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누가 내 어머니냐? (마태 12,46-50)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쳤다고 전해 온다. 이날은 본디 6세기 중엽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모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즈카르야 예언자는 환시 속에, 주님께서 시온 한가운데 머무르리라는 말씀을 듣는다. (즈카르야 2,14-17)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때에 너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되리라. 16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당신 몫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 17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 있다고 하자,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시고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다. (마태오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제1독서 (즈카2,14-17)
"딸 시온아,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0)
즈카리야서 2장 10절 이하 13절에서는 주님께서 선민과 함께 할 것과 선민과 예루살렘의 회복 및 주님께서 임재할 것이 예언된다.
그 가운데 서두에 나오는 10절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가 다 끝나고, 그들과 하느님이 원래 처음 맺었던 계약의 상태로 되돌아 갈 것을 암시하는 예언이다.
여기서 '시온의 딸'로 번역된 '치욘 빠트'(tsiyon bath; O Daughter of Zion)는 구약의 관점에서는 예루살렘 성읍의 거주민들을 지칭하고, 신약의 관점에서는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전해 준 메시지 안에(루카 ,28.30.31~33.49.54~55) 선민이 바빌론 유배로부터 귀환한 후에 예언자 즈카리야(즈카 2,14-15; 9,9-10), 스바니아(스바 3,14-17),요엘(요엘 2,21-27)이 '시온의 딸' 즉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에게 선포한 신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 사건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도시('시온의 딸'이라 불리우는 도시)는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온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기뻐하라는 초대를 받는다. 그토록 기뻐해야 하는 동기는 유배의 어두운 시기 가 지난 후, 하느님께서 재건된 성전 안, 성도 한 가운데에 거처하러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있다. 두려움에 떨 이유가 전혀 없다. 실제로 주님께서 그들의 왕이고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실제로 마리아를 '시온의 딸'로 묘사하려 하였다. 복음사가의 눈에 동정녀 마리아는 자신의 인격안에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 백성을 종합한다.
온 이스라엘이 동정녀 마리아안에 총괄된다. 동정녀 마리아야말로 이스라엘을 가장 훌륭하게 나타낸다. 나자렛의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앞서 실현하셨다 (루카1,49ㄱ.54-55참조).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이유 접속사 '키'(ki; for)로 시작하는 본문은 왜 시온의 딸이 노래하고 기뻐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새 성경에 단순히 '정녕 내가'로 번역된 '힌니'(hinni)는 문자적으로 '보라 내가'라는 의미이며, 이 예언을 읽는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표현이다. 장차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에게 오셔서 그들 가운데에 머무를 것이다.
'머무르리라'에 해당하는 '웨샤카느티'(weshakanthi; I will dwell)의 원형 '샤칸'(shakan)은 어원상 여행자가 장막을 쳐서 머무는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이다(창세9,27; 탈출25,8; 여호18,1). 본문에서 이 단어는 단지 얼마 동안 임시적으로 머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장막을 치시고,그들과 함께 거처할 것임을 나타낸다.
희랍어 구약 성경 번역본인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카타스케노소'(kataskenoso)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장차 종말의 날에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 하느님께서 친히 장막을 치시고, 그의 구원받은 백성들과 거처하실 것을 예언하는 묵시록 21장 3절의 내용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의 예언이 종말론적 성취를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묵시21,3)
한편 하느님께서 당신백성과 함께 거처하신다는 표현은 애초에 히브리 민족을 계약의 백성으로 삼으실 때 베푸셨던 계약의 본질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거처하시고,그들은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계약의 기본 내용이었다(탈출6,7; 레위 26,12).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약의 효력을 결코 중단하거나 계약을 폐기하시는 법이 없다. 비록 바빌론에 의한 멸망과 성전의 파괴로 인해 그 계약의 중단되는 듯이 보였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다시 고향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고,성전 역시 재건하게 하셨다. 그리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근거로 세워진 교회를 통해 계약의 백성의 흐름이 계속 이어지게 하셨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약의 백성들 가운데에 친히 임재하셔서 그들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그들과 함께 머무를 것이다. 이러한 계약은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이다. 성모님께서 원죄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원래 자식이 없었는데,자식을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시면, 다시 바치겠다는 약속을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가 지키신 것이다. 세살이 되던 해에 성모님을 성전에 바쳤는데, 성모님께서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다시 자발적으로 되돌려 드리며 평생 동정 서약을 하신 것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복음 (마태12,46-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50)
여기서 '실행하는 사람이'로 번역된 '포이에세 ~ 아우토스'(poiese ~autos; dose~the same)는 '실행하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바로 그 당사자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다.
'포이에세'(poiese)의 원형 '포이에오'(poieo)는 어떠한 일을 적극적으로 행하거나 존재하는 물질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인데, 여기서는 '내 아버지의 뜻'을 목적어로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여기서 '포이에오'(poieo)는 '~하는 자는 누구든지'를 뜻하는 '호스티스 안'(hostis an; whoever)과 함께 가정법으로 쓰여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만 하면 누구든지'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바로 그 조건이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본 문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행한 것은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긍정하면서 묵묵히 듣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에는 눈에 보이는 행위 뿐만 아니라, 눈에 띄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결단을 내리는 마음을 가지는 것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로마8,14~16)
<사랑, 기쁨>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8-50)”
이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나의 참 가족이 된다.” 라는 뜻입니다.
또는 “나의 참 가족이 되려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입니다.
또 이 말씀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두 말씀을 합하면,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일이다.”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에도 연결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2-14).”
여기서 ‘친구’ 라는 말은, 뜻으로는 ‘참 가족’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 일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완성은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의 실천을 통해서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참 가족이 됩니다.
즉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과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같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실천해야 하는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두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실천에서 첫 자리에 계신 분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서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하느님 사랑’은 루카복음 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루카 1,46-47)”
마리아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함께 원하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이웃 사랑’은 요한복음 2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요한 2,1-3).”
이웃의 어려운 상황을 먼저 걱정하는 모습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스스로 해야 진짜 사랑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22,37-39).”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계명이니까 실천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명령대로 복종하는 로봇이나 노예가 아니라,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자유인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말씀에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라는 말씀은,
실제로 종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종처럼 따르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노예가 사랑 없이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일에는 참 기쁨이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순종하는 일에만 참 기쁨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라는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이 전적으로 자유의지에 의한 일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사랑하니까 기쁨이 있고, 기뻐하는 일이니까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지내는 것은
마리아의 응답과 헌신의 바탕에 있는 사랑을 공경하고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은 마리아처럼 그렇게 사랑과 기쁨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에 단순히 지옥에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생활이라면,
또는 현세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는 생활이라면,
그 신앙생활에는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도 기쁨도 없는 신앙생활에는 힘이 없습니다.
조금만 박해를 받아도, 작은 시련과 고난을 겪기만 해도 금방 꺾일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온갖 고난과 시련을 참고 견디면서
끝까지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사실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사랑,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만일에 마음에도 없는 일을 억지로 한다면 감사하지도 않을 것이고,
기뻐하지도 않을 것이고, 기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생활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기 때문에 늘 감사하게 되고, 기쁨 속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게 됩니다.

나자렛의 마리아 -양승국신부-
한 수도회의 종신서원식에 참석했을 때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보통의 수도자들은 종신서원식 때 교회와 웃어른 앞에서 청빈, 순명, 정결 세 가지를 서원합니다. 그런데 그 수도회에서는 두 가지를 덧붙이더군요. 세상 사람들에게 수도자로서 신분을 알리지 않겠다는 서원, 그리고 그 어떤 명예직이나 고위직도 맡지 않겠다는 서원 말입니다.
그들의 특별한 서원을 바라보던 저는 무릎을 ‘탁’ 칠 정도의 깨달음 한 가지가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서원은 바로 ‘나자렛의 영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30년 동안 묵묵히 공생활을 준비하신 예수님의 영성, 예수님 못지않게 더 깊은 침묵과 희생 속에 구세사에 기여한 마리아의 영성 말입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나자렛에서 삶이었지만 하느님을 향한 굳센 믿음과 샘솟는 기쁨을 간직한 채 꿋꿋이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나자렛의 마리아를 기억해봅니다. 그녀의 삶은 마치도 깊은 산속에 홀로 피어난 ‘숨은 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바라봐주던 그렇지 않던 환한 얼굴로 그리고 묵묵히 제 자리에 서 있던 작은 풀꽃 같은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나자렛 영성은 하느님께서 우리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일원이 되어 생활하고 계심을 굳게 믿는 영성입니다. 하느님께서 때로 구차스럽고 때로 죄 투성이인 우리 인생에 매일 동행하심을 확신하는 영성입니다. 나자렛 영성은 매일 되풀이되는 작은 사건들과 매일일 일상적으로 맺고 있는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를 하느님과 연결시키는 영성입니다. 나자렛 영성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삶이 내게 호의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개의치 않고 꾸준히 기도하는 영성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나자렛 영성의 원조이자 여왕은 바로 나자렛의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평생토록 나자렛에 몸담고 살았습니다. 어찌 보면 나자렛은 심심하기 그지없는 한적한 동네였습니다. 정치·경제·문화의 일 번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제 같은 오늘이 매일 반복되는 그저 그런 동네였습니다. 몇 달이 지나가도 신나는 일도 특별한 구경거리도 없었습니다. 대단한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세상, 그렇지만 삼시새끼 먹고 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이 작은 몸짓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일상을 반복하는 각자 삶의 자리와도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그곳, 대단한 변화나 특별한 광경이 없는 바로 그곳 나자렛에 하느님께서 숨어계셨습니다. 오늘도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첫째가는 협조자이신 마리아께서 우리들의 지루하고 고달픈 나자렛에 함께 살아가십니다. 나자렛의 마리아께서는 평범한 일상을 비범한 영성으로 변화시킬 줄 아셨습니다.
때로 자질구레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의 일들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줄 아셨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는 매일 삼시새끼 성가정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매일 쌓이는 빨래 감을 머리에 이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을 공동 우물로 향했습니다. 매일의 가난과 노동, 은둔과 침묵, 인간적 상처와 갈등들도 하느님과 연결시킬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각별히 칭찬할 신앙인들이 지닌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하다는 것입니다. 삶이 내게 호의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상관없이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몸이 성하거나 병들거나, 순탄한 오솔길을 걷거나 폭풍속의 험한 길을 걷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나자렛의 마리아가 걸었던 길처럼 말입니다. 참된 신앙, 참된 영성은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고 매일 걸어야할 삶입니다.
지금 우리 각자가 서있는 일상의 자리가 또 하나의 나자렛이자 주님이 현존하시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은총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이 광채를 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일 벌어지는 일상의 작은 사건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겪는 매일의 고통과 상처 그 틈 안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앞에 펼쳐지는 매일 삶은 하느님의 신비와 은총으로 가득 찬 기적의 현장입니다.


성모님께서 자신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S. Maria Nuova)의 봉헌일(543년)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날 동방과 서방의 교회는 함께, 원죄 없으신 잉태의 순간부터 성령으로 가득 차셨던 성모님께서, 어린 시절에도 성령의 영감으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했던 것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또한 이 축일은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도 매우 뜻깊은 축제입니다.
성모님의 어린 시절과 오늘 기념하는 봉헌의 사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많은 전승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부모님이 이미 봉헌한 약속에 따라, 세 살 때에 다른 소녀들과 함께 손에 등불을 들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의 안내에 따라 성전으로 인도됩니다. 마리아는 아직 어렸지만, 성전의 열다섯 층계를 올라갔고, 다른 소녀들과 함께 앉지 않고, 대사제들이 일 년에 한 번 자리하는 지성소에 앉았다고 교회의 전승은 알려 줍니다.
마리아의 봉헌은 실제로는 훨씬 더 겸손하면서도 영광스러웠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친 이 봉헌을 통하여, 마리아는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특히 마음을,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려고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 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을 새겼을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