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목요일] 영원한 생명 (요한 3,31-36)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지시를 어겼다고 최고
의회에서 대사제의 신문을 받는다. 사도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해야 한다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삼아 당신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는데, 성령께서 이 일의 증인이시라고 대답한다. (사도행전5,27-33)
그 무렵 경비병들이 27 사도들을 데려다가 최고 의회에 세워 놓자
대사제가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33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요한
3,31-36)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5,27~33)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28)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29)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30)
사도행전 5장 28절의 '가르침'으로 번역된 '디다케스'(didaches)는 본절의 전반부에 대사제가 언급하고 있는 대로 '그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친 것을 가리킨다.
대사제의 표현 가운데 엿볼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의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퍼뜨리면서'로 번역된 '페플레로카테'(pepllerokate)는 '가득하다'는 뜻의 동사 '플레로오'(pleroo)의 완료형으로서 앞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 아니라 이미 가득 차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대사제의 표현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 이미 예루살렘에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지금 사도들을 심문하고 있는 그들에게 큰 위기감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사람'으로 번역된 '안드로푸 투투'(andropu tutu)는 '이 사람'이란 뜻이다. 희랍어에서 사람의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고 단지 '이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려하는 것이며, 그 사람을 몹시 경멸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사제는 십자가에서 죽은 나자렛 예수를 여전히 저주받은 자로 여기며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의도적인 경멸은 내심으로는 예수를 몹시 의식하고 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8)
본문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득하게 하여 예수님 죽음의 책임을 산헤드린 최고 회의 의원들인 자신들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대사제의 주장이다.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는 것을 망설이는 빌라도에게 빠른 판결을 얻어내기 위하여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스스로 했던 말이기 때문에(마태 27,25) 예수님의 죽음의 책임을 그들이 져야 한다.
'씌우려'로 번역된 '에파가게인'(epagagein)의 기본형 '에파고'(epago)는 '~위에'라는 뜻의 전치사 '에피'(epi)와 '가져오다'는 뜻의 '아고'(ago)가 합성된 형태로서
문자적으로는 '~에게 무엇을
가져오다'는 의미이다.
이 동사는 죄의 형벌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응보적 행위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 단어이다(2베드 2,5).
본문에서는 물론 자신들에게 예수님의 피의 값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실상 대사제의 말대로 본문에서 이 동사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죄값을 치르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응보적 행위로 결론지워지고 말았다.
A.D.70년 유대 종교의 총 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더 이상 제사가 드려지지 않게 됨으로써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형벌이 가시화된 것이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29)
'말론 에'(malon e; rather than)에서 '말론'은 비교급 부사인데, 본문에서 비교급 불변사 '에'(e)와 함께 사용되어 '~보다 오히려 더욱'이라는 뜻으로 비교의 정도를 더욱 강조한다.
여기서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은 복음 전파 금지 결정이며(사도4,19),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란 계속적인 '복음 전파'를 가리킨다. 결국 본문의 표현은 산헤드린의 결정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인간적인 것임을 지적한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0)
베드로는 하느님을 호칭함에 있어 '우리 조상들의'란 수식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자신들이 조상의 신앙을 이어받은 전통파라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
그들이 조상의 신앙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그들 조상이 섬겼던 하느님께서 살리셨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베드로는 본문에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매단 것을 가리킬 때 '십자가'를 뜻하는 '스타우로스'(stauros)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나무'를 뜻하는 '크쉴론' (ksilon)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신명기 2장 22~23절을 연상시키기 위함이다. 즉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명기의 내용과 연관지어 볼 때 나무에 매달린 예수님은 하느님께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나무에 매단 자를 '여러분이'(휘메이스; hymeis) 곧 '대사제와 산헤드린 최고 회의에 모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 지적하고 있다.
앞절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느님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 데 이어서, 본절에서도 동일하게 하느님의 편에 있는 자와 그를 대적한 자를 명백히 대조시킴으로써,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인 대사제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야말로 하느님을 대적한 자들임을 밝히고 있다.
부활 제2주간 목요일
복음(요한3,31~36)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지만,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1)
요한 복음 3장
31~36절을 세례자 요한의 말로 본다면, 요한 복음 3장
31절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자신과
구체적으로 차별화시키고 있는 내용이 된다. 그분은 자신과
달리 '위에서' 오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위에서'로
번역된 '아노텐'(anothen; from
above)은 장소를 가리켜서 쓰일 때에 '위로부터'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시간을 가리키는 부사로 쓰일 때는 '새로'(anew)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이것은 근본 출신이나 출처 등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며 탄생을 묘사하기 때문에(요한1,13; 1요한2,29) '하느님께로부터'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위에서 오시는 분'의 사상은 구약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낯선 용어가 아니다.
특히 '~안으로
들어가다'는 뜻으로 흔하게 쓰이는 히브리어 '뽀'(bo)는 당신 백성에게로 오시는 분인 주님과
관련되어 자주 발견되었다. 그분은 짙은 구름 속에서 시나이
산에 오셨고(탈출19,9;
20,20), 수만 수천 성도와 함께 시나이 산에서
시온산으로 오신다(시편68,1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수많은 군중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마태21,9)을 외치면서 대대적으로
환영한 것은 '오시는 분'에 관한 믿음과 관계된다(시편118,26).
세례자 요한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을 가리켜 '위에서 오시는
분'에 해당하는 '호 아노텐 에르코메노스'(ho
anothen erchomenos; The one who comes from above)라고 불렀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과 현저히 구별되는 것은 위에서 오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 위에 계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계신다'로 번역된 동사 '에스틴'(estin;
is)이다. 이 동사의 시제가
현재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 위에
계속하여 계시며, 만물에 대하여
지배권을 가지는 것을
나타낸다.
반면에 세례자 요한은 땅에서 났으며 땅에
속하였으므로, 땅에 속한 것을 말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땅에서 난
사람'에
해당하는 '호 온 에크 테스 게스'(ho on ek tes ges; the one who is from
the earth)라는 표현은 '위에서 오시는 분'과
대구를 이루는 표현으로서, 예수님과 자신은 근본부터 다름을
증거한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 자신이 육(肉)으로 난
자요, 죄 아래 있는
자라는 뜻이다.
'땅'으로
번역된 '게스'(ges;
earth)는 인간의
거처이며 세상의 일부로서의 땅을 가리키는데, 특히 하느님과 관련지어 볼 때 그것은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분의 뜻에 의해 존재하므로 그분께
시작과 끝이 있다.
하늘과
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땅이 죄의 활동 장소라는 것인데,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근본이 바로 이곳임을
밝힘으로써,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무죄하신
예수님(히브4,15)과 자신을 철저히 차별화시킨
것이다.
이와같이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임으로써, 당시 그가 얻고 있던 명성과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했던 것이다.

마음의 문은 손잡이가 안쪽에만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 바깥에서는 그 문을 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우리를 도와주려고 다가와도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기만 할 수 있을 뿐, 결코 열 수는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열어 주지 않으면 그 문은 늘 굳게 잠겨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난치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지요.
영성 상담을 하다 보면 내적 치유가 가장 어려운 사람은 바로 이렇게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입니다. 바깥 세상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 있는 사람이지요.
자신의 내면에 빛이 들어와야 어둠이 물러가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텐데, 문을 꽁꽁 닫고 있으니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도 도무지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이런 답답한 심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다가와 문을 두드렸을 때, 성모님께서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여셨지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하셨지요.
성모 마리아께서는 그야말로 엘리사벳의
고백처럼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늘 마음의 문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사람들도 나에게서 자유를 느낍니다.
성령께서도 때맞추어 필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자신도, 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우리 내면이 자유롭고
편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