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금요일]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12-17)
사도들과 원로들은 유다와 실라스를 뽑아 그들 편에 편지를 보내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고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한다. (사도 15,22-31)
그 무렵 22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뽑힌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인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였다. 23 그들 편에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24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5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26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27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스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9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30 사람들이 이렇게 그들을 떠나보내자,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내려가 공동체를 모아 놓고 편지를 전하였다. 31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나의 계명이라고 하신다. (요한15,12-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사도15,22~31)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8~29)
'성령과 우리는 ~ 결정하였습니다'
'결정하였습니다'로 번역된 '에독센'(edoksen)은 사도행전 15장 22절과 25절에도
그대로 나오는 단어이다.
이것은 '좋게 여겼다'(It seemed good to the Holy Spirit and to us~)는
기본적인 뜻과 더불어 '결정했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이방인에게 할례가 불필요하다는 결정은 사도들과 원로들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도 뜻을 함께한다는 사실이 본문에 나타나 있다.
특히 여기서 '성령'을 언급하는 것은 이 결정이 단순히 인간의 뜻이 아니라
성령 하느님의 인도로 된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지혜의 영이신 제3위 성령 하느님까지도 이방인에게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뜻을 나타냄으로써 사도들과 원로들은
그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원로들이 어떻게 성령의 뜻을 알았을까
하는 것은, 사도행전 15장 6~21절까지 기록된 회의 진행 과정에서 성령께서 나타나
그 뜻을 밝혔다는 진술은 보이지 않지만, 사도행전 저자가 기록하지 않았을 뿐,
사도들과 원로들은 성령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느님께 진지하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몇 가지 필수 사항'으로 번역된 '에파낭케스'(epanangkes)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 밖에 쓰이지 않는 단어로 '부득이','불가피한' 등의 의미이다.
이것은 이방인이 지켜야 할 네 가지 기본적인 금기 사항(20절)을 불가피하게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쓰여진 단어이다.
이것은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유대인 출신 신자들과의
거리낌없는 친교와 이방인들 주변에 있는 디아스포라(Diaspora; 교포와
같은 의미로 흩어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를 복음으로 이끌어들이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치였다.
그리고 네 가지 기본적인 금기 사항(20절)은 어제 독서의 말씀에서
이미 설명하였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네 가지 필수 금기 사항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짐'으로 번역된 '바로스'(baros)는 원래 '무게'(weight)를 의미하는 단어였는데,
'무거운 것', 즉 '짐'(burden) 또는 무거움 때문에 느끼는 '고통'(suffering)
이라는 단어로 발전하였다.
우상의 제물, 피,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심적 부담과 고통이 되지 않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행하고 모세 율법
전체를 지켜야만 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요,
고통이라는 사실이 본문에 잘 드러나고 있다.
복음의 진수를 바로 깨닫고 있는 사람은 구원을 조건으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과
심적 부담을 주지 않으나, 하느님 은총의 복음의 진수와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구원을 조건으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부담과 고통을 안겨 주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 신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가르쳐 주었지만
(갈라5,1~4), 콜로새 교회에 이단을 퍼뜨렸던 어떤 자들은 사람이 감당치도
못할 금기 사항을 주장해서 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것(콜로2,21)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삼간다'는 것은 이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로 번역된 '유 프락세테'(yu praksete)에서 '프락세테'
(praksete)는 '행하다'(do)는 의미를 지닌 '프랏소'(prasso)의 미래 능동형으로서
'행할 것이다'라는 의미이고, '유'(yu)는 '잘'(well)이라는 의미이다.
즉 '잘 행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제반 신앙 생활을 잘 수행하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열매를 맺어나갈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 행해 오던 악습을 버리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신앙의 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복음(요한15,12~17)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6)
요한 복음 15장 16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이유를 밝힌다.
그중에서 전반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선택을 받은 자임을 밝힌다.
부정과 긍정으로 이루어진 문장 구조 및 '내가'로 번역된 '알르 에고'(all' ego; but I)가
여기서는 강조적으로 쓰여, 그들이 제자가 된 것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뽑아'로 번역된 '엑셀렉사멘'(ekseleksamen; chose)은
부정(不定) 과거 중간태이며, 그 뜻은 '내가 스스로를 위해서 뽑았다'이다.
중간태와 능동태의 차이점은 행동의 주체가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점인데,
동작의 주인공을 강조하며, 동작과 주격을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켜 준다.
따라서 '내가 뽑아'에 해당하는 '에고 엑셀렉사멘'(ego ekseleksamen; I chose)은
'나 스스로를 위해 내가 선택했다'는 뜻으로서, 그 안에는 아주 강한 주체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70인역(LXX)에서는 거의 언제나 히브리어 '빠하르'(bahar)의 역어로 나오는데,
'빠하르'(bahar) 역시 구약에서 어떤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는 의미로 쓰였다
(신명7,6; 1사무8,18; 시편33,12).
우리는 우리 안에 선택받을 만한 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의 은총으로 선택받은 자임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한편, 주님께서는 우리를 뽑으셨을 뿐 아니라 세우셨다.
여기서 '세웠다'에 해당하는 '에테카'(etheka; appointed; ordained)는
'놓다', '두다', '~로 임명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티테미'(tithemi)의
부정(不定) 과거 시제이다.
이것은 철저한 소명 의식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숨'(sum)이라는 단어도 '티테미'로 번역되는데,
그것의 중요한 의미가 '사람을 어떤 지위에 임명하다'는 것이다.
압살롬이 요압 대신에 아마사를 내세워 군대를 지휘하게 한 것(2사무17,25),
다윗이 브나야를 세워 호위대장으로 삼은 것(1역대11,25) 등을 이 단어로 나타냈다.
또한 '숨'(sum)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따로 구별해 두다'는 뜻도 전달한다.
이러한 단어의 용례를 보면, 어떤 특별한 계획과 목적을 위해 많은 사람들
가운데 구별하여 세운다는 뜻이 여기에 들어 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아 일꾼으로 세우신 일차적인 목적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가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하여' 뽑으신 것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면, '너희가 계속해서 목적지로 가서 계속해서 열매를 내게'
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가서'로 번역된 '휘파게테'(hypagete; go)와 '맺어'로 번역된 '페레테'(pherete;
bear; bring forth)는 모두 가정법으로서, 접속사 '히나'(hina; that)와 함께 목적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또한 현재형으로서 계속적인 동작의 의미를 전달한다.
'가서'로 번역된 '휘파게테'(hypagete)의 원형 '휘파고'(hypago)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가다'이다.
요한 복음 15장 1~11절의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권고하신(요한15,5)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동일하게
열매를 맺을 것을 권고하시지만, 특히 '가서' 열매를 맺으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세상 가운데서 살면서 나타내 보이는 '선행'과 동시에 '복음 전파'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로마1,14.15).
'내 이름으로 ~ 청하는 것을 ~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원문은 구하는 주체(너희)와 주는 주체(그분)를 구분하고, 끝에는 받는 대상을
'너희에게'로 번역된 '휘민'(hymin)으로 명기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주시게'에 해당하는 '도'(do; he may give it)가 부정(不定) 과거형으로
쓰여 받을 것이 너무나 확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뽑힘을 받은 자와 열매를 맺는 자이고,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자라는 자세한 언급이 있다.
사도 요한 복음사가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신 후
제자들과(믿는 이들) 통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뿐이기 때문이다.
A.D.1세기에 이 복음이 쓰여질 당시에 유대적인 율법주의, 희랍적인 영지주의,
황제 숭배와 관련된 박해와 시련, 탄압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기도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사도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다락방 이별 담화에서
기도를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요한14,13.14; 15,17; 16,23; 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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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종’의 모습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하느님의 종으로 여기고, 그분의 말씀에 순명하며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약의 세례자 요한도, 가브리엘의 잉태 예고 앞에서 성모님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모든 종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성부의 뜻에 순명하시며 자신을 바치시는 희생을 통해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과 구원은 우리를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종의 비천한 모습이 아니라 친구로 예수님 곁에 머물게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 살과 피로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려 주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그분의 친구가 되는 영광을 거저 얻은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그래서일까요? 가끔은 우리가 뽑혔다는 사실이 두렵고 싫어서 예수님을 외면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싶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부르시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만, 우리는 힘겹게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걸으시는 예수님 곁에 잠시도 머물러 드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참된 믿음은 사랑할 용기에서 자라납니다. 소유를 위한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가치 있게 인정해 주고,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예수님 같은 사랑을 우리도 할 수 있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