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제5주간월요일]구원 (마르코 6,53-56)
한처음에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빛과 어둠, 하늘과 땅과 바다, 풀과 나무,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다(제1독서 창세기의 시작 1,1-19)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1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15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6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하늘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18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이르시자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간청하는데,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는다. (마르코 복음 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연중제5주간월요일 제1독서 (창세1,1-19)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1~2)
'한 처음에'로 번역된 '뻬레쉬트'(bereshith)는 천지 창조의 시점, 곧 하느님께서 우주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無)에서 유(有)로 동시에 섬광처럼 생겨나게 하신 원천적 창조 사건이 일어난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뻬레쉬트'(bereshith)는 '뻬'(be)와 '레쉬트'(reshith)의 합성어이다. 먼저 '뻬'(be)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reshith)는 '근원'(창세2,10), '머리'(창세3,15), '꼭대기'(1열왕18,42)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rosh)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창세10,10), '근본'(시편111,10), '으뜸', '우두머리'(욥기40,19) 등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뻬'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뻬레쉬트'는 직역하면 매우 단순하게 '시초에', '한 처음에'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뻬레쉬트'가 말하는 '시초'(처음)는 시간이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원점, 곧 시간(時間; the time)의 출발점을 의미한다. 결국 '뻬레쉬트'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바로 그때에' (In the beginning)라는 뜻이다. 즉 인간 역사(歷史)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이처럼 천지 창조는 다름아닌 모든 우주 만물의 존재와 그들 사이에 발생할 모든 사건의 기원을 이루는 원초적 사건이다. 이런 천지 창조의 시점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뻬레쉬트'는 천지 창조 사건이 일어났던 '때'가 시간 자체도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기원', 곧 '시간의 원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실로 천지 창조는 시간 자체도 이제 막 시작한 때에 바로 그와 동시에 섬광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만유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계시는 그리고 만유를 뛰어넘어 계시는 유일한 절대 자존자(自存者)요, 초월자(超越者)이시다. 이러한 하느님께서는 공간 뿐 아니라 시간도 초월하여 계신다(시편90,4). 반면에, 우리 인생을 포함한 우주 만물은 오직 공간(空間; the space)안에서 시간(時間; the time)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즉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은 시공에 얽매인 차원(dimension)에 존재하지만, 이 우주 만물 각각은 물론 이 모든 것들의 존재 양식인 시간과 공간까지 지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이곳으로부터 완전 초월하여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에 얽매여 있는 인생을 포함한 피조물과의 관계만 아니라면 하느님께 시간은 의미가 없다.
심지어 하느님 자신의 실존에만 국한해서 볼 때에는 천지 창조 이전과 이후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는 시간으로부터 완전 초월하여 시간과는 무관하게 영원히 계시는 분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천지 만물은 오직 시간의 시작과 함께, 곧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다. 또한 역으로 말해도, 시간도 오직 그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만 그 존재 양상이 전개되어 가는 만물들의 존재와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무(無)로부터 유(有)로의 천지 창조(creatio ex nihilo)는 시간의 시작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시간 또한 천지 만물이 창조되는 순간 필연적으로 함께 창조되었고, 또한 그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우리는 '한 처음에'로 번역된 창세기 1장 1절의 '뻬레쉬트'를 새 성경에서 그 역시 '한 처음에'로 번역된 요한 복음 1장 1절의 '엔 아르케'(en arche)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뻬레쉬트'는 하느님의 천지 창조로 이제 막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던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키고, 반면에 '엔 아르케'는 시간이 아예 흐르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뻬레쉬트'가 무로부터 유가 시작되어 시간이 출발했던 영원과 시간의 접촉점만을 가리킨다면, '엔 아르케'는 근본적으로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차원 전반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
이 구절은 앞서 '한 처음에'란 창조 시점에 제시된 것에 이어서 이제 천지 창조의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앞서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데 이어서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힌다.
여기 '하느님'에 해당하는 원어 '엘로힘'(ellohim)은 제1위 성부 하느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을 경우에는 모두 다 '하느님'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권세있다', '힘세다'라는 뜻을 가진 '울'(ul)에서 유래한 것 (2열왕24,13; 시편73,4)으로서 '권세있고 힘있는 뛰어난 분'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elloah)의 복수형이다(탈출12,12; 신명32,15). 하느님의 이름이 복수형으로 되어있는 것은 그 가리키는 대상이 분명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복수형으로 표기함으로써, 그 대상의 권위와 중요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고대 근동 전반의 수사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태초의 천지 창조는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만물의 존재 자체, 그리고 그들이 서로 얽혀서 빚어내는 모든 역사의 유일한 원초적 기원이다. 따라서 결국 천지 창조의 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만물과 역사의 궁극적 기원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의 기원이시다. 만물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욥기1,21; 시편90,3; 코헬렛12,7; 로마11,36).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우리 인생의 궁극적 관심일 수밖에 없다.
또한 천지 창조 기사 전체가 오직 하느님만이 온 천지를 모두 다 직접 창조하셨음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전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 우주의, 특히 전 우주의 대리 통치자인 우리 인간들 (창세1,26)의 하느님께 대한 복종과 경배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한 주체가 어떤 사물을 만들거나 사거나 이를 소유함에 있어서 그 주체 자신이 요구되는 의무를 다하는 것은 그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갖게되는 완전하고도 정당한 법적 근거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천지 창조 기사는 거듭해서 전 우주가 스스로 생겨났거나 다른 그 무엇에 의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엘로힘 하느님'에 의해서 지어진 것임을 그토록 강조한다. 즉 이것은 전 우주와 인생에 대한 하느님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소유권(탈출18,5; 신명10,14; 에제18,4)과 통치권 (탈출15,18; 시편72,8; 다니엘5,21) 사상은 성경 전체에서 나타난다.
'하늘과 땅을'
본문은 창조의 시점, 곧 언제 천지 창조가 있었는지를 밝힌 '한 처음에'와 창조의 주체, 곧 누가 천지를 창조하였는지를 밝힌 '하느님께서'에 이어서 이제 창조의 대상(對象), 곧 무엇이 창조되었는지를 밝히는 구절이다.
원문은 '에트 핫샤마임 웨에트 하아레츠'(eth hashamaim weeth haarets; the heaven and the earth)이다.
우리말의 '~을'(를)에 해당하는 것으로 직접 목적어임을 표시하는 대격 전치사 '에트'(eth)와 '그 하늘을'이란 뜻의 '핫샤마임'(hashamaim), 또 '그리고'(과)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we)와 '에트'(eth)가 결합된 '웨에트'(weeth), 끝으로 '그 땅'이란 의미의 '하아레츠'(haarets)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현대 천문학이 말하는 지구의 대기권 및 그 너머에 무한히 팽창하는 공간으로서의 우주에 대해 과학적 개념이 없었다.
그 대신에 하늘에 새들이 날아다니는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거대한 금속판인 소위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리고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느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머물고 있는 셋째 하늘 등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 420여회 나오는 하늘은 모두 다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또한 여기서 '땅'을 말하는 '아레츠'(arets)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를 가리킬 뿐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성경에는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시편113,3),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2사무17,11) 등과 같이 양극단을 함께 말함으로써, 그 안에 있는 것이 모두 다 포함됨을 강조하는 용례가 많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그 하늘들과 그리고 그 땅을'이라는 원어의 표현은 비단 하늘과 땅 뿐만 아니라 가없는 양자 사이의 공간 자체는 물론 그 안의 모든 물질들, 곧 하늘에서부터 땅 끝까지의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창조의 대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하셨다'
'창조하셨다'의 원어는 '빠라'(bara)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이 단어는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끝으로 '먹다'(eat), '양육하다'(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빠라'(bara)가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느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느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 (신명4,32; 시편89,12; 이사43,1; 예레31,22).
한마디로 '빠라'(bara)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롭게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이같은 절대적 창조 행위는 오직 만물을 초월(超越)하여 자존(自存)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오직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하여, 즉 과거와의 연속 안에서만 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빠라'(bara)는 실제로 '만들다', '지어내다'의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때에는 오직 '하느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등장하며,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만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셨다', 곧 '빠라'(bara)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섬광처럼 존재하게 하신 하느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 6,53-55).”
여기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말은,
병을 잘 고치는 분이라고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보았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바란 것은 ‘병의 치유’뿐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머리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0-11).”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하고,
궁극적인 구원을 주시는 구세주라는 것을 안 믿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본 것이 아닙니다.
또 ‘육체의 치유’만 원하고, ‘영혼의 구원’을 원하지 않는다면,
즉 예수님께 병의 치료만 청하고 영혼의 구원은 청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청하지 않고, 덜 중요한 것만 청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를 가장 크게 괴롭히는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청하는 것 자체가
잘못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에 몸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영혼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몸의 건강과 미용만 신경 쓰고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는 일이 됩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는 말은,
사람들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심정과 같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5,27-28).”
이 ‘간절한 심정’은 병고의 괴로움이 그만큼 크다는 것도 나타냅니다.
여기서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손을 댄 사람마다 병이 나았다.” 라는 뜻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을,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병을 고쳤다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고치셨습니다.
만일에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면,
즉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믿는다면,
그 믿음은 미신이 되어버립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당신께 청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 점입니다.
편애도 없고, 차별대우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또 병자의 믿음이나 과거나 영혼의 깨끗함이나 자격 같은 것을 보시지 않고,
그 사람의 딱한 처지만 보셨습니다.
(“너는 죄를 많이 지었으니까 안 된다.” 같은 거절을 하시지 않았다는 것.)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 사상에 물든 자들은 자격을 따져서 사람들을 분류합니다.
각 개인의 처지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전체를 위해서 무엇이 더 유리한지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수를 위해서 소수를 희생시킬 때가 많은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또, 병을 고친다고 해도 실익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병자의 경우에는
치료를 안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하루밖에 못살더라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이익을 따지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시작하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고, 끝내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판단해서 끝내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다음에
병자들이나 그 가족들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셨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자비’는 원래 무조건, 무제한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으라는 요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병자의 고통만 보셨고, 병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만 생각하셨습니다.
건강해진 다음에 그 병자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 자신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강조하신 때가 가끔 있었지만, 그것은 구원에 관해서이고,
병을 고쳐 주실 때에는 병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고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의 경우가 좋은 예인데,
그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그래서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딱한 처지만 보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요한 5,5-9).
또 병을 고쳐 주신 다음에도 그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요한 5,14).
(만일에 신앙인들에게만, 또는 신앙인들끼리만 사랑과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자비도 아니고,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