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금요일]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요한 7,1-2.10.25-30)
지혜서의 저자는, 악인들은 의인이 하느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하니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고 하지만, 그들이 틀렸다고 한다. (지혜 2,1ㄱ.12-22)
악인들은 1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시자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지만,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아 손을 대는 자가 없다. (요한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지혜2,1ㄱ.12~22)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런 죽음을 내리자."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17~22)
지혜서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고, 칠십인역(LXX; Septuaginta; 희랍어로 쓰여진 구약 성경)에만 나오므로, 제2경전(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한다. 제2경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어(희랍어; 헬라어)로 저작된 책은 지혜서와 마카베오 하권뿐이다.
지혜서의 저작 연대는 B.C. 50~3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이 쓴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 사상가인 필로에 의하면, A.D.1세기 초에 이집트에는 100만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좀 과장된 숫자이겠지만, 이집트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다 백성들; 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다 교포들이 사는 곳을 말함)유다인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지혜서는 철학, 윤리, 신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된 갖가지 주제들을 다룬 소품 모음집이다.
저자의 집필 목적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헬레니즘 문화가 압도하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와 그 부근에 살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유대교의 정통교리를 다른 문화에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토착화(Inculturation)작업의 일환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혜서 저자는 유대교 전통을 거의 모르는 그리스인들과 저자 자신처럼 히브리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헬레니즘에 익숙한 유다인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사상과 비교하여 유대교 관습과 사상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헬레니즘에서 기원한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적 인생관에 맞서서 유다교의 전통적 믿음과 교리를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
지혜서는 크게 세 부분, 종말의 숙고(1~5장), 지혜의 찬가(6~9장), 역사의 숙고(10~19장)로 나눈다.
첫째 종말의 숙고(1~5장)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강조한다.
둘째 지혜의 찬가(6~9장)에서 임금과 권력자들에게 하는 권고, 7장 22~23절에 나오는 지혜의 정신에 담긴 정신의 특성 21가지(완전을 뜻하는 7의 3배수: 매우 완전한 숫자), 지혜를 청하는 기도(9장)등이 나온다.
마지막 세째 부분(10~19장)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지혜서10장에서는 원조들과 성조들의 이야기, 10장 15절~11장 20절에는 이집트 탈출 사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높이 기리는 찬미가(11,26; 구원의 보편주의), 가나안 정복, 자연, 우상, 동물 숭배의 어리석음(13~15장),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에서의 시련(16~19장)을 두서없이 열거한다.
지혜서에는 특히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돋보이는데 <의인들의 불사 불멸>과 <지혜의 의인화>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의롭게 살고도 현세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의인들은 비록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어 죽은 다음에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서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죽은 의인의 부활이 아니라 의로운 영혼의 불사불멸이다.
한편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혜>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요한 복음의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인격적 지혜>를 성령이나 성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시도이지만 어쨌든 지혜서에서 신약성경의 삼위일체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던지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하느님께서 전지하시고 전선하시고 전능하신데, 왜 이 세상에 악이 범람하는가? 전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왜 악을 허락(허용)하시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참으로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분이 너무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당하고,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으로 일찍 죽는지? 하는 것이다.
동시에 끊임없이 나쁘고 못된 짓을 하며 천상천하(天上天下)유아독존(唯我獨存)처럼 살아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이 너무나 현세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잘되는 것을 보면, 神은 과연 계시는가? 도대체 神의 공의, 정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던지면서 불신앙과 회의를 품게 된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소위 신정론(神正論)이라 일컬었다.
일찌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다 더 큰 善을 위해서, 보다 더 큰 惡을 예방하기 위해서" 전지하시고 전선하신 하느님께서 惡을 허락하신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안에서 고찰할 것을 설파했다.
오늘 지혜서 2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신정론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지혜서 3장이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영원(eternity)에 비교하면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점(點)에 지나지 않고, 잠깐 지나가는 이승의 삶을 마치면 반드시 심판이 있고 그때에는 종말론적 자리바꿈(자리 전도)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공의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지상에서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 세워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당신의 말씀과 계명에 충실한 이들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상급을 반드시 주시며 의로운 영혼은 결코 불사불멸하지 않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선행에는 상급을 내려 주시고, 악행에는 벌을 주시는 공의(公義)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불의하고 죄짓고 자신이 神이 되어 안하무인(眼下無人; overbearance)으로 이승에서 맘대로 산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영원한 심판과 지옥벌로 갚아 주시어, 당신의 의(義)를 바로 세우시며, 당신의 생명의 말씀이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하시고, 당신이 천상 천하의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잠깐 살다가 육신 생명을 마치지만, 불의와 불법, 거짓과 오류, 무지와 폭력에 맞서서 하느님의 진리와 의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순교를 통해 그 목숨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 순교자들처럼,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불의와 절망과 억울한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천국의 영원한 복락과 내세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성으로는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고문과 박해와 죽음 속에서도, 내세의 영원한 복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자에게 약속된 선물과 하느님을 지복지관(至福直觀)하며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축복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잠깐 정리를 해본다. 악인들의 생각에 의하면, 의롭게 살았는지 아닌지가 결정나는 것은 죽을 때이다. "그의 최후가 어찌될지 지켜 보자."(2,17) 그래서 그들은 의인에게 고통과 모욕을 주고 죽음을 내릴 계획을 세운다.
그들의 말은 이사야서 53장(고통받는 종의 노래)을 상기시키는데, 이런 느낌은 지혜서 2장 18절의 '아들'에 해당하는 '파이스'(pais)가 '종'을 뜻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더 강화된다.
그들은 의인이 참으로 하느님의 '파이스'(pais)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적대자들의 손에서 기적적으로 구해 주실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하느님의 길과 불멸성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지혜서 2장 21~24절에 나오는 내용은 불멸성의 중요성과 악인들의 그릇된 생각을 모두 강조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셨다(2,23).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단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다(창세 3장 참조).
불멸성 또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은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이며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이다(2,22). 이것은 하느님께서 의인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악인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복음 (요한7,1-2.10.25-30)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28ㄷ~29)
요한 복음 7장 28절ㄴ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일부 회중들이 당신을 안다고 주장하는 말을 인정하셨다. 그것은 누구든지 가질 수 있는 공개된 정보였기 때문이다.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며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은 특별한 영적 지각이나 통찰력이 요구되지 않는 개방된 정보였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먼저 인정하시고 난 뒤, 보다 중요한 사실인 당신 자신의 본질을 밝히신다.
'나 스스로'에 해당하는 '아프 에마우투'(ap' emautou; of myself; on my own)는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요한 복음 7장 28절은 내용상 요한 복음 7장 16절과 17절의 주장에 대한 반복이며, 동시에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무지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 즉 '하느님에게서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온 것이 아니다'에 해당하는 '우크 엘렐뤼타'(ouk eleytha; I am not here)는 '에르코마이'(erchomai)의 완료 시제이다. 과거에 완료된 사건의 현재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완료 시제의 특징이므로, 예수님께서는 아주 심오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피상적 지식과 실제 예수님 자신은 다르며, '내가 곧 메시야'라는 사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의 시제 속에 담겨 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에서 '참되신데'에 해당하는 '알르 에스틴 알레티노스' (all' estin alethinos; but is true)는 '그러나 그분은 참되시다 혹은 신뢰할 만하다'는 뜻이 된다.
고전 희랍어에서 '알레티노스'(alethinos; true)의 용례는 '영원한 것으로서 참된', 혹은 '계시에 의해 전달된 것으로서의 참된'이라는 뜻도 취하기 때문에,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라는 예수님의 주장은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는 의미가 있다.
즉 그들이 만약 영원히 참되시며 올바른 계시를 주시는 분으로서 하느님을 알고 또 믿는다면, 그분이 보내신 이인 당신 자신을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므로(요한10,30)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볼 수 있는데도(요한14,9),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단지 육신적으로만 알았기에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이라는 책망을 피할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는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지적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알지 못한다'로 번역된 '우크 오이다테'(ouk oidate; not know)에서 '알지'로 번역된 '오이다'(oida; know)는 밀접한 사귐이나 친교, 경험을 통한 앎을 나타내므로, 이것은 그들이 하느님과의 사귐이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밀접한 관계나 친교를 가지고 있지 못함을 나타낸다.
스스로 선민임을 자랑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러한 지적은 커다란 모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분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군중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대자들을 두려워하시지 않고 가르치시는 것을 대하니, 예수님이 참된 메시아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는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오신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에 대해서는 출생부터 이미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두 가지로 하십니다. 첫째는, 군중이 아는 것과 달리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군중은 하느님을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잘 알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일생에서 큰 전향점이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부해 왔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만이 하느님을 안다고 하니, 그들은 모욕감을 느낀 것입니다. 따라서 그동안 예수님을 안식일 파괴자 정도로 생각하던 그들은 이제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중죄인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 군중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에도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했지요. 메시아가 어떤 분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나는 그분께 무엇을 바라는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일상생활 중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만들고, 나의 틀 안에 가두어 버린 그런 예수님 모습이 아니라 실제 예수님의 모습을 정립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 윤경재 요셉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5-30)
마르코 복음서의 주제는 ‘메시아의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달리 요한복음서는 비밀에 싸인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의 신원을 당당히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유다 축제일에 맞추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활동하시는 모습을 그렸고 언제나 ‘큰 소리로(크라조) 말씀하셨다.’라고 강조합니다. 얼버무리지 않고 당신의 과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모습입니다. 그리스어 ‘크라조’는 요한복음을 이해하는 키 워드 중 하나입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요한 18,20-21)
성전정화 사건도 공관복음서와 달리 공생활 초기에 언급됩니다. 처음부터 조금도 굽힘없이 유대인들과 갈등하시는 분으로 그린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심각하게 당신의 뜻이 위협받을 때에는 요르단 강 건너편이나 갈릴래아로 피신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7,1)
오늘 복음에서도 유대인들과 메시아에 관해 논쟁하십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메시아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어디에서 온지도 모르게 홀연히 나타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언제 어디서 내려올지 다시 모르는 것처럼 비범하게 등장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생각은 피상적인 것에 머물러 도리어 열린 마음으로 예수를 만나고, 그의 주장을 듣고, 그에게 투신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초월적 이미지를 지닌 존재였습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인간을 심판하고 엄한 징벌을 주시는 존재였습니다. 신비에 싸여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갈릴래아 출신이며 비천한 목수의 아들이고 형제와 친척들이 같은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죄인들과 어울렸으며 가난한 이들과 여인들과도 가깝게 지냈습니다.
물론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등 많은 기적을 베푸는 것을 보았고 그의 설교와 가르침이 가슴에 와 닿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이 너무 뜻밖인 내용인지라 온전히 이해하기에 무엇인가 꺼림직 했으며 전폭적인 신뢰심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한 나무꾼이 장에 나갔다가 새 도끼를 사들고 왔습니다. 얼마나 잘 베일지 기대가 컸습니다. 과연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니 새 도끼라 그런지 나무가 잘 찍혔습니다. 굵은 나무도 수월하게 자를 수 있었습니다. 금세 지게에 한가득 나무를 채웠습니다. 평소보다 더 많은 나무를 지게에 매고 내려오면서 신이 났습니다.
몇 칠 후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려니 도끼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온 집안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 이웃집 철수가 마당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철수가 혹시 도끼를 훔쳐가지나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니 슬슬 눈길을 피하는 것이 영락없이 도둑질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확실한 것도 아니라 속으로 끙끙 매며 확증을 잡으려고 몇 날을 숨어 지켜보았습니다. 점점 철수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무엇인가 뒤가 켕기는 지 이리저리 살펴 봅니다. 철수가 밖으로 나간 뒤에 철수가 눈여겨 본 곳에 가서 확인을 하였으나 도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무꾼은 할 수 없이 옛날 도끼를 들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였습니다. 우연히 지난번에 나무했던 곳을 보다가 무엇인가 번쩍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혹시나 하여 달려 가 보니 바로 지난번에 산 도끼가 그대로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는 공연히 죄 없는 철수만 의심하였던 것이 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집에 내려와 보니 이제 철수는 더없이 밝게 노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한번 품은 의심은 쓸데없이 더 큰 의심만 불러일으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공연한 의심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율법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현세에서 하느님을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은 절대 군주와 같은 모습, 현재를 희생하는 미래의 신, 恨이 낳은 신, 죄의식을 강요하는 신, 경건한 도덕가들의 우두머리인 신 등등의 모습이 담겨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들이신 당신 안에서 하느님을 뵐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예수께서는 담대하게 자기 계시적인 말로써 하느님과의 결속 관계를 재확인 시킵니다. 또 머지않아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는 때가 오면 자신을 체포하도록 자유로이 넘겨주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군중 가운데 많은 사람은 그분을 믿었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런 믿음은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하셨습니다. 표면적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과연 나는 참으로 예수님을 만났던가? 다시 한 번 반성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