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9주간 금요일]메시아 ( 마르 12,35-37)
토비야가 구해 온 약으로 눈을 뜬
토빗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를 바치고, 며느리인 사라를 축복하며 맞아들인다. (토빗 11,5-17)
그 무렵 5 안나는 자리를 잡고서 자기 아들이 돌아올 길을 살펴보고
있었다. 6 그러다가 토비야가 오는 것을 알아보고 토비야의 아버지에게, “봐요. 당신 아들이 와요. 함께 갔던 사람도 오네요.” 하고
말하였다.
7 토비야가 아버지에게 가까이
이르기 전에 라파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잘 알고 있소. 저분은 꼭 눈을 뜨실 것이오. 8 물고기 쓸개를 저분 눈에 발라 드리시오. 그
약은 눈의 하얀 막이 오그라들다가 벗겨지게 할 것이오. 그러면 그대의 아버지께서 시력을 되찾아 빛을 보게 될
것이오.”
9 안나는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껴안고, “얘야, 내가 너를 다시 보게 되다니! 이제는 죽어도 괜찮다.” 하면서 울었다.
10 토빗도 일어서서 다리를 비틀거리며 마당 문을 나섰다. 토비야가
그에게 마주 갔다.
11 물고기 쓸개를
손에 든 토비야는 아버지를 붙들고 그 눈에 입김을 불고 나서, “아버지, 용기를 내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그 약을 아버지에게
바르고서는 잠시 그대로 두었다. 12·13 이윽고 토비야는 양손으로 아버지의 눈가에서부터 하얀 막을 벗겨 내었다. 그러자 토빗이 아들의 목을
껴안고 14 울면서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15
그분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 토비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쁨에 넘친 토비야는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여행을 잘 마치고 돈을 가져온 것과 라구엘의 딸 사라를 어떻게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또 그 사라도 오고
있는데 니네베 성문 가까이 왔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16 기쁨에 넘친 토빗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며느리를 맞으러 니네베
성문으로 갔다. 니네베 사람들은 토빗이 오는데 손을 붙잡고 인도해 주는 사람 없이 힘차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17 그때에 토빗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그들 앞에서 밝혔다. 이어서 자기 아들 토비야의 아내인 사라에게 다가가 그를 축복하며
말하였다.
“얘야, 잘 왔다. 얘야,
너를 우리에게 인도하여 주신 너의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빈다. 너의 아버지께서 복을 받으시고 내 아들 토비야도 복을 받고, 그리고 얘야,
너도 복을 받기를 빈다. 축복 속에 기뻐하며 네 집으로 어서 들어가거라. 얘야, 들어가거라.”
그날 니네베에 사는 유다인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고 하신다. ( 마르 12,35-37)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연중 제9주간 금요일 제1독서(토빗11,5-17)
여행자들이 니네베 근처에 도착하였을 때(토빗11,1~4),
라파엘은 토비야에게 일행보다 먼저 달려갈 것을 제안하며
쓸개도 가지고 가라고 말한다.
다시 신비의 개(토빗11,4)가 나타난다(토빗6,2).
그동안 계속해서 안나는 자기 아들이 돌아올 길을 살펴보고 있었다(토빗11,5~6).
안나가 이윽고 아들 토비야가 오는 것을 보고 토비야의 아버지에게 "봐요. 당신 아들이 와요. 함께 갔던 사람도 오네요."하고 말한다.
소경이 된 토빗은 그들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지만,
안나를 통해서 비로소 그들이 돌아온다는 것을 안다.
토빗기 11장 7~8절에서 라파엘은 다시 한번 토빗이 꼭 눈을 뜨게 될 것을 확신하며
('나는 잘 알고 있소. 저분은 꼭 눈을 뜨실 것이오.')
토비야에게 아버지 눈에 쓸개를 발라 드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여기서 저자는 물고기 쓸개가 가질 수 있는 마술적인 어떤 힘보다는
의약품이라는 점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토빗기 11장 9~10절에서 가족이 만난다.
안나는 자기 아들 토비야의 목을 껴안는다.
토빗이 다리를 비틀거리며 마당 문을 나서자
토비야가 물고기 쓸개를 들고 아버지에게 달려간다.
토빗기 11장 11~15ㄱ에서 치유는 의료 절차인 동시에 기적으로 묘사된다.
토비야는 토빗의 눈에 입김을 불고 나서 물고기 쓸개를 바르고 잠시 그대로 두었다가
아버지의 눈가에서 하얀 막을 벗겨 낸다.
치유는 즉각적이고 결정적으로 이루어진다.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11,14)
다시 보게 된 토빗은 자비를 베푸시어 아들 토비야를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11,14ㄷ~15)
토비야가 여행을 성공적으로 잘 마쳤고,
아내로 맞아들인 사라가 니네베 성문 가까이 왔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토빗은
며느리를 맞으러 니네베 성문으로 간다(11,15ㄴ~18).
니네베 사람들은 토빗이 손을 붙잡고
인도해 주는 사람 없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토빗은 하느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셨다는 것을 밝히고('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사라를 열렬히 환영하며 그를 집으로 맞아들인다('얘야, 잘 왔다.').
토비야가 자기 아내와 함께 돌아오고,
토빗이 다시 보게 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니네베에 사는 유다인들도 모두 기뻐한다.
그들 가운데에는 토빗의 조카인 아키카르와 나답도 있었다(토빗1,22; 14,10 참조).
그들은 모두 이레 동안 토비야의 혼인 잔치를 벌인다.
제1독서(토빗11,5~17)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 토비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14ㄷ~15)
토비야의 치유(토빗11,1~18)를 곧바로 준비하면서 장면은 니네베로 옮겨간다.
여행자들이 니네베 근처에 도착하였을 때(토빗11,1~4), 라파엘은 토비야에게 일행보다 먼저 달려갈 것을 제안하며 쓸개도 가지고 가라고 말한다.다시 신비의 개(토빗11,4)가 나타난다(토빗6,2).
그동안 계속해서 안나는 자기 아들이 돌아올 길을 살펴보고 있었다(토빗11,5~6). 안나가 이윽고 아들 토비야가 오는 것을 보고 토비야의 아버지에게 "봐요. 당신 아들이 와요. 함께 갔던 사람도 오네요."하고 말한다.
소경이 된 토빗은 그들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지만, 안나를 통해서 비로소 그들이 돌아온다는 것을 안다.
토빗기 11장 7~8절에서 라파엘은 다시 한번 토빗이 꼭 눈을 뜨게 될 것을 확신하며 ('나는 잘 알고 있소. 저분은 꼭 눈을 뜨실 것이오.') 토비야에게 아버지 눈에 쓸개를 발라 드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여기서 저자는 물고기 쓸개가 가질 수 있는 마슬적인 어떤 힘보다는 의약품이라는 점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토빗기 11장 9~10절에서 가족이 만난다.안나는 자기 아들 토비야의 목을 껴안는다. 토빗이 다리를 비틀거리며 마당 문을 나서자 토비야가 물고기 쓸개를 들고 아버지에게 달려간다.
토빗기 11장 11~15ㄱ에서 치유는 의료 절차인 동시에 기적으로 묘사된다. 토비야는 토빗의 눈에 입김을 불고 나서 물고기 쓸개를 바르고 잠시 그대로 두었다가 아버지의 눈가에서 하얀 막을 벗겨 낸다.
치유는 즉각적이고 결정적으로 이루어진다.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11,14)
다시 보게 된 토빗은 자비를 베푸시어 아들 토비야를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11,14ㄷ~15)
토비야가 여행을 성공적으로 잘 마쳤고, 아내로 맞아들인 사라가 니네베 성문 가까이 왔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토빗은 며느리를 맞으러 니네베 성문으로 간다(11,15ㄴ~18).
니네베 사람들은 토빗이 손을 붙잡고 인도해 주는 사람 없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토빗은 하느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셨다는 것을 밝히고('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사라를 열렬히 환영하며 그를 집으로 맞아들인다('얘야, 잘 왔다.').
토비야가 자기 아내와 함께 돌아오고, 토빗이 다시 보게 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니네베에 사는 유다인들도 모두 기뻐한다.
그들 가운데에는 토빗의 조카인 아키카르와 나답도 있었다(토빗1,22; 14,10 참조). 그들은 모두 이레 동안 토비야의 혼인 잔치를 벌인다.
연중9주간 금요일 복음(마르12,35~37)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36~37)
여기서 '성령의 도움으로'에 해당하는 '엔 토 프뉴마티 토 하기오'(en to pneumati to hagio; by the Holy Spirit)에서 '엔'(en; in; by; with)은 장소나 도구를 나타내는 전치사이기에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보통 '성령에 감동하여'라는 말로 의역도 되는데,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적으로 기록한 시편 110장 1절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꼐서 내 주님께'에 해당하는 '퀴리오스 토 퀴리오 무'(kyrios to kyrio mou; The Lord to my Lord)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예흐와 라도니'(yehwa ladoni), 즉 '야훼께서 내 주께'로 되어 있으며, 새 성경에는 '주님께서 내 주군께'로 번역되어 있다.
유다인들은 '야훼'라는 이름을 나타내는 4개의 문자를 거룩한 문자로 성별(聖別)하여 함부로 쓰거나 읽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야훼'로 기록된 부분을 읽을 때는 그 음을 직접 읽지 않고 '아도나이'(adonai), 즉 '주'(主)로 읽었다.
이러한 전통에 의해 구약 성경의 희랍어 번역본인 70인역(LXX)은 시편 110장 1절의 본문을 '주님께서 내 주님께'(주님께서 내 주군께)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새 성경에서 앞의 '주님'은 '야훼 하느님'을, 뒤의 '주님'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1인칭 소유격인 '내'에 해당하는 '무'(mou; my)는 시편 110장의 저자인 다윗을 가리킨다.
이처럼 다윗이 자기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내 주님'으로 불렀다고 하는 것은 다윗 자신도 그리스도의 인간적 계보에 연연하지 않고, 신적(神的) 계보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성(神性)을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마르코 복음 12장 37절의 '다윗 스스로'에 해당하는 '아우토스 다위드'(autos David; David himself)에서 '스스로'로 번역된 '아우토스'(autos)는 마르코 복음 12장 36절과 마찬가지로 '친히', '그 자신이'라는 뜻을 지닌 재귀대명사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윗 '스스로' 그리스도, 즉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주님'으로 고백한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신다.
다름아닌 다윗 스스로가 '주님'으로 부른 대상이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고 강하게 반문하시면서,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에 대한 율법학자들의 오해를 날카롭게 꼬집고 계신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메시아적 명칭은 그리스도의 공생활을 통해 여러 번 불리워졌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지만, 영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만민의 주(主)가 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에, 이것을 분명히 정리해 주시는 것이다(로마1,3.4; 마태1,1; 요한8,58; 요한1,1참조).
<다윗의 자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5-37)”
이 말씀에 들어 있는 다윗의 말은 시편 110편 1절입니다. ‘주님께서’의 ‘주님’은 야훼 하느님입니다. ‘내 주님께’의 ‘주님’은 메시아입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는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당신의 오른쪽 자리로 높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는 하느님께서 메시아께 온 세상의 통치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의 뜻은, “메시아는 인간의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다윗이 ‘주님’이라고 불렀던 분이다.
따라서 메시아는 다윗 왕조만을 재건하시는 분이 아니다. 메시아는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다.”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기뻐합니다(마르 12,37).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 말은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로 바꿔야 합니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을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런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 가운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온다고 해도, 또 그 메시아가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다고 해도, 다윗 왕조를 재건하기만 하는 메시아라면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별로 좋을 것이 없는 일입니다.
(다윗 왕실 후손들은 좋아하겠지만,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로마제국의 지배와 다윗 왕실의 지배가 별로 다를 것이 없으니, 좋아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아가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라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을 똑같이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 즉 메시아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회개하여 어린이가 된 사람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만 있는 나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를 낮추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이라는 말이나 ‘낮은 사람’이라는 말이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높은 사람이고, 모두가 다 낮은 사람입니다. 기득권층도 없고, 지배 계층도 없고, 소외 계층도 없습니다.
(지상에서의 기득권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자신의 기득권을 버려야 합니다.)
계급, 신분, 지위, 인종, 빈부, 남녀, 학력 등의 차별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조금이라도 차별이 있다면,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그 나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2,3-5).”
그 나라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제도 교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제도 교회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의 모든 제도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제가 되고, 똑같은 권한을 가진 똑같은 시민이 됩니다.
만일에 특정 계층(계급) 사람들이 우월적인 지위와 권한을 누리게 된다면, 우리가 그런 나라를 희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를 희망한다고 해서 지금의 인간 세상을 그냥 참고 견디기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또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즉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기를 기도하는데,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6월 8일의 복음 말씀에 나왔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는 계명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참으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신이 높아지기를 바란다면 먼저 이웃을 높이면 됩니다. 그러면 모두가 높아질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하느님 나라는 어디 먼 곳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또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먼 미래의 나라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있고, 우리가 노력해서 완성시켜야 할 나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노력들도 하느님 나라 건설과 완성을 위한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구약 성경의 전통에 따라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며, 다윗 왕조 자체를 재건하러 오실 것이라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도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혈연적 계보는 예수님을 어떤 특정한 지역, 또는 특정한 문화나 사고방식에 국한된 구세주로 폄하할 위험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온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방법은 매우 구체적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들의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하느님의 존재가 한 지역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에 매우
구체적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개입으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온 세상에 펼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인간적
위대함 안에서 인간들의 모든 기대에 응답하시지만, 또한 이런 인간적인 기대를 초월하십니다. 인간적 사고 안에 꿰어 묶이지 않는 분이시며,
인간적인 기준 안에 분류되는 분도 아니십니다. 이처럼 하느님이시고, 인류의 창조주이시면서 동시에 인간 존재를 마지막까지 아시는 분이시기에,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인간’이시고, 완전한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과 정체성을 알려 주십니다.
인간의 사고는 자꾸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 사고의 틀 안으로 가져오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생각의 틀을 깨고 우리의 지평을
하느님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