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간 목요일] 마리아의 노래 (루카 1,46-56)

2016. 12. 22. 오전 9:02:46

글자

[대림 제4주간 목요일] 마리아의 노래 (루카 1,46-56)
 2016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간 목요일 / 마리아의 노래


사무엘이 젖을 떼자 한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예물을 마련하여 주님의 집으로 가서 엘리를 만나 주님께 바친 아이라며 예배를 드린다.(사무엘상 1,24-28)
그 무렵 사무엘이 24 젖을 떼자 한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올라갔다. 그는 삼 년 된 황소 한 마리에 밀가루 한 에파와 포도주를 채운 가죽 부대 하나를 싣고,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25 사람들은 황소를 잡은 뒤 아이를 엘리에게 데리고 갔다.
26 한나가 엘리에게 말하였다. “나리! 나리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 틀림없듯이, 제가 여기 나리 앞에 서서 주님께 기도하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27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28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렸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며 주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르고 석 달가량 함께 지내다 집으로 돌아간다.(루카 1,46-56)
그때에 46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대림 제4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46-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1~53)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53절까지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속성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루카 복음 1장 51절'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29,14). 

이 단어가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strength; mighty deeds)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위에','~을 넘어서', '~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나타나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루카 복음 1장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미치지만, 반면에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루카 복음 1장 51절'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1장 52절'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라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떠올리게 하는 부분으로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통치자들' '비천한 이들','끌어내리시고''들어 높이셨으며'라는 단어들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루카 복음 1장 52절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mighty; rulers)'주권자','통치자' 등을 의미하는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통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왕좌'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ier thrones)은 그 통치자들이 앉는 '권좌들', '보좌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을 얼마든지 그 권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낮은 지위의', '천한', '겸손한'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이들'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그 모든 것들이 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카 복음 1장 53절에서도 52절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이들''부유한 자들', '좋은 것''빈손', '배불리시고''내치셨습니다'라는 단어들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굶주린 이들' '부유한 자들'은 복수형으로 일차적으로 경제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보면 부자들은 그들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등과 같은 산상설교의 표현처럼, 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자들 교만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아가톤'(agathon)'선한', '적합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로서,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로 번역된 '에네플레센'(eneplesen; He has filled)'채우다', '만족하다'의미를 가진 '엠피플레미'(empiplemi)가 원형인데, 이 단어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로서 부족함이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빈손으로'라고 번역된 '케누스'(kenus; empty away)'빈', '헛된', '내용이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좋은 것으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케누스'(kenus)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엄중함을 부각시켜 주며,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심판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교만한 자라면 얼마든지 '텅 빈' 가난뱅이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와 대조를 이루는 '내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엑사페르테일' (eksapesteilen; he has sent)'밖으로'란 뜻의 '에크'(ek)'내보내다'란 의미를 가진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 하지 않는'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는 자들을 빈 손으로 멀리 내보내시어 가까이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2016년 다해 대림 제4주간 목요일 - 노력하라

<마리아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자 하느님을 찬양하는 찬미가이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선포하는 ‘복음 선포’이면서
동시에 그 구원 사업에 동참하라는 ‘초대’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ㄴ-48ㄱ).”


여기서 ‘구원자 하느님’이라는 말은,
하느님은 원래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마리아만의 구원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구원자입니다.
여기서는 ‘나의 구원자’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이라는 말은 겉으로는 마리아 자신의 처지를 가리키는 말인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죄와 죽음 속에 갇혀서 구원받기를 갈망하고 있는
인류 전체의 처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선택하신 일은 마리아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인류 구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신 일이고, 인류 전체를 위한 일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기쁨은 우리 모두의 기쁨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 1,50).”


여기서 ‘그분의 자비’ 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즉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들이 하느님과 무슨 협상 같은 것을 벌여서 얻어낸 일도 아니고,
무슨 공로나 업적을 쌓아서 이루어진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대대로’는 ‘영원히’ 라는 뜻인데,
하느님의 자비는 일시적이거나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자비를 받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를 받게 되는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자비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무상으로 베풀어 주시지만,
모든 사람이 그 자비를 똑같이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신다고 무조건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 잘 받아야 합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믿고 섬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행해야 합니다(마태 7,21).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으로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자비’란 무조건, 무상으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천 없이 형식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루카 1,52ㄴ-53ㄱ)”


이 구절은 ‘복음 선포’ 라고 부를 수도 있는 구절인데,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선포하신 복음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ㄷ-19).”
‘마리아의 노래’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표현의 차이는 조금 있지만,
사실상 같은 선포입니다.
지금은 꼴찌인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다는 것(루카 13,30).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굶주리는 이들이 배부르게 되고,
비천한 이들이 존귀하게 되고, 갇혀 있는 이들이 해방되고...
이 일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구원’입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루카 1,52ㄱ)”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3ㄴ).”


이 구절들은 ‘심판 선포’ 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첫째인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꼴찌가 된다는 것.
그런데 이것을 계급투쟁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또는 통치자와 피지배자로 편을 가르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고백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루카 14,11).
‘마리아의 노래’에 나오는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은
바로 그렇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이고, 메시아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마리아의 노래’에 나오는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사람들이고,
메시아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희망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속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노래’를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권력과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착하는 사람은
메시아의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생이라는 그릇을 세속의 재산과 권력으로 가득 채운 사람은
그 그릇에 구원의 은총을 담을 공간이 없어서 받지 못합니다.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릇을 깨끗이 비워서 빈 그릇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권력도 재산도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서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처럼 되기를 바라고,
그래서 권력과 재산만 추구하면서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역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빈 그릇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기가 그 그릇에 무엇을 담기를 바라고 있는지를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단, 구원 받기를 바라고,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만.


송영진 모세 신부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매일미사, 루카 1,46-56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노래’로서 우리가 자주 바치는 기도입니다.

이 노래를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머무르고 싶은 점은,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라고 마리아가 고백한 대목입니다.

이는 주님께 나아가려면 철저한 겸손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전능을 드러내심으로써 교만한 자에게 부끄러움을 알게 하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겸손한 자세를 지닐 때만 주님을 알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어떠한 계급이나 특권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힘없고 무시받는 이들을 높이시고, 세상의 권력가들을 끌어내리시기 때문이지요.

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귀하고 평등하다는 의식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변의 그 어떠한 착취와 탐욕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배고픈 이들과는 먹을 것을, 사랑이 필요한 이들과는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불의와 부패를 물리쳐야 합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노래’는 매우 아름답지만, 그 속에는 우리 의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새로운 선언이 들어 있습니다.

교만함과 특권 의식을 포기하고 나눔을 실천해 나갈 때 우리는 새로이 태어나는 아기 예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앞날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시메온의 예언 (루카 2,22-35)16.12.29조회 85[대림 제4주간 토요일] 즈카르야의 찬미가 ( 루카 1,67-79)16.12.24조회 129[대림 제4주간 목요일] 마리아의 노래 (루카 1,46-56)16.12.22조회 127[대림 제4주간 수요일] 엘리사벳방문 (루카 1,39-45)16.12.21조회 50[대림 제2주간 토요일] 세례자 요한 마태 17,10-13)16.12.10조회 49[대림 제2주간 금요일] 먹보요 술꾼 (마태 11,16-19)16.12.09조회 48[대림 제2주간 화요일] 길 잃은 양 한 마리 (마태오 18,12-14)16.12.06조회 79[대림 제2주간 월요일]중풍병자치유 (루카 5,17-26)16.12.05조회 77[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마르코 16,15-20)16.12.03조회 50[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4-36)16.11.26조회 52[연중 제34주간 금요일]징조 (루카 21,29-33)16.11.25조회 51[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누가 내 어머니냐?(마태 12,46-50)16.11.21조회 54[연중 제33주간 토요일]부활 (루카 20,27-40)16.11.19조회 56[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성전 정화 (루카 19,45-48)16.11.18조회 52[연중 제33주간 목요일]예수님의 눈물 (루카19,41-44)16.11.17조회 50[연중 제32주간 금요일]사람의 아들의 날 (루카 17,26-37)16.11.11조회 84[연중 제31주간 토요일]하느님과 재물 (루카 16,9ㄴ-15)16.11.05조회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