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간 금요일] 간음 (마태 5,27-32)

2017. 6. 16. 오전 5: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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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0주간 금요일] 간음  (마태 5,27-32)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데, 이는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2코린 4,7-15)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라며,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고 하신다. (마태 5,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제1독서(2코린4,7-15)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룻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7)

 

앞선 코린토 후서 4장 1-6절에서 예수님만을 진실하게 증거한 사도로서의 기본 직분 수행 자세에 대해

피력한 바오로는, 이제 코린토 후서 4장 7절이하 15절에서 약함 속에서 고난을 무릅쓰고

사도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는 사목 자세 대해 설명한다.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이 보물(보배)' 이란 무엇을 지칭할까?

어떤 이는 코린토 후서 4장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직분' 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문맥상 바로 앞에 나오는 코린토 후서 4장 6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 값진 보물이 값싼 질그릇 속에 담겨 있는 것으로 묘사하며

양자 사이에 극명한 대조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 질그릇 비유 로마서 9장 20-23절에서 바오로가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과

피조물의 연약함을 효과적으로 대조하기 위해 사용한 적이 있는데,

이사야 29,16; 30,14; 45,9; 64,7; 예레18,6 ; 19,1-11;  애가 4,2; 욥기10,9 등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각각의 비유는 문제의 차이에 따라 그 의미나 강조점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질그릇 비유의 상징어는 그 그릇의 가치가 형편없다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다.

 

Manson은 바오로가 언급한 질그릇을 두고 '코린토의 잡화점들에서 구매할 수 있는

값싸고 부서지기 쉬운 도기 등잔' 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부서지기 쉬운 도기 등잔과 같다.

왜냐하면,그들은 그들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빛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된 빛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해

이 구절의 의미를 확실하게 밝혀준다.

 

즉 바오로는 질그릇이란 표현을 통해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성과 연약성을 설득력있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Hughes는 이 비유를 로마 군대의 승전 행진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코린토 후서 2장 14절이나 코린토 전서 4장 9절과 같이, 로마 군대의 승전 행진의

장대한 광경과 관련된 비유를 사용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무리한 견해는 아니다.

그에 따르면, 로마 군대의 승전 행진에 있어서

금과 은을 질그릇에 넣어 운반하는 것은 당시 관례였다.

 

B.C.167년 마케도니아 전투에서 Aemilius Paulus가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에서

은화를 담는 750개의 질그릇을 운반한 일이 있었다 (Plutarch).

이러한 사실로, 자신이 소유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이

자신의 연약한 육체에 담겨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자각한 바오로에 의해, 얼마든지 차용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견해를 취하든 그러한 사실은, 바오로의 복음 선교 활동이

연약한 자신의 인간적인 본성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지식의 빛을 받아

그것을 전하면서 자기 자신을 내세울 자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높이 드러내실 분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과 비천함을 깊이 아는 자일수록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0)

 

코린토 전서 15장 31절에서 바오로는 '나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라고 언급하며

시편 44장 23절의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라는

예언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체험적으로 고백한 적이 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요한 복음 15장 20절에서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라고 말씀하셔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고통에 필연적으로 동참하게 될 것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죽음을' 에 해당하는 '네크로신'(nekrosin)은 단순히 '죽음'(dying or death) 그 자체만을 가리키는데,

본 단락에서는 고난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뿐 아니라

그때 수반된 죽음의 고통까지 말한다.

 

또한 '짊어지고 다닙니다'에 해당하는 '페리페론테스'(peripherontes)

'지니고 돌아다니다' 라는 의미를 지닌 '페리페로'(periphero) 현재 분사 능동태이다.

이것은 '항상'으로 번역된 '판토테'(pantote; always)란 표현과 더불어

바오로가 어디를 가든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항상 죽음의 고통을 지니고 다녔음을 말한다.

 

바오로는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갈라6,17)하고 말한 것처럼

그의 경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가 당했던 죽음의 고통에 날마다 동참하는 삶 살았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위대성은 이처럼 예수님의 삶을 철저하게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실천한 데 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목적의 의미를 나타내는 '히나(hina)가정법' 구문인 본문은

상반절에 나타난 바오로 사도의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즉 바오로가 날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 죽음의 고통에 몸소 동참하고 있는 것

'예수님의 생명' 을 그 몸에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예수님' 으로 번역된 '투 이에수'(tu Iesu)는 소유격으로서

바오로 자신의 생명이 바로 예수님께서 구원해 준 생명이며

 예수님께 속한 생명임을 강조한다.

 

즉 '생명도'로 번역된 '헤 죠에'(he zoe)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본질적으로

새로운 생명 곧 부활의 씨앗이 되었음을 함축한다.

 

또한 '드러나게'로 번역된 '파네로테'(phanerothe)

'분명히 나타내다' 라는 의미를 지닌 '파네로오'(phaneroo)의 수동태이다.

여기서의 수동태는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필리3,10).

 

예수님께서 질그릇같이 연약한 자신의 몸에 십자가의 고통을 담아냈듯이

그와 일치한 그리스도인들 역시 현세에서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 고통의 길은 바오로가 진술했듯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죽음의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그 고통에의 동참은 결코 무익하지 않다.

이것이 무익한 인내가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 부활의 첫 열매를 쫓아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것이며 그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부활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실상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것들은 본래부터 늘 우리와 함께 있었던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주변의 것들이 더 커 보이고 소중하게 보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잃어 보지 않고서는 그 소중함을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법도 대체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양심에 호소하십니다. 인간의 본성은 참으로 연약합니다. 겉으로는 모두 멀쩡하고 건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이웃을 욕하거나, 나쁜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하느님 앞에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이나 손이 나를 죄짓게 하면 빼어 버리고 잘라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부족한 우리 인간들을 잔뜩 주눅 들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치 길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갖지만, 바로 그때가 그리스도께 자신을 의탁할 때입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하느님과 자신의 양심 앞에 솔직해질 때, 우리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힘이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보물을 담아 놓으셔서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실 것이고,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죄로 유인하는 일들의 단절

오늘 복음은 우리가 죄로 유인하는 온갖 것들을 철저하게 끊어 버릴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1) 28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은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중요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겉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마음 가짐까지도 중요시한 점을 우리는 이 귀절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마음에 쌓아놓은 것을 밖으로 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범죄 하기로 작정했다면 그는 이미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동으로 옮길 기회가 마땅치 않아서 범죄하지 않은 것 뿐이지 기회만 있었다면 마음으로 작정한 그 죄를 범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 안에 좋지못한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란 이러한 생각에 내가 동조하여 그것을 실행할 마음을 가질 때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나쁜 생각을 떨쳐 버리고 유혹을 물리친다면 오히려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시며 우리의 영신 생활에도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안에 좋지 않은 생각이 떠 오르면 즉시 그것을 끊어 버려야 하겠습니다.

2) 29절에서 예수님은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릴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눈은 귀중한 것이고 선을 행하여 하느님 자녀답게 사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우리를 죄로 유인할 수도 있습니다. 범죄할 마음이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경우가 많은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다른 이에게 속해있는 사물이나 사람들을 좋지 못한 원의를 지니고 바라보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눈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눈을 통하여 들어오는 각종 요구를 선별하여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욕구가 나를 죄로 유인하려는 욕구라면 시초부터 철저하게 끊어 버려야 합니다. 오른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리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나를 범죄케한 눈을 빼어 버리라는 뜻이 아니고 그만큼 철저하게 죄로 유인하는 것들을 끊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3) 30절에서는 "오른손이 죄를 짓게 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 버려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소유물로 만들려고 하는 수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도둑질이 그것입니다. 죄를 짓게하는 손을 찍어 버리라는 말은 죄로 유인하는 것들을 끊어 버리라는 말인 동시에 손처럼 죄를 반복하여 짓도록하는 근원을 뿌리채 뽑아 버리라는 뜻으로 알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죄를 범하게 하는 근원을 그대로 둔다면, 우리는 주님이 주시고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범죄케하는 온갖 것들을 철저하게 피하고 과감하게 끊어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눈이나 손처럼 아주 소중한 것이고 애착이 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를 범죄케 함으로써 나와 하느님 사이를 갈라 놓는다면 이것을 과감하게 끊어 버림으로써 영원한 불행을 미연에 방지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말씀자료 : 김웅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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