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토요일]부활 (루카 20,27-40)

2016. 11. 19. 오전 5: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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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간 토요일]부활 (루카 20,27-40)


요한 사도는 주님의 두 증인이 죽었다가 사흘 반이 지나 하느님의 숨을 받아 일어나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 (묵시록 11,4-12)
나 요한에게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나의 두 증인이 있다.” 4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5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9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10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시편 144(143),1.2.9-10(◎ 1ㄱ)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내 손가락에 싸움을, 내 손에 전쟁을 가르치셨네. ◎
○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민족들을 내 밑에 굴복시키셨네. ◎
○ 하느님, 당신께 새로운 노래 부르오리다.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당신은 임금들을 구원하시고, 당신 종 다윗을 구하시나이다. ◎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후사가 없이 죽은 일곱 형제 이야기를 들자 예수님께서는 저세상에서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하신다. (루카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부활 논쟁> 송영진 모세 신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루카 20,27-33)”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부활 후의 일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으니,
그들의 질문은 논쟁을 하기 위한 질문이고, 부활을 부정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일곱 형제와 한 여자의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논쟁을 하기 위해서 억지로 만든 이야기입니다.
사두가이들이 진짜로 주장하고 싶어 한 것은 이것입니다.
“부활이 있다면, 부활 후에 복잡한 문제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부활이 없는 것이 낫다.”입니다.


그래도 사두가이들의 질문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25장 5절-6절에 이런 율법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죽은 그 사람의 아내는 다른 집안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남편의 형제가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시숙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여자가 낳은 첫아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지워지지 않게 해야 한다(신명 25,5-6).”
이 율법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들이 구약성경에 나오는데,
그들은 바로 ‘룻기’에 나오는 룻과 보아즈입니다(룻 3장-4장).


그런데 사실 부활을 믿고 있는 우리도 그런 문제들이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부활 후의 세상에서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합법적으로 재혼한 사람들 경우에
첫 번째 배우자와 두 번째 배우자 사이에서 복잡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5-36).”


여기서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은 천사들과 같아진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부활 후에는 인간은 본성적인 모든 욕망을 초월한 존재가 된다.”입니다.
그래서 그 세상에서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도 없고, 다툼도 없습니다.
(“누구에게 남편의 권리가 있는가,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인가?”
라고 다투는 일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지상에서 누구의 배우자였는지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인생을, 또 자기가 한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기억은 하지만, 천사들과 같아져 있기 때문에 다투는 일은 없습니다.


(그곳에서의 가족 제도는 지상에서의 가족 제도와는 다를 텐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히 부모형제를 다 기억하면서도,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면 크게 기뻐하면서도,
그래서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천사들처럼 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내세에서도 현세에서의 일들을 모두 기억하게 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또 자기가 한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연옥에서 보속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기억도 못하는 일을 보속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또 지상에서의 고통스러운 인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천국에서의 행복이 행복인 줄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있는 영혼들이
지상에 남아 있는 가족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고 믿고 있는데,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려면, 가족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내세는 현세의 반복이 아니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곳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고,
우리는 그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 대우하게 만드는
지금 세상의 인종, 민족, 직업, 신분, 계급, 학력, 외모... 등등
그런 차이들은 다 사라지고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일도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부활 후의 세상은 그처럼 모든 차이와 차별이 일체 없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부활을 희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 후의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말씀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부활은 틀림없이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1,38).”
하느님은 죽음이라는 것도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영원히 살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창세 1,26).
이 말씀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인간들이 영원한 생명력을 잃게 된 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창세 3,22).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면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일을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부활은 틀림없이 있지만, 아무나 부활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얻은 사람만 부활할 수 있습니다(루카 20,35).
신앙생활은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세상을 체험하고 터득해 갑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서 체험한 것들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지만, 그 체험을 넘어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우리 인간들은 동물들과 달라서,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것이라도 독서나 학습 등의 간접 체험을 통해서 익혀 나가고, 이 간접 체험은 우리 삶의 질적 차원을 완전히 상승시켜 놓았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초월의 세계를 받아들입니다. 독서와 학습을 통해서는 세상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신앙을 통해서는 부활과 하느님의 나라라는 초월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늘 나라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간접 체험을 통한 삶의 질적 상승과는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차원의 새 삶의 지평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질문은 역시 이 현세의 삶의 지평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면, 짝을 만나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는데,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나라는 삶과 죽음, 인연과 악연 등의 고통이 없는 온전한 기쁨의 세계입니다.

 단순히 지상의 삶을 연장시키는 것은 그리 큰 감동이 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되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초대받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시간을 사는 네 부류가 있습니다.
과거를 사는 사람.
미래를 사는 사람.
현재를 사는 사람.
영원을 사는 사람.

과거를 사는 것은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과거에 매여 현재를 살지 못하기에 당연히 바람직한 삶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나이를 먹을수록 살아온 날이 살날보다 많기에,
그리고 새롭게 할 것이 많지 않기에 과거를 살게 되기 쉽습니다.

며칠 전에는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분들을 만났는데도
옛날 얘기만 하고 있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는
우리도 나이 먹었나보다고 하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미래를 사는 것도 과거를 사는 것보다 낫다고 할지 모르지만
현재를 살지 못하는 면에서는 마찬가지로 문제입니다.
미래를 사는 것이 미래지향적으로 사는 것이라면 좋지만
현재를 살지 않고 미래를 사는 것이라면 문제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 나라(천국)가 지금, 여기에는 없고
죽고 난 뒤 저 하늘 어디에 있는 식이라면 잘못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아야 하지만
현재를 사는 것도 그것이 찰나주의라면 역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나중에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지금 쓰고 싶은 것 쓰고,
나중에 몸이 망가지더라도 지금 즐기고 싶은 것 즐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와 정 반대되는 과거를 살아도 안 되지만
미래와 단절된 현재를 살아도 안 됩니다.
현재란 과거, 미래와 단절된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축적인 현재이고 미래로 이어진 현재입니다.

과거와 미래와 단절된 현재를 산다는 것은 시간의 혼란이 아니라
근본과 목표를 상실한, 방향의 혼란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는 현재를 살아야 하는데,
이 과거와 미래, 근본과 목표가 사두가이와 같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사두가이의 근본과 사두가이의 목표?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껏해야 근본이 아비이고 목표는 자식입니다.
현세의 부귀영화가 그들의 행복이고,
자기가 죽더라도 후손이 대를 이어 살며 부귀영화를 사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형제가 자식 없이 죽게 될 때
사두가이에게는 현세에서 후사를 잇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현재를 잘 사는 것은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현재를 잘 사는 것은 영원과 잇닿은 현재를 사는 것이고,
영원을 산다는 것은 현재를 영원히 사는 것이며,
근본이 하느님인 삶을 사는 거고 목표도 하느님인 삶을 사는 겁니다.

그리고 영원한 현재를 사는 것은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이며,
하느님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사는 것이고,
하느님 안에서 살다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작은형제회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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