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간 화요일] 주님의 기도 (마태 6,7-15)
이사야 예언자는,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은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룬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사야 55,10-1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니,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며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마태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이사55,10-11)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10~11)
오늘 독서 이사야서 55장 10~11절의 말씀은 55장 6~7절의 말씀이 천지가 개벽해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하느님께서 정하신 자연법칙을 예로 들면서 강조하고 있다.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 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6~7)
이사야서 55장 6~7절은 하느님을 만날 기회가 영원무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질 바로 그 때에 회개하여 주님을 찾으라고 촉구하는 내용이며, 이 말씀에 따라 죄인이 돌아올 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하시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는 땅에서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않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
이러한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한 번 주 하느님의 입에서 나간 말씀은 반드시 그 목적한 바를 성취하고야 만다. 하느님께서는 한 번 뱉은 말씀이 성취되기도 전에 그것을 다시 주워 담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민수기 23장 19절에서 발라암의 신탁을 통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어서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아니어서 생각을 바꾸지 않으신다. 그러니 말씀만 하시고 실천하지 않으실리 있으랴? 이야기만 하시고 실행하지 않으실리 있으랴?"
비가 내리면 그 중에서 수증기로 증발해 버리는 양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한 번 내린 비는 반드시 땅을 적시게 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땅은 생산력을 갖게 되어 있다.
본문의 진정한 의도는 하느님께서 목적하시는 바는 결코 헛되이 끝나지 않고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데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이 그와 같은 성취를 이루어낸다는 것을 자연 법칙을 통해 비유하는 데 있다.
적절한 시기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은 땅을 촉촉히 적셔서 싹이 돋게 하고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며 인간에게 양식을 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인간 영혼을 살리며 삶을 풍성하게하는 영적 양식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인간 영혼을 살리며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의 삶은 풍성해지게 마련이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완벽한 판단력과 완전한 지식과 총체적 계획과 영원한 경륜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입에서 나간 말씀이 헛되이 사라지거나 허망한 것으로 끝맺는 일은 결코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한 번 입에서 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계획한 목적을 달성하고야 마는것이다.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작하는 본문은 왜 하느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씀이 헛되이 그냥 돌아오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그 말씀이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내가 뜻하는 바'에 해당하는 '아셰르 하파츠티'(asher hapatsthi)는 문자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 혹은 '내가 기뻐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은 다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며 생명을 구원하는 일과 관련된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당신의 의롭고 선하시고 진실하신 속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전지 전능하심, 절대 주권에 근거해서 반드시 성취되며, 궁극적으로 그 모든 일들은 그분의 성품에 부합된 것으로서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축복이 되고 아름다운 결과로 귀결될 것이다.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간 말씀은 그의 마음 속에서 계획하신 뜻을 표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자 이시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고 운동력과 생명력이 있으며 재창조의 능력이요 치유하는 광선이고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다.
제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영육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절대적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매일 말씀을 읽고 곱씹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살아서 참으로 말씀이 주는 기쁨과 평화, 행복과 자유를 누리자.
그럴때 우리의 삶이 회복되고 의미가 있게 되고 가치롭게 된다.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4장 4절, 8절, 12절에 "성경에 기독되어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세번 다 구약 성경의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번역된 '게그라프타이'(gegraptai; It is written)는 원형 '그라포'(grapho)의 완료 수동태이다.
희랍어에서 완료형은 과거에 이루어진 동작이 현재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능을 가진다. 따라서 과거에 기록되어 이미 완성된 구약 성경의 그 말씀이 기록된 그 시대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계속하여 효력을 지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수동태가 된 것은 그 말씀이 사람이 쓴 문자로 남겨져 있음을 나타낸다.
성경은 비록 외형적으로 인간 저자나 필사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지만, 그 배후에 특별 계시의 주체가 되시는 하느님의 계시이므로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이 되는 것이다.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복음(마태6,7~15)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7~8)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에 해당하는 '메 밧탈로게세테'(me battalogesete; do not keep on babbling; do not use vain repetitions)에서 '빈말을 되풀이하다'로 번역된 '밧탈로게세테'(battalogesete)의 원형 '밧톨로게오' (battologeo)는 '말을 많이 하다', '생각없이 말하다', '쓸데없이 말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기도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이 했던 기도나(1열왕18,26), 에페소에서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외쳐댔던 아르테미스 숭배자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도19,34).
또한 하느님을 대상으로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기도를 반복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은총의 지위를 상실하고 죄중에 기도하거나,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기도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이들이 때로는 눈물로 애원하고, 때로는 논리적으로 하느님을 설득하는 조로 미사여구를 늘어 놓으며 장황하게 기도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하느님 앞에 아무 의미없는 말들을 많이 쏟아내는 것에 불과하며, 이런 기도는 하느님 대전에 올라갈 수가 없다.
마태오 복음 6장 8절의 '알고 계신다'에 해당하는 '오이덴'(oiden; knows)은 완료형이다. 희랍어에서 완료형은 말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이미 동작은 끝났지만, 그 동작의 결과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여기서도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이미 기도하는 이의 형편을 과거로부터 알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우주의 삼라만상과 인류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께서 직접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당신께서 선택한 자녀의 청원 내용을 모르실 리가 없다.
따라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기도가 아니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진실한 기도라면 반드시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라고 하더라도, 그 기도의 응답이 늦어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때와 사람의 때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가장 적절하게 응답해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주의 기도'에 대한 해설은 2014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1,1~4)을 참조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15)
-유 광수신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의 기도에 대해 점검해 보도록 하자. 먼저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기도하는가?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가? 기도를 하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먼저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가? 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자. 기도의 목적은 3가지를 이루는 데 있다. 첫째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는 것"이며, 둘째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하든 즉 묵상기도, 관상기도, 묵주기도, 염경기도, 십자가의 길을 하든 여하튼 기도의 목적은 위의 3가지를 이루는데 있다. 한 마디로 기도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나의 나라가 아니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는 것이며, 나의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 있다.
우리 삶의 목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완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면 될수록 우리가 있는 그곳은 나의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가 건설되어 있을 것이고,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보다는 나의 나라를 확장해 달라고 기도하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이 이루어달라"고 기도한다. 물론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도의 목적은 아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청할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만 기도하는 것은 아니고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만일 이런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면 우리의 기도는 항상 미완성이고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주의해야할 사항을 두 가지 말씀하셨다.
첫째는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는 것이다.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위선자란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 십번씩 주의기도를 바친다. 주의기도의 내용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는 것이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워지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노력해야 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워지도록 최선을 다하는 생활이어야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를 위해서 또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이 이루워지기만을 바라고 그렇게 생활한다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식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 십번씩 주의기도를 바치면서 과연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또 아버지의 뜻이 이루워지도록 얼마나 노력하는가?를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 "빈 말을 하지 마라."는 것은 말은 말만 그럴 듯 하게 하고 실제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다. 즉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내용은 없이 말만 하는 경우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고 했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면 생활도 그렇게 살아야지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빈 말이 되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 지 알고 계신다."고 하셨듯이 굳이 우리가 이것 저것 청하지 않아도 아버지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다. 그런데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시는 아버지께 자꾸만 청하기만 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께 맡기고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아버지의 나라를 어떻게 하면 오게 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워 지게 할 수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를 다 알고 계시만 그래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지만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를 어떻게 하면 건설할 수 있는지 또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행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무엇이 아버지의 나라이고 아버지의 뜻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기도를 바치든 기도의 목적은 항상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기도 노트" 라는 제목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내가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 생의 마지막 일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일했는데, 밤이나 주말 그리고 여름방학에도 타자를 쳤고 아버지가 자료를 수집하거나 책상에 앉아 집무를 보실 때 늘 곁에 있곤 하였다.
아버지는 늘 엄격하셨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지낸 시간 중 단 한순간도 난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오랜 갈등 끝에 말년에 신앙심을 갖게 된 아버지는 그것을 특별한 영광이라고 자부하며 잡지 기사에 인용하곤 하셨고, 또 혼신의 힘을 다해 책으로 펴내기도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서재를 채임 맡아 천 권 이상 되는 책들과 이백 권이 넘는 개인 노트들이 각각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큰 자부심으로 여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의 침대에 딸려 있는 서랍을 정리하던 중 나는 전에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메모 노트를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그리고 그 노트를 뒤적이다가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초록색 잉크로 정성껏 적어 놓은 많은 이름들을 발견했다. 맨 먼저 가족의 이름, 그 다음 친구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이웃들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빈 페이지도 있었고 이어 이십여 명 가량의 내겐 전혀 생소한 이름들도 있었다.
나는 그 메모 노트를 어머니께 보여 드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그것은 네 아버지의 기도 노트란다. 네 아버지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이 노트를 펴고 한 사람 한사람 이름을 손으로 짚어가면서 조용히 기도하셨단다."
"그런데 이 분들은 누구지요?" 내가 마지막 명단을 가리키며 묻자 어머니가 대답하셨다. "그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사람들이지."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점은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남을 용서하려면 먼저 ‘나 자신이 끊임없이 용서받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부터 인식해야 합니다. 살아오면서 그 누구도 잘못을 범하지 않은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끊임없이 용서받았습니다.
이웃의 잘못을 떠올리기보다, 나 자신의 잘못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하지만 나의 조그만 편견 때문에 이웃에게 큰 불편을 준 일부터, 알게 모르게 범한 죄도,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죄들도 많지요.
더군다나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거나 합리화하지만, 남의 잘못은 두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낸 적도 있지 않습니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용서’입니다. 용서해 주는 마음이지요. 나 자신도 늘 누군가로부터 용서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많이 용서받는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만일 남을 용서할 마음 없이, 건성으로 ‘주님의 기도’만 바치며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청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