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주간 금요일] 겨자씨 한 알 (마르코 4,26-34)

2017. 1. 27. 오전 6: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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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3주간 금요일] 겨자씨 한 알  (마르코 4,26-34)


히브리서의 저자는, 많은 싸움을 견디어 냈으니 확신을 버리지 말라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다고 한다. (히브리 10,32-39)
형제 여러분, 32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33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34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5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 36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39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땅에 뿌릴 때에는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커져 새들이 깃들이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신다. (마르코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어려움이 올 때 떠오르는 것 (히브리서 10장 32절 ~ 39절)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 기자가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지켜 구원의 길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말은 조소와 고초를 당함으로 공개적인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비방은 거짓으로 고소하여 비난하는 것이고, 환난은 폭력과 함께 오는 박해를 말한다고 합니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과거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폭력을 당하기도 하며 공개적으로 조롱거리가 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소유를 빼앗기던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폭도들에게 재산 조차 빼앗기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기쁨으로 감당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더 낫고 영구한 소유, 즉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주님으로부터 받을 큰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은 지상에서 빼앗겼던 소유보다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것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적 표현으로 하면 ‘더 나은 본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약속을 기억했기 때문에 비방과 재난을 당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라는 말은 그런 어려움을 당한 자들과 동료가 되고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과 함께 아파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투옥된 자는 누군가 밖에서 돕지 않으면 굶어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재산도 빼앗긴 신자들을 같은 신자들이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돕는 것은 감옥에 갇힌 자와 동일한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투옥된 자들을 돌봄으로 감옥에 갇힌 자들의 고난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일을 의인의 행위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 말입니다.


히브리 공동체에는 고난과 아픔과 그리고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지는 비방과 환난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아픔을 수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개적인 처형으로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모은 재산마저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 큰 시련이 그 공동체 앞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배교에 대한 미혹입니다. 그것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그 신앙만 포기하면 예전처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만 버리면 그런 수모 없이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환영 받고 있지는 않았지만 유대교는 그 사회에서 묵인되고 있었습니다. 하필 왜 그리스도교냐는 것입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왜 십자가에서 저주 받고 죽은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렇게 핍박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히브리 기자가 그들에게 제시해준 대안은 인내와 믿음이었습니다. 약속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도 없었고 그 약속을 바라며 견디는 인내도 없었습니다. 어려움이 올 때마다 그들은 애굽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행동들이었습니다. 급기야 고라를 위시해 반역이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진노하셨던지 하나님은 그 일당을 모조리 땅속으로 쓸어 버렸습니다. 조그만 고통을 인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그들은 그만 구원까지 잃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애굽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조상 노아 할아버지를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매일같이 햇볕이 나오는데도 구슬 땀을 흘리며 무려 120년 동안이나 방주를 지었던 위대한 조상을 말입니다. 그 분의 인내를 그들은 본 받아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가기 위해서는 광야 길을 가야 합니다. 그곳은 먹을 것도, 볼 것도 그리고 즐길 것도 없는 메마른 곳입니다.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가 있고 도대체 매력이라곤 별로 없는 험악한 땅입니다. 하지만 애굽은 푸른 들판과 강이 흐르는 땅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즐길 것이 풍부한 곳입니다. 비교하면 할수록 이스라엘은 손해 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묵상하면 할수록 아니다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가려면 애굽을 나와야 하고 광야 길을 가야 합니다.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돌아가면 안 됩니다. 다시는 출애굽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영 가나안은 꿈도 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할 일은 참으며 전진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도 그 길로 봅니다. 믿음과 인내가 필요한 길입니다. 그리고 돌아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과거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입니다. 과거가 아무리 좋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과거로 돌아 갈 수 없습니다. 현재를 살고 있고 미래를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전차 경기장의 구경거리로 맹수의 먹이도 되기도 했습니다. 투옥과 고문과 심지어 목 베임까지 당했습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현재를 견뎠습니다. 영광된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옛날로 돌아 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 때가 좋았다고 하더라도, 애틋한 향수가 있더라도 돌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영광된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우리의 모습, 완성될 구원, 하느님 나라가 곧 우리 앞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광된 그 날을 위하여 오늘을 참고 견디어 마침내 승리하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미래에 완성될 우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마음에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했습니다.  

그 고백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고백일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연중 3주간 금요일복음(마르4,26~34)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6~27) 

마르코 복음 4장 26~29절'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말씀이다. 이 비유 말씀을 마르코 복음 4장 2~20절'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과 비교해 보면, 두 가지의 차이점이 있다.

첫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짐을 강조하고 있다면,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복음 또는 하느님 나라가 지니는 역동성과 은밀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나 하느님을 상징했지만,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는 인간 자체, 특히 복음 전파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비유가 공통점도 있다. 본문에 나오는 '씨'마르코 복음 4장 3절의 '씨'말씀을 상징한다는 점이고, 두 비유가 모두 하느님 나라를 소재로 한다는 점이다.

한편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마르코 복음에만 나오는 특수 자료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비유는 이미 소개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4,2~20)와 중복됨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강조점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심화,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강조점사람의 마음 또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의미하는 '밭'에 있다. 그래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과는 달리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따라서 좋은 땅, 곧 밭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러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에서 이러한 밭의 중요성이나 심지어 농사짓는 농부의 중요성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씨앗이 발아하여 싹이 나고, 자라고, 이삭이 나오고 열매를 맺는 전 과정에서 오로지 강조되는 것이 '씨앗의 생명력'이다.

여기서 농부는 이러한 전 생장의 과정에 대해 전혀 무지한 자로 부각된다. 그리고 '저절로', '스스로' 익은 열매에 대해 추수의 은혜와 감격만을 누릴 뿐이다. 

끝으로, 열매를 맺기 위한 중요한 변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는 '사람의 마음 내지는 영혼의 상태'였다면, 반면에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씨앗 자체'라는 점이다.

따라서 열매를 맺고 하느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해서는 그 씨앗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이 계셔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마르코 복음 4장 27절에서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시간이 흘러가는 데 따라'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하루가 아침에 시작해서 밤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질 무렵에 시작되어 다음 날 해질 무렵에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묘사하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창세1,5)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27절'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는 말씀은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알지 못한다'고 번역하면 좋다.

'알지'에 해당하는 '오이덴'(oiden; know)의 원형 '오이다'(oida)는 완료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알다', '감지하다'등의 의미를 가지며, 시제는 완료이나 알고 있는 시점은 현재이다. 부정어 '오크'(ouk; not)과 더불어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밭에 뿌려진 씨앗이 자라는 과정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씨를 직접 뿌린 농부가 알지 못하는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씨앗을 자라게 하는 생명력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또는 어떻게 발생하는지 지식적으로 알거나 감각적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답은 마르코 복음 4장 28절 전반절이 말하는 '저절로', '스스로'이다. 따라서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씨를 뿌리고 난 뒤에 그 씨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잘 자라기를 바라며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그 시작과 과정, 그리고 완성에 있어서 인간이 정확히 알지 못하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에 따라 점진적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씨 뿌리는 농부로 대표되는 인간은 하느님 나라를 자라게 하는 힘이나 그 나라가 완성되는 때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식물이 끊임없이 자라난다는 것만큼 확실한 사실은 없으며, 또한 추수의 시기가 도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농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처럼 믿는 이들 역시,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완성에 대해 본질적으로 주도적인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그 기대와 확신의 끈을 놓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우리에게 미소하게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께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받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영양분으로 그 씨앗을 키우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자라고 커지게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므로 우리는 그 성장의 과정을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씨앗이 자라고 열매 맺고 추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은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맺게 계획되어 있으므로 그분께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싶고 좋은 일을 하고 싶을 때, 우리 안에 말씀의 씨앗이 자라는 것이고 하느님의 나라가 좀 더 가까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과 실천들이 일상 속에 쌓여서 점점 커지면 신앙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숨겨져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잘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날마다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의 믿음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걱정거리와 가정에 주어지는 십자가들이 더 크게 보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씨앗이 큰 나무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때 수확의 시기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사랑하는 시간들을 보낼 때 은총과 생명의 상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간들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으로 변할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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