대14,1), 하느님과 관련될 때는 '성전'(2열왕16,18; 1역대29,3)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야곱이 하느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곳은 당시 성전 건물이 세워져 있던 곳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빈 들판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그 장소를 하느님의 집, 즉 성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야곱이 바로 그 들판에서 하느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처험 하느님의 집, 즉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임재하시고 하느님께서 간택한 백성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아무리 훌륭하게 지은 건물이라도, 그곳에 하느님께서 임재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장소는 한낱 건물에 지나지 않을 뿐, 결코 성전이 될 수 없다(이사1,12).
그리고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신다면, 우리 몸도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음을 코린토 1서 3장 16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밝히고 있다.
한편 야곱이 하느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집', 즉 '뻬트 엘로힘'이라고 부른 곳은 원래 '루즈'(luz; '편도나무'라는 뜻; 이 지방에 편도나무가 있었기 떄문에 붙여진 지명)지방이었다.
그런데 야곱이 이곳에서 하느님을 시중드는 천사들은 물론 하느님의 뵙고 하느님께로부터 계약의 말씀을 들은 이후로 '뻬트 엘로힘'의 축약형인 '뻬트 엘', 즉 '베텔'(bethel)로 불리게 되었다(창세28,19).
'기둥으로 세우고 ~ 기름을 부었다' (18)
히브리인들은 사람이나 물건을 거룩하게 구별할 때 기름을 붓는 관습이 있었다. 여기서 야곱은 자신이 하느님을 만나는 꿈을 꿀때 머리에 베었던 돌을 취해 성별(聖別)하기 위해 기름을 부었다.
야곱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고대인들에게 흔히 행해졌던 우상 숭배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임재를 기념하고 길이길이 기억하기 위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베텔은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과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이며(창세12,8), 직계 조상인 야곱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속해 있는 곳이다.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9,18-26)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0~21)
여기에 '그때에'에 해당하는 '카이 이두'(kai idou; and behold)는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키는 기사 도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의 삽입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수님께 다가와 옷자락의 술을 만진 여자가 앓고 있던 병은 '혈루증'(hemorrhagind)인데, 이것은 지속적으로 하혈을 하는 증세를 보이는 부인병의 일종으로서 레위기 15장 25~27절에 의하면 부정한 병으로 간주된다.
또한 혈루증을 앓고 있는 사람만 부정한 것이 아니고, 그 병을 앓는 사람과 접촉을 한 사람까지 부정하게 되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았으므로, 위의 유다인의 율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그분의 옷자락의 술을 만지려고 한 행위는 거의 목숨을 건 시도였다.
그러나 그 여자가 겪어 온 12년간의 육체적 고통과, 그에 못지 않게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지고,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소외되는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옷자락의 술만이라도 만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마태9,21)은 그 여자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서라도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만든 것이다.
결국 12년간 그 여자가 겪은 고통은 예수님이라는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하고, 그분을 직접 만나게 하는 중요한 매개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인생의 여정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때마다 그 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 나아오며, 그리고 나와서 그분의 옷자락의 술이라도 만지는 믿음을 가지라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신호(sign)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인에게서 어떤 비관론적 인생관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마태오 복음 9장 21절에서 '만약'(if)에 해당하는 '에안'(ean)은 번역하지 않았고, '대기만 하여도'의 '만'으로 번역된 '모논'(monon; only; but)이 나오는데, 이것은 '유일하게', '오직', '다만'이라는 뜻의 부사로서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그 일만을 하여도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 여자의 믿음이 매우 확고하였음을 잘 나타낸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의 술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으로 생각한 것을 미신적인 믿음으로 그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하느님으로 영접하여 구원받는 인격적인 믿음으로 묘사하고 있다(마태9,22).
여기서 그 여자의 혈루증과 예수님의 겉옷은 '인간의 부정함'과 '하느님의 거룩함'의 상징물로 대조되고 있는데, 인간 자신의 부정은 오로지 하느님의 거룩함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9장 2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믿음으로 만진 손'을 가진 그 여자를 찾으셔서 보시며,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구원하였다'에 해당하는 '세소켄'(sesoken; has heald; has made whole)은 영적 구원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구원하다'라는 뜻의 '소조'(sozo)를 원형으로 취한다.
그 여자의 예수님을 향한 인격적인 믿음은 자신을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까지 구원하는 결과를 나은 것이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7월 10일의 복음 말씀은, 마태오복음 9장 18절-26절,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인데,
이 이야기는 단순한 ‘치유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또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몸의 병이나 잘 고치는 예언자, 또는 의사가 아니라,
인간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예수님께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복을 청하는 믿음이 아니라,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마태 9,20-22).”
아마도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고,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도 그 소문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복음 14장과 마르코복음 6장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만 했는데도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태 14,35-36; 마르 6,54-56).”
“... 구원을 받겠지.” 라는 여자의 말에서 ‘구원’은 ‘병의 치유’를 뜻합니다.
그러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구원’은,
영적 구원(영혼의 구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미 이루어진 일을 뒤늦게 확인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여자를 구원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나를 믿어라. 내가 너의 영혼을 구원하겠다.”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몸이 치유된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여라.
그 구원은 내가 주겠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
바로 그때에 여자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그때부터 여자가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기 시작했고,
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몸의 병이 치유되었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주신 ‘구원’은
몸과 영혼을 모두 구하는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마태 9,18-19).”
이 이야기는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마르코복음 5장과 루카복음 8장을 보면,
그 회당장은 죽은 딸을 살려 달라고 청한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딸을 살려 달라고 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마르 5,23; 루카 8,42).”
(마태오는 이 이야기를 기록할 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결과’만 기록하고,
세부 사항은 덜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생략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하혈하는 여자를 만나셨고,
그 여자의 병을 고쳐 주시는 동안 회당장의 딸이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 5,35; 루카 8,49).”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가 죽었을 때의 상황도
이 이야기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을 때, 그 자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알렸는데(요한 11,3), 예수님께서는 소식을 듣고 즉시 가신 것이 아니라,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고(요한 11,6),
라자로가 죽은 뒤에야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것은 병을 고쳐 주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을 주기 위해서,
즉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회당장의 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병을 고쳐 주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을,
즉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시는 은총을 주셨는데,
이것은 당신이 병을 고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있음을
계시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 권한과 권능은 곧 모든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마태 9,23-26).”
예수님은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는 것처럼 죽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저 병을 잘 고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것도 그냥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긴 잠’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영원한 생명은 찾지 않고 눈앞의 이익만 찾는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눈앞’이 아니라 ‘영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숨을 거둔 회당장의 딸이 일어나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됩니다. 당시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부탁한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지요. 다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 취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청을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반면 지금까지 지녀 온 신념이 틀렸음을 깨달았어도 체면 때문에, 자신이 받을 불이익 때문에 억지로 외면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진리 앞에 자신의 명예를 포기해 버리는 회당장의 믿음과 용기를 높이 사야만 합니다.
한편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경우도 극적이지요. 여인의 병은 당시에는 고치기 어려운 병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모든 방법을 다 써 보았던 그 여인은 그래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 여인 역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치유되리라는 믿음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바로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이 은총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믿음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아울러 믿음에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실천하는 신앙,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믿음은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