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간 화요일] “탈리타 쿰!” (마르코 5,21-43)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고 한다. (히브리 12,1-4)
형제 여러분, 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하혈하는 여자를 고쳐 주시고,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씀으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 내신다. (마르코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연중4주간화요일 제1독서(히브12,1-4)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1)
히브리서 12장 1~3절은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인내하며 달리는 신앙의 경주에 대해 말하고, 12장 4~13절은 훈육의 의의와 유익 그리고 훈육받는 성도의 분발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본문을 좀 더 정확하게 직역하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렇게 많은 증인들의 구름을 가지고 있다'가 된다.
신약의 성도들은 시련가운데서 믿음의 경주를 하지만, 수천 수만의 옛 선조들로 이루어진 관중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 성경을 통해 이미 따라야 할 신앙의 모범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며, 또한 천국에서 응원하고 격려해 주는 후원자들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본문에서 '이렇게 많은'으로 번역된 '토수톤'(tosuton)은 '이렇게 많은', '큰'을 뜻하며 '구름처럼'으로 번역된 '네포스'(nephos)를 수식한다. 새 성경에서 부사적 의미로 번역된 '네포스'는 명사 목적격 단수로서 '구름을'이라는 의미이다.
'네포스'는 단 하나의 구름을 의미하는 '네펠레'(nephelle)와 달리 온 하늘을 빽빽하게 가리우는 구름(밀운)을 가리킨다.
'증인들의 구름'은 경주가 펼쳐지고 있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스탠드를 가득 메우고 있는 꽉 들어찬 관중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며, 그들은 신앙의 경주를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고 있다.
여기서 '증인들'로 번역된 '마르튀론'(martyron)은 원형 '마르튀스'(martys)의 소유격 복수이며, '마르튀스'는 '증거', '증인' 그리고 '순교', '순교자'라는 뜻을 나타낸다. '순교',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martyr'가 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순교자'란 죽음을 무릅쓰고 증거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마르튀스'(martys)가 전달하는 '증인'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물론이고 오늘의 세상에서도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증인들은 종종 고통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어두운 세상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미워하게 마련인데, 그것은 성도들이 바로 그 빛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요한15,18~20). 따라서 세상은 성도들을 대적하는 것이고, 그 증거를 히브리서 11장 34~37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의 옛 선조들이 당한 세상의 핍박과 환난을 생각하면서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서 싸움에 임해야 한다. 그들이 참아낸 것은 우리도 참아낼 수 있고, 그들이 극복한 문제들을 우리들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들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이 달리고 있는 경기장의 관중석에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주며, 이미 자신들이 경주한 그 코스를 달리고 있는 우리를 향해 격려와 조언, 응원을 보내주는 수많은 증인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경기장에서 경주를 하는 선수들이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듯이 신앙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도 신앙 생활에 방해되고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벗어버려야 할 것을 권면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벗어 버리고'로 번역된 '아포테메노이'(apothemenoi)의 원형 '아포티테미'(apotithemi)는 분리, 이탈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포'(apo)와 '두다', '놓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 '티테미'(tithemi)의 합성어로서 '낡은 옷을 벗어버리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포테메노이'는 요청적 명령을 나타내는 분사형이므로, 이것은 '벗어버리자', '던져 버리자'등의 의미를 지닌다. 고대 그리스 지역에서는 운동 경기가 매우 성행하였고,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경주자들은 옷을 다 벗고 달렸다.
오늘날 학교 체육관을 의미하는 단어 'gymnasium'은 원래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운동 선수들의 옷을 다 벗은 모습을 나타냈던 단어 '귐노스'(gymnos)에서 유래하였다. 그래서 당시 경기장에는 여자들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아무튼 남보다 더 빠르려면 입는 옷의 무게를 가능한 줄여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한편 벗어버려야 할 것이 본절에서 두 가지로 지적되고 있다.
첫째는 '온갖 짐'이다.
'짐'으로 번역된 '옹콘'(ongkon)의 원형 '옹코스'(ongkos)는 '짐', '방해물', '부피가 있는 덩어리', '무거운 것'등을 뜻한다. 짊어지고 있는 짐이 많을수록 빨리 달리기란 더 어렵다. 앞을 막는 장애물이 많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신앙 경주를 잘하고자 하는 성도는 모든 방해 요소를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옹코스'(ongkos)를 경주자가 몸에 걸치면 배의 돛처럼 바람을 끌어 모아 속력을 내는 데 지장을 줄 뿐 아니라 경주자를 쉽게 지치도록 만드는 겉옷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경주자의 지나치게 많이 나가는 체중으로 보기도 한다.
어쨋든 신앙의 경주를 하는 성도가 빨리 벗어버려야 할 '옹코스'에는 의심이라든지, 교만, 나태 등이 포함된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신실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전진하고 진보하는 신앙인이 될 수 없다. 또한 교만의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말씀을 통해 이루어야 할 성화(聖化; sanctification)를 이루지 못한다.
또한 나태의 장애물을 치워버리지 못하는 자들은 그 신앙의 활력을 잃게 되며 침체에 빠지고 결국 퇴보하게 된다. 신앙의 경주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히 제거해 버리는 결단이 필요하다. 썩어가는 부위나 암세포를 제거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것처럼, 신앙의 달리기를 방해하는 요소들은 단호히 제거하지 않으면 얼마가지 않아 주저앉을 수 밖에 없다(마태5,29.30).
둘째는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이다.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으로 번역된 '유페리스타톤'(euperistaton)은 '잘', '좋게'를 뜻하는 부사 '유'(eu)와 '주위에 놓다'를 뜻하는 동사 '페리이스테미'(periist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쉽사리 함정에 빠뜨리는', '유혹하는'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란 '쉽사리 함정에 빠뜨리는 죄'를 말한다.
그리고 본절의 '죄'로 번역된 '하마르티안'(hamartian)은 '죄'로 일컬어지는 일체의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쉽사리 함정에 빠뜨리는 것'으로 한정된다. 형용사인 '유페리스타톤'이 관사 '텐'(ten)을 취하여 한정적인 용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죄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형태의 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이 죄를 '불신앙'으로 보기도 한다. 믿음의 반대인 불신앙은 신속하게 우리의 발을 휘감는 것이 사실이다. 신학적으로도 이것이 모든 죄의 기초이다(요한16,2~9).
밤중에 밀림에서 모닥불 주위를 배회하는 야수의 무리가 경계심을 늦추고 있는 사람에게 달려들려 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알아들을 수 있겠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이 죄가 항상 우리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와같은 것들은 지체없이 벗어버려야 한다. 의심이라든지 교만, 게으름 같은 장애물들 신속히 벗어버리고, 불신앙의 요소들을 부단히 경계하여 우리의 발목을 못잡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복음(마르5,21~43)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27~28)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하늘의 수인 '3'과 땅의 수인 '4'를 곱한 수로서 완전을 상징한다.
마르코 복음 5장 25절에서 여자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혈루증)을 앓았다는 것은 그 여자가 길고 긴 세월 동안 고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동시에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고칠 수 없었던 여자의 병을 자신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게 하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강조하는 역할도 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잘못된 진단과 비과학적인 진료, 또한 터무니없는 비싼 치료비의 요구 등으로 말미암아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고통을 주는 경우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 5장 26절에서 여자의 지병이 완전히 인간적 치유의 불능 상태에 빠져 있음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드러내고 있다.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여기서 여자가 예수님 뒤로 올 수 밖에 었없던 이유는, 당시 사회적 관습에 의해 여자가 남자에게, 더구나 남자의 신체를 접촉하기 위해 접근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고, 정결법상 부정한 것으로 여겨진 하혈병을 앓는 여자는 대중 앞에 나와서는 안되었으며,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절대로 안되었다(레위15,19~27).
따라서 하혈병을 앓는 여자는 자신의 신분과 상태를 숨기기 위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이용한 것이다.
하혈병을 앓는 여자는 자신이 받는 종교 율법적이고 사회적인 제약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게 오히려 군중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뒤로 몰래 접근했다.
육체적, 종교 율법적, 사회적, 경제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구원의 희망이 전혀 없는 극한적 상황에 있었던 그 여자는 그 누구로부터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외된 처지에 있었지만, 스스로는 사람들을 민감하게 의식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마태오와 루카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사용한 '옷'이라고 번역된 '히마티온'(himation; garment; cloak)이라는 표현에 '투 크라스페두'(tou kraspedu)라는 표현을 부가해서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다(마태9,20; 루카8,44). 한글 새 성경에서 마태오나 루카는 '옷자락 술'(the fringe of His cloak)이라고 번역했다.
또한 '대었다'에 해당하는 '헵사토'(hepsato; and touched)는 부정 과거형이므로,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계속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단 한 번만 스치듯이 옷자락 술을 만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여자의 하혈병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기 때문이 아니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수 있다는(마르5,28) 여자의 믿음과 그 여자를 불쌍하게 여기신 예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고쳐졌다고 할 수 있다(마르5,34).
마르코 복음 3장 9~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병이 낫기 위해 당신을 만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들을 피해 말씀을 전하기 위해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하신다.
이처럼 수많은 병자들이 단순히 자신의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만지려고 했지만, 마르코 복음 5장 3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의 옷자락 술을 만진 자'를 찾으신다.
따라서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은 여자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이라도 만져도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간절하고도 굳은 신뢰와,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자(구세주)라는 신실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사도5,15; 19,12참조).
반영억라파엘 신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1월 31일의 복음 말씀은 마르코복음 5장 21절-43절,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인데,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생살여탈권을 가지신 분”
이라는 것을 말하는 이야기이고,
하혈하는 여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그분의 옷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낫는 놀라운 권능을 가지신 분”
이라는 것을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마르 5,27-29).”
여자가 사람들 모르게 행동한 것은
자기의 병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라는 여자의 생각은,
예수님은 무슨 병이든 다 고칠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음을 나타내고,
다른 의사들과 같은 방식의 치료가 아니라
‘기적’으로 병을 고치는 분이라고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옷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없이
어떤 성물을 사용해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그런 기대감으로 성물을 사용하는 것은
미신과 다르지 않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사도행전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사도 19,11-12).”
바오로 사도가 사용한 수건이나 앞치마를 대기만 해도
병이 낫고, 마귀들이 쫓겨났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 수건과 앞치마에 기적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면,
또는 바오로 사도가 일으킨 기적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그 기적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수건이나 앞치마가 아니라, 또 바오로 사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0-34)”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라고 물으신 것과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신 것은,
여자가 스스로 나와서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에게서 기적의 힘이 빠져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 기적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권능으로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랬는지 모르신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여자를 알고 계셨고, 그 여자를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여기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 입장에서 그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도 아니고,
예수님과 상관없이 여자의 믿음이 여자를 구원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여자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여자는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믿었다.”로 이해해야 합니다.
(구원의 주체를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마태오복음 17장 20절에 있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느님은 못하실 일이 하나도 없는 분이라는 것을
제발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믿어라.” 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5-36)”
사람들이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기적을 일으키시긴 해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은 일으키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절망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믿기만 하여라.” 라는 말씀에는
“내가 너의 딸을 살려주겠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습니다.
바로 그 권한과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권한이란 어떤 일을 하거나 안 할 권한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도 예수님의 권한이고, 살리지 않는 것도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도 예수님의 권한이고,
우리를 영원히 멸망시키는 것도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그래서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자비’에 대한 믿음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요구’가 아니라 ‘간청’입니다.
자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제대로 간청하게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