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토요일] 세례자 요한 마태 17,10-13)

2016. 12. 10. 오전 6: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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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간 토요일] 세례자 요한 (마태 17,10-13)


집회서의 저자는 불처럼 일어섰던 엘리야 예언자를 칭송한다. (집회 48,1-4.9-11)
그 무렵 1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2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3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4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9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10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말씀하시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17,10-13)
산에서 내려올 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집회48,1-4.9-11)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48,1) 

'엘리야'란 이름은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다'는 뜻이다. '불','횃불' 표상은 여기서는 '사랑' '열정' 혹은 '심판'의 의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 들였고"(48,27)란 말씀은 48장 3절의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와 연결이 되어 있다. 가뭄 예언과 관련된 말씀 (1열왕17,1 ; 18,1-3 ; 참조18,45)이다. 

하늘 문을 닫고 여는 하늘의 신, 풍요다산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던 아합왕과 이스라엘의 변절된 신앙에 대한 질타로 가뭄이 예언되고, 그 결과로 기근(굶주림)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가뭄을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진짜 하늘(햇빛과 비)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48,2ㄴ)는 것은 카르멜산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키손천에서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사로잡아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1열왕18,40).

48장 3절에 "세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열왕기 하권 1장에 아하즈야왕이 자기 옥상 방의 격자 난간에서 떨어져 다친 후 하느님을 찾지 않고 사자들을 보내어 에크론의 신 바알 즈붑에게 가서 병의 회복에 관한 문의를 하라고 명령한 것에 대한 벌(심판)의 이야기이다.

두 차례나 엘리야가 예언한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인 대장과 부하 쉰 명을 삼켜버린 사건을 말한다(2열왕1,10ㄷ.12ㄷ). 이 두 번과 450명 바알 예언자들과의 카르멜산 대결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린 사건을 말한다(1열왕18,38).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48,9)라는 말씀은 엘리야와 엘리야 영의 두 몫을 청하는 엘리사의 이별이야기에 나온다.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갈라 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에 실려 올라간 사건을 말한다(2열왕2,11).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8,10)

이 구절은 말라기 3장 1절과 23절에 있는대로, 죽지 않고 산 채로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예언자가 하느님이 세상을 심판하기 직전에 다시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고 열두 부족을 재건할 거라는 말씀이다. 

엘리야는 종말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   메시아의 선구자(선주자)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세례자 요한에 이어 예수님이 활약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세례자(=엘리야)가 예수(=메시아)의 선구자(선주자)라는 입장을 취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말라3,1)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려치지 않으리라." (말라3,23-24)  



거룩한 중심 이동

엘리야는 산 채로 승천해 있다가(2열왕 2,11)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에 다시 와서 백성을 화해시키고 열두 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는 믿음이 있었다(말라 3,1. 23 참조). 율법학자들은 이런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였다(마태 17,10).
그토록 위대한 예언자로 칭송받았던 엘리야 예언자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은 것은 현실적인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7,11-12)고 하신다.
곧 두 번째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왔는데도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알아채지 못한 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함부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도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으실 것이라고 예고하신다(17,12).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님 모두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고난을 받았다. 엘리야는 횃불처럼 타오르는 불이 되어 주님의 영광과 말씀을 전했다(집회 48,1. 4).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먼저 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랑을 보여주시고 하느님 뜻을 전파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여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길 열망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과 메시아를 배척하여 죽음으로 내몰아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대로 살면서 그것이 참 행복인양 착각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그와는 정반대로 자유와 행복을 위해 모든 것에서 떠나라고 가르치는 예수님의 그 말씀과 처신이 그들에게는 당연히 달가울 리 없었던 것이다.

예언자들이 전한 하느님 말씀은 이기심과 탐욕에 갇혀 있던 그들에게는 듣기 싫은 ‘불편한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자기가 정해놓은 자기식의 선’이었으며,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모두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채워주고 자기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하느님 위에 두고 하느님을 조정하여 자신이 필요할 때 이용하는 근원적인 착각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가까이 와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미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며, 생의 시초부터 내 안에 생생하게 살아계시는 그분을 소외시킨 채 밖에서 찾곤 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기보다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려 하고, 내 밖의 것을 소유함으로써 행복해진다는 현세 의존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으려 하는 것은 눈앞의 메시아 예수님을 내치고 죽은 엘리야의 과거 영광에 애착하는 어리석은 태도인 것이다. 모든 것을 내 뜻과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생각하는데서 주님께로 중심을 이동해야 하리라!

그런 삶에 젖어 있는 이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늘 취하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계륵(鷄肋)과 같을 것이 분명하다. 이 틀을 깨는 길은 말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말씀을 한귀로 흘려듣는 일이 없었고 들은 것은 부단한 정열로 묵상하였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과 더불어 진리와 사랑과 선을 거슬러 도전해오는 온갖 고난을 믿음 안에서 이겨내도록 하자. 거룩하신 하느님께로 내 온 존재의 중심을 옮겨 자기중심적인 틀과 행동을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기쁘게 살아가도록 하자! 대림시기는 중심이동의 시기이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17,10-13)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10~11) 

마태오 복음 17장 10절에 기록된 제자들의 질문은 앞에 기록된 타볼산 현성용의 사건과 엘리야의 나타남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사실 엘리야가 메시야에 앞서 올 것이라는 사실은 말라키서 3장 1절과 3장 23~24절의 예언에 근거한 것인데, 당시 유대인들에게 메시야 출현의 결정적 증거로 여겨졌다.

따라서 타볼산에서의 예수님의 영광과 엘리야의 출현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커다란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말라키서에 의하면,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를 보낼 것이며,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는 회복의 사명을 할 것임을 말하고 있음에도(말라3,23~24) 불구하고, 제자들은 엘리야가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 출현 이후에 타볼산에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엘리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더욱 확고하게 예고되는 것도(루카9,31) 제자들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을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메시야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엘리야가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하며, 정의와 참 예배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었으므로(마르9,12), 그들은 이렇게 회복될 환경에서 메시야가 죽임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제자들은 엘리야가 온다는 예언을 옛날의 그 예언자 엘리야가 올 것이라는 사실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말라키서에서 지칭되는 엘리야'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루카1,17) 오는 사람, 즉 세례자 요한이었다. 

한편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르코 복음사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서로 묻는 사실을 기록하여(마르9,10) 제자들의 질문에는 메시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분명히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11) 

여기서 '모든 것'로 번역된 '판타'(panta; all things)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죄 중에 살고 있던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죄를 지적함으로써(루카3,3~14) 사람들의 죄스런 속성의 회복을 시도했지만, 완전한 회복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 자신조차 헤로데 안티파스의 죄를 지적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의 수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모든 것' 의미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세례자 요한으로 부터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선포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사탄이 왕노릇하는 지금까지의 세상의 모순된 모든 것들이 회복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 '모든 것의 회복'세례자 요한이 완성한다고는 보기 힘들고, 다만 그의 등장으로부터 모든 것이 회복되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의미를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08.12.13 - 마태오 17,10-13

엘리야는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합 왕이 이교도들이 믿는 바알 신을 숭배하자, 엘리야가 카르멜 산 정상에서 이교 신을 믿는 850명의 예언자와 대결하여 통쾌하게 승리합니다. 그 결과 아합 왕이 회개하지요.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를 또 다른 메시아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1열왕 18장 참조).
또한, 엘리야는 구약에서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2열왕 2,9-11 참조). 따라서 엘리야가 메시아로서 다시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800년이 지나, 엘리야의 모습으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난 것입니다.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기에 엘리야 예언자를 떠오르게 하였지요(2열왕 1,3-8 참조).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이 요한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런 요한이 헤로데에 의해 참수당하자 예수님께서 탄식하시지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건부 신앙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요구 사항만 나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주님께 무엇을 해 드려야 할지, 이 점을 늘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점을 다 채워 주실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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