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부자와 라자로 (루카16,19~31)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가문 해에도 열매를 맺는다며, 주님께서는 마음을 살피시며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으신다고 한다. (예레미야 17,5-10)
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10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예수님께서는 호화롭게 살다 죽어서 저승에 간 부자와 아브라함 곁으로 간 가난한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루카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예레17,5~10)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구려움없이 그 잎에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7~8)
예레미야서 17장 5~6절에서는 사람의 힘을 의지하며 주님을 떠난 자에게 내릴 저주가 선언되었다. 이제 예레미야서 17장 7~8절에서는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이에게 내리는 축복이 선언된다. 이 양자를 비교할 때 축복을 받을 사람과 저주받을 사람과의 차이는 단 한가지이다. 축복을 받은 사람은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17장 7절 본문은 문자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서 그의 신뢰가 되는 그 사람은 복이다'이다. 후반부 문장의 주어는 '주님' 즉 '예호와'(yehoah)이며, '신뢰'에 해당하는 '미브타호'(mibtaho)는 '의뢰','의지','신뢰'(시편40,4.5),'희망','신뢰'(시편71,5) 등으로 번역되는 '미브타흐'(mibtah)에 3인칭 단수 접미사가 결합된 형태로 '그의 신뢰','그의 희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명사는 '의지하다','신뢰하다'란 뜻의 동사 '빠타흐'(batah)에서 유래된 명사로서 그의 의미는 동사와 같다. 따라서 본문은 한 어근을 중복적으로 사용하여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축복을 받을 사람은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대조되는 17장 5절과 관련지어 생각하면,'사람이 아닌 주님을 의지하고, 군대나 군사력이 아닌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그 마음이 주님만을 향하여 있는 그 사람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8)
저주받을 사람 곧 '사막의 덤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은 축복받을 사람의 상황이 본절에 진술되고 있다. '광야의 메마른 곳','인적없는 소금 땅'(6절)에서의 삶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무더위'나 '가문 해'에 그러한 곳에서의 삶은 사실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무더위'나 '가문 해'는 아무런 고통이나 걱정을 안겨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서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될'(시편1,3)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에서 '두려워 하다'란 뜻의 동사 '야레'(yare)는 6절의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의 '보다'란 뜻의 동사 '라아'(raah)와 함께 예레미야서에 자주 사용되어, 언어 유희를 보여 주고 있다.
저주받은 사람은 좋은 일(예; 저주의 끝)이 올지라도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축복받은 사람은 가뭄(저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뭄이 올지라도 생명을 지탱할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반된 상황의 대조는 유사움을 지닌 두 히브리어 '야레'(yare)와 '라아'(raah)의 언어 유희(word play)를 통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루카16,19~31)
"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4ㄴ~26)
살아 생전에 병들고 굶주림에 지쳐 있었던, 자기 대문 앞의 거지 라자로에게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았던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주제넘은 요구를 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이 멸시했던 라자로를 통해 물 한 방울만 떨어트려 달라고 한다.
차마 많은 것을 청하지 못하고 손가락 끝에 찍은 물을 구하는 부자의 상황과 심정이 어떠할지 짐작이 된다. 지상에서 호의호식하며 배불리 먹던 부자는 이제 물 한 잔도 아닌 말라붙은 혀를 식힐 한 방울의 물을 구걸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특히 '식히게'로 번역된 '카탑쉭세'(katapsykse)는 뜨거워 메말라버린 혀를 식히고 촉촉하게 해달라는 뜻으로서 부자가 처해있는 곳이 얼마나 뜨겁고 견디기 힘든 곳인지 보여 준다.
살아 생전 거지 라자로를 쳐다 보지도 않았던 부자가 이제 자신의 비참한 처지로 말미암아 라자로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상황이 역전된 현세와 내세와의 자리바꿈의 뚜렷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는 이유 부사절을 이끄는 접속사 '호티'(hoti; for)로 시작되는데, 부자가 왜 물 한 방울을 구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 준다. 그는 뜨거운 불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오뒤노마이'(odynomai)는 '몹시 아프게 하다', '몹시 괴로워하다', '몹시 고통을 당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오뒤나오'(odynao)의 현재 수동태로서 뜨거운 불길 속에서 계속적으로 격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의 상황을 보여 준다.
이 고통은 절대자 하느님의 심판에 의한 고통이며, 여기서 불길은 죄인의 최종적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묵시19,20; 20,10; 21,8).
현세에서 매일 잔치를 벌여 사치와 쾌락을 일삼았던 부자는 죽음과 동시에 헤어날 수 없는 심판의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져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애타게 부른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라자로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다.
루카 복음 16장 25절에서 아브라함은 애걸하는 부자의 청원을 들어줄 수 없음을 설명한다. '좋은 것들'로 번역된 '아가타'(agatha)의 원형 '아가토스'(agathos)는 '선한', '유익한', '아량있는'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부자가 받은 '좋은 것들'은 살아 생전 그가 누렸던 부와 명성을 말하며, 동시에 그가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배려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하느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온갖 부와 명성과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정작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조금도 동정을 베풀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부자는 현세에서 '주는 것'에 무관심했고, 오로지 '받는 것'에 익숙한 삶을 살았다고 보면 된다.
아브라함은 서로 통교할 수 없는 공간상의 제약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을 때 고통받던 라자로를 외면한 부자의 악함 때문에 부자를 외면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위로를 받고'에 해당하는 '파라칼레이타이'(parakaleitai; he is comforted)는 '~곁에', '~가까이'라는 뜻이 있는 접두사 '파라'(para)와 '부르다', '초대하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 '칼레오'(kaleo)의 합성어로서 '곁으로 부르다'는 뜻이 있지만, 본 단락에서는 '위로하다', '격려하다'는 뜻으로 의미가 확장된 '파라칼레오'(parakaleo)의 현재 수동태이다.
이것은 라자로가 계속적으로 외부로부터 위로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위로는 위로의 근원이신 하느님(욥기15,11; 즈카1,17)으로부터 오는 완벽한 위로인 것이다(2코린1,3.4).
한편, 루카 복음 16장 26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부자의 애절한 청원을 들어줄 수 없는 현실적 이유가 나온다. 아브라함이 말하는 '우리와 너희 사이'란 결국 저승과 낙원 간의 간격을 말한다.
'구렁'으로 번역된 '카스마'(chasma; a gulf; a chasm)는 '길게 갈라진 틈', '심연'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실질적으로 구렁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보다는, 지옥과 천국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 질적인 차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가로 놓여 있어'로 번역한 '에스테릭타이'(esteriktai; there is fixed)는 '흔들리지 않게 하다', '강화하다', '확고히 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스테리조'(sterizo)의 완료 수동형으로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있는 그 구렁은 이미 오래전부터 확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그 누구도 그것을 옮기거나 없애지 못한다는 강한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죽은 후에 처해진 운명은 아무도 그 상황을 바꿀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반대로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지요.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곁으로 가지만,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자신이 부자라는 이유로 벌을 받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의 죄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과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었습니다. 생전에 그 가련한 라자로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요. 물론 그가 남을 해치거나 도둑질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남의 어려움을 외면한 이기적인 사람을 대표한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부자냐? 가난한 사람이냐?’ 이런 외적인 상태보다도 ‘얼마나 마음이 풍요로우냐?’ 이 점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또한, ‘복음에 나오는 그 부자는 오늘날 누구인가?’ 이 점을 오늘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재산이 많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이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복음의 부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은 점점 이웃과 거리를 두게 마련입니다. 이웃과의 사이에 스스로 구덩이를 파는 것이지요. 이 구덩이가 점점 크고 깊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이웃은 물론이고, 하느님께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때가 더 늦기 전에 나눔과 배려의 의무를 다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