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 성화의 날)] (마태 11,25-30)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부터 시작하여 점차 퍼지면서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모세는, 너희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시어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백성이니,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신명 7,6-11)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6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시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를 당신 소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7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사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수가 가장 적다. 8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셔서, 종살이하던 집,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 내셨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참하느님이시며,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10 또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그를 멸망시키시어 직접 갚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 없이 직접 갚으신다.
11 그러므로 내가 오늘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령하는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너희는 지켜야 한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고 한다. (1요한 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 성심 대축일 제1독서 (신명7,6~11)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사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다." (7)
'마음을 주시고'로 번역된 '하샤크'(hashaq)는 전치사 '뻬'(be)를 취해서
'~를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따라서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에 해당하는 '하샤크 예흐와 빠켐'
(hashaq yehwa bakem; The Lord did set his love on you)는
'주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셨다'로 번역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계약의 기초가 바로 사랑임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근거는 세상의 가치 기준에 있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떤 기준을 갖추었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주도적인 선택과 그 선택을 끝까지 견지하시는
하느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
이 사랑을 바탕으로 한 하느님의 계약이 결코 이스라엘의 수효의 많음에 있지 않고,
인격적인 관계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한 사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창세12,1~4).
그리고 '너희가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에 해당하는 '로 메룹베켐'(lo merubbekem)에서
비교의 기준이 되는 '라브'(rab)는 '많다'(창세32,12; 레위25,16; 7,7)라는 뜻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이외에도 '풍족하다','(부귀 등이)대단하다'(2역대17,5; 18,1),
'(권능이)크다','뛰어나다'(욥기37,23)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 모든 민족들과 비교하신 기준에는
다만 '수의 많고 적음' 만이 아니라 '부유함'이나 '능력','중요성'등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과 여러 측면에서 모두 비교해 볼 때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만한 이유는 전혀 갖고 있지 못한 자들이었다.
또한 '적다'는 뜻의 '메아트'(meat)는 앞의 '라브'(rab)라는 형용사가
다만 숫자적인 많음을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은 것처럼, 수효에 있어서
적다는 의미도 되지만 가치에 있어서도 보잘것없다는 의미도 지닌다.
이때의 가치는 바로 세상의 기준에서 매길 수 있는 가치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적인 가치에서 바라다볼 때
별볼일 없는 자들이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별볼일 없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구원사의 주역으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느 민족들보다
더 가치있는 당신의 백성으로 삼기까지 하셨다(신명7,6; 탈출19,6).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늘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믿음의 생활을 하고,
구원과 성화의 길을 걷는 것도, 재능과 은사를 받아 봉사를 하는 것도,
수도자로 불리워 봉헌의 삶을 사는 것도, 사제의 길을 걸으며
주님 구원 사업에 협력할 수 있는 것도, 우리 모두가 너무나 죄많고
성소받기에 부당하고 부족하며,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자이기에
내려주신 하느님의 은총일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사도 바오로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코린15,10).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에는 우리의 ‘마음의 길’에 대해서도 각별히 생각하게 됩니다.
문득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이 말한 ‘마음의 논리’가 떠올랐습니다.
그의 철학 책 『팡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단상은 퍽 인상적입니다.
“마음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를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안다.
마음이 어느 것에 충실한지에 따라 보편적 존재 또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에는 냉담해진다.
당신은 마음을 거부하고 이성을 택하였다.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성 때문인가?”
이 말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이기심의 덫에 갇혀 살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향할 것인지는 ‘마음의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새겨 봅니다.
파스칼의 생각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이성만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도 진리를 알게 되며, 더구나 진리이신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알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늘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자주 어둡고 무디어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데 무력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사랑의 질서 안으로 들어올 때만이 비로소 마음으로 하느님을 알아 뵙습니다.
우리 마음의 길이 사랑을 향할 때만이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증언하면서 확실하게 알려 줍니다. 파스칼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육체와 정신을, 그리고 그들의 모든 업적을 함께 모아 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최소한의 사랑의 움직임을 일으킬 만한 가치가 없다.
사랑은 더 높은 질서에 속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타는 예수 성심을 마음에 품으며 저의 마음도 그 사랑의 질서가 당기는 힘에 깊이 이끌리기를 성체 앞에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편안한 멍에이며 제 마음에 미혹과 이기심이 아니라 ‘진리’라는 가벼운 짐을 지어 주시리라는 점을 믿기에 그분 앞에 머뭅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우리 구원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바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요, 그 마음의 표현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마음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인격의 중심을 이루는 실체입니다. 또한 마음은 나 자신의 감정, 에너지, 판단뿐만 아니라 나의 내밀한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내 감정과 표현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드러내는 사랑이 진짜인지를 가려내는 기준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그분의 마음은 스토아학파의 사랑도, 플라톤의 사랑도 아닌, 부드럽고, 섬세하고, 심오한 사랑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어린이의 순수함에 기쁨을 느끼시고, 순수한 젊은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죄인들과 병자들과 과부들 같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시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분 마음의 정수는 그분의 죽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온전한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갈구하는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충만함을 얻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상처받은 마음은 창에 찔린 예수님의 마음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인간의 신비가 하느님의 신비를 만나는 거룩하고 초월적인 장소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