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간 토요일]영이며 생명이다 (요한 6,60ㄴ-69)
베드로가 리따에서 중풍에 걸려 있던 애네아스를 고쳐 주고 가까운 야포로 가서 죽은 타비타를 살려내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된다. (사도행전 9,31-42)
그 무렵 31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32 베드로는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리따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가게 되었다. 33 거기에서 베드로는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34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35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36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38 리따는 야포에서 가까운 곳이므로, 제자들은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저희에게 건너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자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 도르카스가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42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너희도 떠나겠냐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시몬 베드로는,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냐며,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고 대답한다. (요한 6,60ㄴ-69)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60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사도31-41)
"야포에는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36~37)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부터 42절까지는 베드로가 죽은 타비타(Tabitha)를 살림으로써 야포(원문에는 '이옵페'; ioppe)지역에서도 이것을 계기로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이 일어난 야포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50km정도 떨어진 항구도시이다. 베드로는 팔레스티나 서부 지역에 복음을 전하던 중에 리따를 거쳐 리따의 북서쪽에 있는 야포에도 이른 것이다.
'여제자'라고 번역된 '마테트리아'(mathetria)는 '마테테스'(mathetes; '제자')의 여성형으로서 '여성제자'이다. 사도행전에는 교회에 속한 모든 모두에게 '제자'(사도6,1.2.7; 9,10.19.26; 11,26.29; 13,52)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이 명칭은 반드시 예수님에게서 직접적으로 배운 직속 제자와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이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이다.
'타비타'라는 여제자도 주님께 대한 헌신적인 섬김을 통해 이렇게 불려지고 있었다. 특히 '도르카스'(Dorkas)는 선행('에르곤 아가톤'; ergon agathon;doing good)과 자선('엘레에모쉬논'; elleemosynon; helping poor)하는 일을 맡아 주변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모범적인 주님의 제자였다.
A.D.1세기경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상당수가 두 개의 이름 즉 아람어(예수님의 모국어)이름과 그리스식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여제자도 '타비타'라는 아람어 이름과 '도르카스'라는 그리스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것을 보아 그녀는 그리스계 유다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이름은 둘다 '영양'(羚羊; gazelle)을 뜻하는데, 영양은 빨리 달리고 품위가 있어 '은혜로움' 혹은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런 이름과 뜻과 같이 누구보다도 선행과 자선에 헌신적이었던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방에 눕혀 놓았다.'
'씻어'라고 번역된 '루산테스'(lusantes; they had washed)는 '씻다'를 의미하는 '루오'(luo)의 부종(不定) 과거 분사이다. 이 '루오'동사는 신약 성경에 5회 등장하는데, 문자적인 '씻음'(사도9,37; 16,33; 2베드2,22)과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정결'(요한13,10; 히브10,22)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물론 장례 절차로서 염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또한 타비타가 죽었다는 사실을 의심치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옥상방'으로 번역된 '휘페로오'('hyperoo'; an upper chamber)의 기본형 '휘페로온'(hyperoon)은 '집의 가장 높은 부분','여인들이 물러가 거하는 위층'을 의미하며, 때때로 지붕 위 평평한 곳에 지어진다.
시신을 씻는 것은 장사를 위한 일반적인 관례이지만, 그것을 옥상방(다락)에 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아마도 장사되기 전까지 시신을 조용한 곳에 두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옥상방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의 일로 널리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믿는 사람들이 헌신적이었던 그녀에게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가 내려질 것으로 믿고 미리 예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열왕기 상권 17장 19절에서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의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자기가 머무는 옥상방으로 올라가서 자기 잠자리에 누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열왕기 하권 4장 10절과 21절에 엘리사의 옥상방 이야기가 나오는데, 수넴 여자가 위로 올라가 하느님의 사람의 침상에 죽은 아이를 눕히고는 문을 닫고 나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말하자면, 선행과 자선에 힘썼다가 죽은 타비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사도 베드로에 대해서 구약의 엘리야나 엘리사 예언자처럼 생각하고, 예언자들의 옥상방에서 일어난 소생 사건이 타비타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사도행전 9장 38절에서 사람들이 사도 베드로를 지체하지 말고 자신들에게 건너와 달라고 다급하고 간절하게 초청하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6,60ㄴ-69)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63)
여기서 '육'에 해당하는 '사륵스'(sarks; flesh)는 기본적으로 '살'이라는 뜻이며, 육체 및 혈육을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데 종종 쓰인다.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하여 하느님을 찾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인간, 그리스도를 보고서도 지각하지 못하는 어둠에 속한 자들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육'은 언제든지 죄에 굴복하므로, 육체가 있는 곳에 언제나 죄가 있다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기본 입장이었다.
'영'이 생명을 주는 것과 대조적으로 '육'(사륵스)은 영적인 측면에서 아무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쓸모가 있다', '유익하다', '돕다', '소용이 되다'에 해당하는 '오펠레이'(ophelei; profits; counts for)는 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인데, 여기처럼 사물에 대해 쓰일 때에는 '그것은 가치가 있다'(it is of value; it is of avail)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는 '오펠레이'(ophelei)를 부정하기 위해 '우크~우덴'(ouk~ouden)이라는 이중 부정을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여 '육'이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됨을 강조하시고 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육체가 원하는 것을 좇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성경은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며(로마8,6),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른 결과가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경고한다(에페2,3). 즉 '육'(사륵스)이 이끄는 데로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육'의 무익함을 죄로 기울여지는 성향을 가진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게서는 인생을 무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가치를 소홀하게 여기는 육적 가치에 치우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이 매우 특별한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말은'으로 번역된 '레마타'(remata; words)는 '레마'(rema)의 주격 복수로 '말하여진 것들', '예언들', '명령들'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말씀들'이다. '레마'(rema)는 기본적으로 '분명하게 말하여진 어떤 것', 즉 진술이나 성명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한'에 해당하는 '에고 렐랄레카'(ego lelaleka; I have spoken)는 말하는 주체를 나타내는 1인칭 대명사 '에고'(ego)를 사용하여 말하는 주체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렐랄레카'(lelaleka)는 '랄레오'(laleo)의 완료 시제로서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 혹은 주장하신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내가 이미 설교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신 그 말씀들이 '영이며 생명'이라고 단언하신다. 당신 자신의 말씀 속에 생명의 영과 생명의 능력이 존재함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은 본성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말씀과 성품이 죄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생명이며 오직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만 할 수 있는 말씀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라는 성경의 증거는 그 말씀이 지닌 능력이 어떠한지를 잘 드러낸다.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레미타'(remata)가 있는 곳에서는 새 생명의 역사와 영적 갱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요한 복음 6장 68절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에서도 '말씀'은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레마타'(remata)가 사용된 것을 볼 때, 이것은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며,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심을 이해하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과 육과 성체(요한 6,60ㄴ-69 )
| 오늘 복음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거든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그분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마저 “말씀이 이렇게 어려워서야!”하며 그분을 떠나서 다시는 따라다니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살아있는 사람이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면 그것을 이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남은 사도들에게도 당신을 떠날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당신이 생명을 주는 말씀을 지니고 계신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며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사도들을 대표해 베드로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바로 베드로를 반석으로 세운 교회를 나타냅니다. 베드로를 기초로 사도들의 전통을 이어오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바로 가톨릭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이 세우시는 교회와 성사 등을 이해하지 못하고 떨어져나갈 많은 형제들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교회 아우구스띠노회 수사 신부였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가 하는 일뿐만 아니라 성체성사도 고해성사도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까지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머리로는 교회가 하고 있는 이런 것들을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버리고 합리적인 것들만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이 당신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분을 더 이상 따르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마 개신교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성경말씀을 읽는 것이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런 의미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면 그것을 다시 설명해 주시며 당신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이해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말씀하신 그대로가 진리이기에,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 외에 다르게 말씀하실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에 당신의 살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사도들 앞에서 변화시켜주시고 당신을 기억하여 이 예식을 행하도록 분부하셨습니다. 이에 교회는 사도들의 이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사도들 또한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실 때 이것을 완전히 이해해서 남아있겠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도 사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해가 된다면 더 이상 믿음은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주지만 육체는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하는 말은 영이고 생명이다.” 개신교의 유명한 목사님들이 목회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이면 많은 경우에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면 이 세상에서도 많은 복을 받고 부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주님의 말씀을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으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시고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물질적으로 잘 살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믿으려고 한다면 영적인 말씀이 이해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베싸이다라는 동네에서 한 장님을 치유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치유를 해 주었더니 사람이 나무처럼 보인다고 하고 두 번째 치유를 하니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나무로 보는 것은 영적인 눈을 띄어주신 것입니다. 그 장님을 다시 베싸이다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다시 죄를 지어 영적인 눈을 잃게 될까봐 그런 것입니다. 육체적인 눈으로 보면 사람은 그냥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사람이 나무로 보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먹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이 생명나무임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눈을 지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기 전까지는 교회에서 하는 많은 것들이 이해가 안 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초대 교회 때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몰래 사람을 잡아먹는 예식을 한다는 소문까지 들어가면서 이 예식을 행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성체를 바라보는 마지막 눈이 바로 영적인 눈이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란치아노의 성체 성혈 기적을 조사하던 과학자는 처음에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이고 살임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 이백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몇 시간만 지나도 피가 응고되어 분석이 불가능해짐에도 바로 흘린 피처럼, 바로 심장에서 잘라낸 살처럼 유지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진정 사람의 살과 피임을 보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며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해가 안 된다고 무조건 포기하고 나간다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 첫 교황께서 하신 말씀처럼 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당신께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지니고 계시니 우리는 당신 안에, 즉 교회 안에 머물겠습니다.”라고 항상 고백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