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금요일]이혼장 (마르코 10,1-12)
집회서의 저자는,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고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 나간다고 한다. (집회 6,5-17)
5 부드러운 말씨는 친구들을 많게 하고, 우아한 말은 정중한 인사를 많이 받게 한다. 6 너와 화목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많이 만들되, 조언자는 천 명 가운데 하나만을 골라라.
7 친구를 얻으려거든 시험해 보고 얻되, 서둘러 그를 신뢰하지 마라. 8 제 좋을 때에만 친구가 되는 이가 있는데, 그는 네 고난의 날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
9 원수로 변하는 친구도 있으니, 그는 너의 수치스러운 말다툼을 폭로하리라. 10 식탁의 친교나 즐기는 친구도 있으니, 그는 네 고난의 날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
11 그는 네가 잘될 때에는 너 자신인 양 행세하고, 네 종들에게 마구 명령해 대리라. 12 그러나 네가 비천하게 되면, 그는 너를 배반하고 네 앞에서 자취를 감추리라.
13 원수들을 멀리하고, 친구들도 조심하여라.
14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 15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16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으리라. 17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 나가니, 이웃도 그의 본을 따라 그대로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냐고 묻자,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마르코 10,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1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집회6,5-17)
"친구를 얻으려거든 시험해 보고 얻되, 서둘러 그를 신뢰하지 마라. 제 좋을 때에만 친구가 되는 이가 있는데, 그는 네 고난의 길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 (집회6,7~8)
집회서 4장 20절에서 6장 17절은 인생의 가치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 오늘 독서 집회서 6장 5~17절은 성실한 친구와 원수로 변하는 친구의 대조를 통해 참된 친구와 그 우정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원수로 변하는 친구는 상대방 친구의 수치를 폭로하고, 잘될 때에는 군림하고 식탁의 친교는 즐기면서도, 결정적으로 상대방 친구의 고난과 비천의 날에는 함께 있어 주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본색을 드러낸다는 표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성실하고 참된 친구의 기준과 척도는 상대방 친구의 고난과 같은 어려운 지경에 끝까지 동참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가르쳐준다(집회6,7~9.11).
특히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요, 보물이며, 값으로 따질 수 없고, 어떤 저울로도 그 가치를 달 수 없는데, 이런 생명을 살리는 명약과 같은 친구는 주님을 경외할 때 얻을 수 있는 선물이며, 그러한 우정도 주님의 말씀과 기도안에서 바로 키워 나갈 수 있고, 이웃에게도 하나의 표양이 될 수 있음을 계시한다(집회6,14~17).
오늘 독서의 집회서 말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이별하는 자리에서 하신 말씀과 더불어 이스가리옷 사람 배반자 유다와 관련된 구절 등등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15,13)
"제 동무들과 이웃들은 저의 재앙을 보고 물러서 있으며 제 친척들도 멀찍이 서 있습니다." (시편38,12) 겟세마니 동산에서 겉으로는 스승님을 부르고 입을 맞추면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유다처럼(마르14,42.44~46), 사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남들이 보기에 가장 친한 친구처럼 행세하던 자가 겉으로는 웃으면서 도와주는 것같이 시늉을 내며 나를 포옹하고는 칼을 뽑아 나의 등을 찌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시편41,10)
"원수가 저를 모욕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참았을 것입니다. 저를 미워하는 자가 제 위에서 거드름을 피운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그를 피해 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 내 동배 내 벗이며 내 동무인 너. 정답게 어울리던 우리 하느님의 집에서 떠들썩한 군중 속을 함께 거닐던 우리." (시편55,13~15)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6,3~4)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사랑으로 다윗에게 다시 맹세하게 하였다." (1사무20,17
<서약>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혼인과 이혼에 관한 대원칙’으로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혼인’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일입니다.
‘이혼’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그 일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갈라놓는 일입니다.
“혼인이 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일인가?”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고,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도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일이라고 설명하십니다(마르 10,6-8).
이 설명은, “혼인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속하는 일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가 되는 일도,
그리고 부부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나는 일도 모두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속하는 일이고, 그 사업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자기들의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결정한 일로 보여도,
그 일은 하느님의 섭리와 하느님의 의지가 작용한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왜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되는가?”
혼인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지키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혼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 됩니다.
인간에게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깨뜨릴 권한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을,
“하느님 앞에서 서약한 것을 사람이 마음대로 깨면 안 된다.”
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혼인 서약은 하느님 앞에서 부부가 서로에게 하는 서약입니다.
하느님은 그 서약을 주관하시는 분이고, 보증하시는 분이고,
서약을 유효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사람은 마음대로 그 서약을 깰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을,
“하느님께 한 서약을 사람이 마음대로 깨면 안 된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혼인 서약은 하느님 앞에서 부부가 서로에게 하는 서약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이 부부로 살겠다고
부부가 함께 하느님께 하는 서약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허락 없이 사람이 마음대로 깰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서약을 깨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혼함으로써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를
‘혼인 조당’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죄는 모두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데,
왜 혼인 조당의 경우에는 고해성사로 해결할 수 없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조당은 죄가 지속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든지 간에, 누구든지,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데,
참으로 회개한다면, 그리고 참으로 용서받기를 바란다면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만일에 어떤 죄를 짓는 일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회개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고, 용서를 청할 수 없습니다.
(고해성사를 본다고 해도 ‘모고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11-12).”
조당은 간음죄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고해성사로 해결할 수는 없고, 먼저 조당을 푸는 절차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어떻게든 조당을 푸는 방법을 찾아 줍니다.
조당에 걸렸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영구적으로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내를(남편을) 버리고 다른 여자(남자)와 혼인하면’이라고 하셨으니,
이혼했더라도 다른 사람과 재혼하지 않으면 조당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재혼하지 않으면 조당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이혼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혼은 그냥 ‘별거 상태’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이혼한 사람과 이혼당한 사람을 구분해서 생각하면,
잘못한 일 없이 이혼을 당한 사람의 경우에,
이혼 당한 것도 억울한데 신앙생활까지 막는다면 더욱 억울한 일이 될 것이고,
그것은 대단히 부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 경우에도 재혼하지 않았다면 조당은 아닌 것이고,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문제를 넓게 생각해서
‘서약’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의 서약과 신품성사를 받을 때의 서약도
사람이 마음대로 깨면 안 되는 서약입니다.
죽을 때까지 지키겠다는 혼인 서약과 마찬가지로
세례성사 서약과 신품성사 서약도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서약입니다.
여기서 ‘죽을 때까지’ 라는 말은,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을, ‘죽음을 각오하고’로도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내가 이 서약을 지키지 못한다면(깬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 라는 각오.
박해 시대처럼 실제로 목숨을 바칠 기회는 없더라도,
우리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고해성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서에 있는 고해성사 양식을 보면, “...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라는 말이 들어 있는데, 이 말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할 일종의 서약입니다.
(실제로 고해성사를 볼 때 이 말이 생략되더라도,
고해성사를 보는 행위 자체에,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과
다시는 죄짓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서약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신앙인은, 너무 쉽게 약속하고 너무 쉽게 그 약속을 깨는
세속 사람들의 모습에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한 서약은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람들에게 한 약속도, 공동체에게 한 약속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맡은 직무를 자기 마음대로 그만두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그런 무책임한 행동 같은 경우, 그것도 서약을 깨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을 공유하고, 자신보다 상대를 더 많이 생각하고 보살핍니다. 사랑은 두 인격이 서로를 향한 온전한 헌신을 통해 서로를 결합시키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이혼장만 써 주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부당한 관습에 대하여 제동을 거시면서 혼인에 대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혼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필요에 의해 결합되고 헤어지는 흔한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악과 불륜을 저질러도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인간의 구원과 해방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혼인을 통해서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사랑의 영이신 성령께서 살아 계시고, 두 사람을 혼인의 유대로 결합시켜 주시는 분도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혼인은 하느님과 인류가 맺은 계약이 파기되지 않듯이, 사랑하는 남녀가 하느님이 맺어 주신 은총으로 ‘둘이 한 몸’이 되어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어쩔 수 없이 갈라져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을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류와 맺으신 계약에 대한 신뢰를 지키시듯이, 혼인 역시 서로 부족한 인간끼리 사랑하며 성숙해져 가는 과정임을 분명히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성숙한 부부는 욕망이 아니라, 우정과 신뢰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라는 집회서의 말씀대로, 내 인생의 반려자가 나의 든든한 피난처가 되어 어떠한 경우에도 혼인 서약을 끝까지 지켜 주는 성실한 친구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보물을 얻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곁에 나는 참된 보물을 두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