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화요일] 유다 (요한 13,21ㄴ-33.36-38)

모태에서부터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종은 주님의 구원을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하는 민족들의 빛이다. (이사야. 49,1-6)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고, 제자들에게 지금은 당신이 가시는 곳에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에게는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할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 13,21ㄴ-33.36-38)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21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23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24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25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28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7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성주간 화요일 제1독서(이사49,1~6)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3)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5)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3) 여기서 '종'에 해당하는 '아브띠'(abdi)는 '섬기다','일하다'는 의미의 '아바드'(abad)에서 유래하며 주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소유물인 노예나 왕국의 가신(1사무19,1)을 언급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겸손을 나타낼 때에 사용한다(창세33,5). 그러나 본문에서 이 종은 주님을 지칭하는 1인칭 접미어와 결합하여 '주님의 종'으로 표현되고 있다.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에 해당하는 동사 '에트파아르'(ethpaar)의 원형 '파아르'(paar)는 어떤 물체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재귀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는데, 그의 종을 통해서 그렇게 하실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너에게서'로 번역된 '뻬카'(beka)는 '메시야의 삶과 일(사명)을 통해서'라는 의미이다.
오직 주 하느님의 말씀대로만 사는 메시야의 삶과 무죄한 자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은 메시야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요한17,4).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5) 이사야서 49장 5절부터 7절까지는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사명을 성취하게 하실 것과 영광의 승리를 보장하시는 약속이 제시된다. 이러한 내용은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주 하느님께서 한번 주신 약속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취시킨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앞세움으로써 앞으로 제시되는 이사야서 49장 6절의 주님의 말씀이 확실하게 성취될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여기 이사야서 49장 5절은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주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매우 긴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주님의 종과 이스라엘이 어떤 관계이며, 이들에게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사야서 49장 5절의 이러한 내용은 이사야서 49장 6절에서 인용되는 주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사야서 49장 5절에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예흐와 요체리 밉베텐 레에베드 로'(yehwa yotseri mibbeten leebed lo; who formed me as his servant from the womb)이다.
여기서 '모태에서부터'에 해당하는 '밉베텐'(mibbeten; from the womb) 에서 드러나지만, 주님의 종이 후천적으로 사명을 받은 자가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사명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모태에서부터 주님의 종을 예비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그 종이 성공적으로 사명을 완수하게 하실 것임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5) '모여들게 하시려고'의 표현은 앞의 '돌아오게 하시고'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가장 가깝게는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로부터의 귀환과 신앙적 회복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이사야서 49장 2절에 암시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질 것인데, 주님의 종이 본래부터 이스라엘의 영육의 회복을 위해 지음을 받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사명을 입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계획된 주님의 종을 통한 하느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며, 이 계획은 궁극적으로 종말에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백성들이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옴으로써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로마11,25~27).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5) '소중하게 여겨졌고'에 해당하는 '웨엑카베드'(weekkabed; for I am honored)의 원형 '카바드'(kabad)는 본래 '무겁다'는 의미로서 '소중히 여기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주님의 눈에'라는 '뻬에네 예흐와'(beene yehwa; in the eyes of the LORD)라는 표현은 주 하느님과 주님의 종과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주님의 종을 특별히 소중하게 보신다는 것은 결국 이 종을 통한 사명이 반드시 성취되게 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라는 표현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이것은 메시아가 이 땅에서 인류 구속 사업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원천이 바로 주님께서 주신 능력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요한 복음 14장 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사명이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13,21ㄴ-33.36-38)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27)
예수님과 제자들이 앞당겨 파스카 만찬을 행하고 있는 그곳에는 음식물이 풍성하게 있다. 그중에는 공동으로 먹게 되어 있는 빵과 포도를 발효하여 만든 식초도 있었다. 당시 식사 풍습에 있어서 주관자가 식사 참여자들에게 접시에 담긴 빵을 식초에 직접 찍어 주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사랑과 우정의 표시이다.
주님께서는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셨다. 오히려 호의깊은 이런 행동을 통해서 유다로 하여금 마음의 가책을 느껴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다른 제자들로 하여금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길 배신자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유다가 그 빵을 받은 직후에 '그에게' 사탄이 들어간다.
'그에게'에 해당하는 원문은 '에이스 에케이논'(eis ekeinon; into him)으로서 '유다 속으로'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가 당신을 팔아넘길 자요 악마임을 아셨고(요한6,64.70), 요한 복음사가는 악마가 이미 유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 넣었다고 증거했는데(요한13,2), 요한 복음 12장 27절에 사탄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은 그 순간부터 사탄이 유다의 인생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들어갔다'에 해당하는 '에이셀텐'(eiselthen; entered)은 '에이세르코마이'(eiserchomai)의 부정 과거인데, 성경의 용례를 보면 많은 마귀가 들린 것 (루카8,30)이나 더러운 영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간 것(마르5,12.13)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사탄이 유다의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이제 유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을 나타낸다.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마귀가 어떤 사람 속으로 들어가니까 그가 마귀에게 몰려 무덤에서 짐승처럼 살게 되었고(루카 8,27), 더러운 영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자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르5,13). 이것은 마귀들린 당사자나 돼지 떼로서는 불가항력적 일이었다.
사탄이 유다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군대 마귀가 들린 사람처럼 해괴한 짓은 하지 않았으나 철저히 시탄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사탄은 유다의 생각이나 감정, 판단 및 결정 능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임의로 주관하게 된 것이다.
유다가 이렇게 된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12사도단의 생활 당가였으나 돈 도둑이었고, 공사(公私)가 불분명한 자였으며, 항상 자신의 죄악을 합리화, 정당화시키는 자였다.
그는 수학 머리, 계산 머리가 있어서 예수님의 여러 기적들을 체험한 뒤 예수님을 팔아넘기면 현세적으로나 세속적으로 힘있는 임금,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임금으로서의 모습, 팔레스티나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는 정치적 임금으로서의 모습을 예루살렘에서 보여주리라 기대했다.
말하자면 그는 예수님을 끝까지 시험한 자였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 나름의 메시아관을 그렸던 사람이다. 그러나 주님은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주는 영신적 메시아였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무죄하신 어린양이셨다.
마치 가랑비에 옷깃젖듯이, 권투 선수가 잔 펀치에 넉 다운이 되듯이 유다는 그렇게 작은 죄악들과 이기적 욕심으로 주님과 동료들을 이용하려했던 평소 가치관과 생활 습관이 쌓이고 쌓여 이렇게 마(魔)를 불러 들이고,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한편, 요한 복음 17장 12절(ㄴ) 에는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나온다.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에 해당하는 '호 휘오스 테스 아폴레이아스'(ho hyos tes apolleias; the son of perdition)는 운명의 차원이 아닌 인격과 속성의 측면에 대한 표현이다. 이것은 테살로니카 2서 2장 3절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오는데, '멸망하게 되어 있는 그자'가 '무법자', '맞서는 자', 자칭 '신'이라고 자처하는 자로 나온다. 이것을 볼때 유다 이스카리옷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은 유다가 사탄이 가지고 있는 성품과 인격과 속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그가 태어날 때부터 멸망받을 자로 예정된 것이 아니라 유다의 사탄과 같은 인격과 성품이 멸망받을 만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요한 복음 13장 27절에서 예수님께서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하시며 이러한 유다를 지키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유다 자신이 예수님의 보호하심을 자신의 욕망 때문에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에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 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마태26,14~16)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요한13,30) 또한 예수님께서 유다를 지키시지 않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에 해당하는 '히나 헤 그라페 플레로테'(hina he graphe pllerothe; so that the scripture might be fulfilled)는 유다의 배반이 이미 하느님의 섭리와 예지 가운데 들어 있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성경은 유다의 배신이 간접적으로 예언되어 있는 시편 41장 10절과 시편 109장 8절 등을 가리킨다.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한13,8)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시편41,10)
'원수가 저를 모욕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참았을 것입니다. 저를 미워하는 자가 제 위에서 거드름을 피운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피해 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 내 동배 내 벗이며 내 동무인 너. 정답게 어울리던 우리 하느님의 집에서 떠들썩한 군중 속을 함께 거닐던 우리.' (시편55,13~15)
'그의 살날들은 줄어들고 그의 직책은 남이 넘겨받게 하소서.'(시편109,8)
여기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는 말 때문에 '유다 아니면 또 다른 누가 그 역할과 배역을 수행해야만 예수님의 구속사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며 예정론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언뜻보면, 성경 안에는 넓은 의미의 예정론이 있다.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도 예지(豫知)하시는 하느님의 전지 전능하신 구원의 계획과 섭리와 안배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이나 진리를 깨닫는 능력인 이성(理性)이나 선(善)을 추구하는 행동의 원리인 의지(意志)를 자유(自由)롭게 쓰며, 매사에 하느님의 뜻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의 인격(人格)은 어떻게 되며,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로봇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또한 멸망하도록 작정된 자가 영원으로부터 미리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주이기에, 인류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는 말은 유다의 배반 사건이 있은 뒤 적어도 2~30년 뒤에 복음서를 기록한, 구약을 잘 아는 복음사가가 볼 때,'아~구약 성경에 예언된 이 말씀이 바로 여기서 실현되었구나'하고 알아 들었으니까 그렇게 기록한 것이지, 예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더군다나 '멸망으로 정해진 자'의 표현은 운명이 아니라 인격과 성품과 속성의 측면을 말한다고 이미 앞에서 밝혔다.
유다는 12사도단의 당가를 책임지면서 평소 공금을 횡령하던 도둑이었고 (요한12,6), 다른 여느 사도나 유다인들처럼 현세적이고 정치적 메시아관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팔아 넘겨 궁지에 몰아 넣으면, 평소 여러 기적을 행하신 능력의 소유자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힘있는 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줄거라고 끝까지 시험한 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유다라 할지라도, 자신의 기대치에 어긋나 일이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혀 양심의 불편함을 느껴 주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바로 뵙지 못해 주님의 뒷모습만 바라보아서도, 그는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요사파 수녀님께 하신 예수 성심의 메시지에 나오는 말씀이다.
유다는 이미 가랑비 옷깃 젖듯이 평소에 죄(罪)를 차곡 차곡 쌓아 놓아서 이미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엔 때가 늦었던 것 같다.
그의 심령의 주인이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 그의 자아(自我)가 너무 커져 버려 스스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거슬러 스스로 생명을 처분할 생각을 갖게 되었고, 사탄이 그의 심령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방치해 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일생을 틀어서 진정한 참회의 순간과 주님께 사랑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진실된 기도의 시간을 갖지 않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다의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길래 하느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겠는지를 곰곰히 묵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자신도 매사 매순간에 주님 가장 가까운 곁, 바로 턱 밑에서 또 다른 유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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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3년이나 지낸 사람의 배신행위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와 삶을 적나라하게 전해 주는 시편 55(54)편 14-15절은 ‘하느님의 집에서 정답게 어울리던 벗’의 배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편 41(40)편 10절은 ‘믿어 온 친한 벗, 빵을 나누던 사람’의 배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세상 이치에 밝았고 셈이 참 빨랐나 봅니다. 그는 세리 마태오를 제치고 열두 사도의 돈주머니를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닥칠 위기를 감지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돈을 챙길 방안을 찾습니다. 그는 돈 욕심 때문에 스승을 팔아넘기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의 희망은 한순간에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절망의 어둠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허망한 기대에 집착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였지만 회개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삶과 정반대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께 고백하고 용서받는 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다시 돌아가 사랑을 고백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지 못하였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선택입니다. 자신의 죄악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건너가는 삶이 우리의 길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