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간 금요일]기쁨 (요한 16,20-23ㄱ)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는데, 유다인들이 들고일어나 그를 재판정으로 끌고 간다. (사도 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9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15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17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8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 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사도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9~11)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코린토에서 유대인들의 많은 저항과 반대가 있던 상황에 맞추어 주께서 환시 가운데에서 바오로에게 나타나 용기를 주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잠자코 있지'로 번역된 '시오페네스'(siopenes)는 '조용하다', '조용하게 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시오파오'(siopao)의 단수 2인칭 과거 명령법 동사이다.
예수님께서 폭풍우 치는 바다를 향해 명령을 내리실 때나(마르4,29),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 바리사인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도 본 동사가 사용되었다(루카19,39.40).
바리사이인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 그의 제자들에게 가했던 위협과 같은 종류의 것을 이때 바오로도 코린토에서 유대인들에게 받았던 것 같다.
아마 회당장 크리스토포스와 같은 유력한 유대인이 개종하고(사도18,8), 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자, 유대인들은 당황하여 바오로의 신변에 위협을 가했거나 협박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핍박 속에서 바오로는 과거 필리피나 테살로니카 및 베로이아에서처럼 코린토를 떠나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주께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 처한 바오로에게 환시 속에서 나타나셔서, 사람들의 훼방이나 협박을 두려워해서 침묵하지 말고, 계속해서 담대히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위기에 처할 때나 위축되어 있을 때마다 나타나셔서 용기를 주셨다(사도23,11; 27,23). 주님께서는 당신의 봉사자들이 당신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항상 새 힘을 공급하여 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ego eimi mota su; I am with thee)
바오로가 유대인들의 협박과 생명에 대한 위협 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바오로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생략하여도 의미 전달에는 지장이 없는 '에고'(ego; I)란 1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있다'라고 번역된 현재형 동사 '에이미'(eimi; am)가 사용되어 지금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주님 당신께서 항상 그와 함께 계실 것이란 내용이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주님의 임재 및 동행에 대한 약속은 오랜 선교여행, 지속적인 말씀 전파, 그리고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말미암아 심령이 위축되고, 지칠대로 지쳐 있는 바오로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로를 주셨을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동행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의 '임마누엘'(마태1,23; 이사7,14)이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된다. 하느님과의 오랜 단절 속에서 어두움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이 임마누엘의 소식이 구원의 지표가 되었듯이, 바오로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오로는 이미 깊고 어두운 감옥 속을 뚫고 비쳤던 하느님의 빛을 경험한 터였으므로 (사도16,25.26),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의 빛이 깨뜨리지 못할 어두움과 두려움의 질곡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만을 지워 놓고서 무관심속에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사랑의 빛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시고, 우리가 당신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끊임없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시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바오로를 대적하는 자나 핍박하는 자가 전혀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비록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그의 생명이 보호되며 어려움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내 백성'으로 번역된 '라오스~모이'(laos moi)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유익을 줄 사람들로서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는 못했지만, 듣기만 하면 믿어 구원받을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라오스'(laos; people)는 원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용어이지만, 이제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방인에게도 구별없이 사용되어 지고 있다(사도15,14; 디도2,14; 1 베드2,9). 이것은 이방인이 주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역력히 보여 준다. 이들은 바오로가 1년 6개월 동안 코린토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 돌아온 사람들이며, 또한 그 이후에도 복음을 영접하게 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자신의 결단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도적인 선택에 의하여 되어진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바오로는 서원할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18)
바오로는 시리아를 향하여 떠난 이후, 경유지인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혹자는 이 때 바오로가 제3차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여행 준비의 과정으로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 머리를 깎았다고 하지만, 이는 별로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선교 여행의 준비 차원에서 머리를 깎는 것이었다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코린토에서 깎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며, 본절에도 '바오로는 서원할 일이 있었으므로' 머리를 깎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은 '나지르의 서원'(Nazirite vow)일 것이다(민수6,1~21).
그는 코린토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특별히 지켜주심을 알았고,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일정 기간 자신을 하느님께 구별하는 서원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켕크레애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그 기간이 다 차서 나지르인 서원 종료 후의 절차에 따라 머리를 깎은 것으로 보인다(민수6,1~21).
이러한 사실은 '서원할 일이 있었으므로'에 해당하는 '에이켄 가르 유켄'(eichen gar euchen; for he had a vow)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이것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는 서원을 가졌다'인데, 여기서 '가졌다'에 해당하는 '에이켄'(eichen)이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서 바오로가 켕크레애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계속 서원 상태에 있었음을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바오로가 옛 유대인들의 관습을 좇아 서원한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오로가 자기 자신을 '유대계 그리스도인'(2코린11,22)으로 생각한 것이나, 제3차 선교 여행을 마치면서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사도23,6) 이라고 언급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그는 유대의 관습을 남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가운데에서, 문화적이고 의식적인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기(1코린7,17~24; 9,19~23)때문에, 그가 나지르인의 서원을 했다고 해서 다시 유다이즘으로 회귀한 것은 아니다.
너희가 지금은 울며 애통해 하고 있고, 또 근심에 싸여 있다.'
오늘 복음에 ‘너희가 지금은 울며 애통해 하고 있고, 또 근심에 싸여 있다.’
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 제자들도 주님께서 당신 곁을 떠나실 거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을 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스승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생활했던 지난날을 떠올렸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사람들에게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행하셨다.”(사도 10, 38)는 기억도 있습니다.
우리 스승님은 참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는 기억.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이 숨 쉬고 있는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기억과
사람을 사랑하셔서 가진 것마저도 내어 놓으셨고, 나누셨고,
아픈 사람 찾아가 함께 해 주시면서 위로와 힘을 주셨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셨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모든 사람이 떠나갈 때 유일하게 당신만은 곁에 있으면서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소외 받은 그와 함께 해 주시면서 힘을 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죄인이라고 사람들이 놀리고 모두가 포기하고 떠났지만
하느님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게 하셨습니다.
스승 예수님은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는 겁니다.
이런 스승님이셨기에 그만큼 예수님과의 이별은 울음이 나오고 떠나보내기에 너무나 애통하고,
앞으로 예상되는 일들에 대한 걱정이 앞서고,
스승이 안 계신 빈자리가 근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별을 슬퍼하고, 애통해 하지만
당신을 증거하고, 증언하기 위해 어떤 사람으로 바뀔지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오는 위로와,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쁨으로 인해 힘을 얻을 것이라는 점과
하느님을 알리고 당신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에 투신할 것을 아십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하느님의 선하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듣도록 타인을 위해,
이웃에게 먼저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많고,
함께 살아가도록 생각을 바꾸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이 결코 어둡고 무의미한 것만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살았을 때의 기쁨을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세상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면서 사람과 함께 계시기에 제자들이 그 기쁨 때문에 살았고,
그 기쁨을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았고,
그 기쁨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은 것을 보여주었듯이,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곳에 살면서 주님께서 주신 하루를 우울하게 시간을 보내지 말고
기쁘게 감사하면서 살아갑시다.
부산교구 도정호 신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느끼는 보통의 기쁨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곧 사라지거나, 다른 이들이 갖지 못하는 기쁨을
나 홀로 누리고 있다는 미안함 때문에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도 비슷한 상실감과 근심에 빠질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확고한 신념을 갖고 추진하던 일이 실패하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애통해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해산할 때에 겪을 진통으로 근심에 싸인 여인이
아이를 낳고 나서 얻게 될 기쁨을 실감나게 비유하시며,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고통을 겪겠지만
부활의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기에,
아무도 빼앗지 못할 충만한 기쁨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약속은 제자들과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 모함을 당하고 박해를 받아도
변명을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삶은 아름답지만 고통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이 커도 내가 얻을 기쁨이 크면 견디어 낼 용기를 얻습니다.
근심 없이 살 수는 없지만, 근심을 후회나 자책이 아닌 삶의 열정으로 바꾸어 내는 사람은 기쁘게 삽니다.
기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 내고 간직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2017,5 26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