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4-36)

2016. 11. 26. 오전 7:2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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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4-36)


요한 사도는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도성을 보는데, 그 도성은 주 하느님께서 빛이 되어 주시기에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다. (묵시 22,1-7)
주님의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 요한에게 1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2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3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4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6 그 천사가 또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씀이다. 주님, 곧 예언자들에게 영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당신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 7 보라, 내가 곧 간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시편 95(94),1-2.3-5.6-7ㄱㄴㄷ(◎ 1코린 16,22ㄴ과 묵시 22,20ㄷ)
◎ 마라나 타! 오소서, 주 예수님!
○ 어서 와 주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환성 올리세. 감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세. 노래하며 그분께 환성 올리세. ◎
○ 주님은 위대하신 하느님,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신 임금님. 땅속 깊은 곳도 그분 손안에. 높은 산봉우리도 그분 것이네. 바다도 그분 것, 몸소 만드셨네. 마른땅도 당신 손수 빚으셨네. ◎
○ 어서 와 엎드려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로세. ◎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다. (루카 21,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제1독서 (묵시22,1-7)

 "주님의 천사가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 요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1-2) 

묵시록 19장 1절~ 22장 5절대종말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예언 중에서도, 예수님의 재림과 어좌 심판 및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이어지는, 예수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이다. 

그 가운데서도 묵시록 21장 1절 ~22장 5절은 현 우주와 역사의 종결이요, 영원히 지속될 천국 역사의 시작이기도 한, 대종말 사건의 절정인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묵시21,1-8)와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이 될 예루살렘황홀한 정경(묵시21,9-27), 그리고 새 예루살렘 중심을 관통하는 생명수의 강의 정경(묵시22,1-5)으로 점차 그 범위를 좁혀가면서, 모든 성도들이 그토록 대망하는 천국의 공간적 배경을 묘사한다. 

'주님의 천사가 ~ 나 요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에서 ' ~ 보여 주었습니다'로 번역된 '에데익센'(edeiksen)'지시하다', '설명하다', '지적하다' 라는 뜻을 지닌 '데익뉘오'(deiknyo)3인칭 단수 부정 과거 능동태로서, 사도 요한에게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보여준 존재가 묵시록 21장 9절에 언급된 '마지막 일곱 재앙이 가득 담긴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그가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은 이미 묵시록 7장 17절과 묵시록 21장 6절, 22장 17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묵시7,17)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져 주겠다" (묵시21,6)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 (묵시22,17) 

묵시록 7장 17절을 보면, 어린양이 창조주 하느님과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분이심을 암시하는 표현이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이다. 그런데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자처럼 하느님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인도하시는데, 인도하시는 최종 목적지가 '생명의 샘' 이다. 

'생명의 샘'으로 번역된 '에피 조에스 페가스 휘다톤; epi zoes pegas hydaton; to living fountains of waters)에서 주목할 것은,'생명'이란 뜻을 지닌 '조에스'(zoes)어군상 먼저 등장하여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어에서 단어의 어순이 비교적 자유롭지만, 이 경우는 '조에스'(zoes)'휘다톤'(hydaton) 뒤에 두는 것이 더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이것을 서두에 둠으로써,'생명'이란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생명의 샘 관한 언급은 묵시록의 결론부인 21장 6절, 22장1절,17절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경우, 이러한 표현은 통상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자신'을 가리켰다(시편36,10; 예레2,13;17,13).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생명의 샘(생명수의 강)이란 결국 하느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완전한 임재는 인간의 영적 갈망을 완벽하게 해소하는 것이다. 

한편, 새 예루살렘의 모티브 에덴 동산의 모티브 및 성전 모티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묵시21,19.20). 묵시록 21장 16절, 22절 등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 모티브와 관련된다면, 묵시록 22장 1절은 명백히 에덴 동산 모티브와 관련된다.  실제로 에덴 동산에도 생명의 샘의 근원이 있었다.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그 곳에서 갈라져 네 줄기를 이루었다" (창세2,10). 

이와 마찬가지로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로부터 흘러나온다. 사도 요한은 이같은 방식으로 새 예루살렘이 첫 창조, 곧 에덴 동산의 회복이자 완성임을 분명히 한다. 

본문에서 '~로부터'로 번역된 전치사 '에크'(ek)는 기원이나 출처를 나타내는 소유격 지배 전치사로서, 생명수의 강의 근원이 본질이 같으신 창조주 하느님과 구원자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어좌(투 트로누; tu thronu ; the throne)임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에제키엘 예언자는 자신의 환시에서 생명수의 강의 발원을 '주님의 집'(성전)으로 언급한다(에제47,1.2).  에덴 동산에서는 강이 동산 꼭대기에서 흐른다면,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에서는 성전에서 발원하고,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를 그 기원으로 한다. 

새 예루살렘이 에덴 동산과 성전의 궁극적 실재이자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점은, 그 생명수의 강의 기원이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힌 본절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새 성경에서는 '나와'가 1절에 번역되어 있고, '흐르고 있었습니다' 2절에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나와 ~흐르고 있었습니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두 개의 단어가 아니라 '엑포류오메논'(ekporeuomenon) 하나로 1절에 포함되어 있다.

'엑포류오메논'본래 '~로부터'라는 뜻을 지닌 접두어 '에크'(ek)'오다', '가다'라는 뜻을 지닌 '포류오마이'(poreuomai)합성어로서, 주로 액체가 흐르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현재분사로 쓰여 마치 생명수의 강이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발원하여 계속 흐르고 있는 것과 같은 뉘앙스 전달한다. 이같은 생명수의 강은 '성령'이나 '불멸에 대한 약속'이나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주시는 풍성한 삶'을 뜻할 수도 있다. 이런 견해들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다. 생명수의 강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견해들은 궁극적으로 새 예루살렘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이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생명수의 강 묵시록 21장 3절 언급된 하느님의 약속을 회화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묵시록 22장 1절에서 '생명수의 강'에 대해 언급한 사도 요한은 이제 2절에서 '생명나무'에 대해 묘사한다. 생명수의 강이 새 예루살렘의 대로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강물이 강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에 생명수를 공급하며, 하느님 나라에 생명력을  충만케 한다는 본 단락의 전반적인 문맥을 살려준다. 

한편 에덴 동산의 궁극적인 성취인 새 예루살렘에는 타락한 인간에게 절대 금지되었던 에덴동산에서와는 달리, 결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이 금지되지 않는다(창세3,24).오히려 그것은 대로상에 자리하여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아울러 새 예루살렘에는 첫 창조 당시 에덴 동산에 있었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창세2,9). 따라서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죄가 침입하지 못한다. 새 창조로서 새 예루살렘은 단순히 첫 창조때의 에덴 동산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성취한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누릴 풍성한 영적 생명은 '열두 번 열매를 맺으며, 다달이 열매를 내놓는다'는 진술로 더욱 명백해진다. 본절에서 '맺는'과 '내놓습니다'로 번역된 '포이운'(poiun)'아포디둔'(apodidun)은  각각 '만들다', '행동하다' 라는 뜻을 지닌 '포이에오'(poieo)'완수하다', 이룩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디도미'(apodidomi)현재분사로서, 생명나무의 열매가 현재 계속해서 열리고 맺히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전달한다. 

그리고 생명나무의 열매가 '열두 번' 맺히고,또는 '열두 가지 열매'(karpous dodeka)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것은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에서 누릴 영적 생명의 풍성함과 다양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묵시록 22장 2절은 무엇보다도 에제키엘서 47장 12절과 밀접하게 병행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이 중에서 생명수의 강의 근원에 대해서는 1절에, 그리고 생명나무와 그 열매에 대해서는 2절 상반절에 언급한 사도 요한은, 이제 본문에서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언급으로부터 자신이 본 생명나무 나뭇잎 환시의 의미를 해석한다. 

여기서 '치료하는' 으로 번역된 '테라페이안'(therapeian)'치료하다','봉사하다'라는 뜻을 지닌 '테라퓨오'(therapeuo)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목적을 표시하는 목적격 전치사 '에이스'(eis)와 더불어, 생명나무의 나뭇잎(타 필라 ; ta phylla ; the leaves)이 민족들을 치료하기 위한 용도사용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본문에 언급된 치유의 대상은 '민족들'(톤 에트논 ; ton ethnon ; of the nation)은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의 거주민이 된 구원받은 성도들 가리킨다(묵시21,24).

'민족들을 치료하는 나뭇잎'은 요엘기1장 14절, 2장 15절에 의하면, '이방인의 개종'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민족들의 회심에 대한 우주론적이며 보편적인 전망을 가지면서도

묵시록 21장 8절, 27절, 22장 15절과 같은 분명한 제한 장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치료한다는 의미는 어떤 병든 상태를 고쳐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육간의 건강이 계속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 죽음이 다시 발붙이지 못하는 영생의 나라가 될 것임을 보여준다.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21,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 

루카 복음 21장 34~36절올리브산 설교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종말의 시기에 준수해야 할 실제적 행동 지침제시하신 내용이다. 

루카 복음 21장 34절'조심하여'에 해당하는 '프로세케테'(prosechete; be careful)의 원형 '프로세코'(prosecho)'자신에게 주의하다', '스스로 조심하다'는 뜻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주로 경계의 교훈의 문맥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루카12,1; 17,3). 

그리고 이 단어의 뉘앙스는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점검하면서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온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방탕''만취''일상의 근심'인데, 이 세 가지 사항을 조심하지 않으면 마음이 물러지고 둔해지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방탕'으로 번역된 '크라이팔레'(kraipale; dissipaton; surfeiting)'머리가 이리저리 뒤흔들리다'는 뜻으로 라틴어로는 '크라풀라'(crapula)로 번역된다. '크라풀라'포도주를 지나치게 마심으로써 일어나는 현기증과 두통을 가리킨다. 

그리고 '만취'로 번역된 '메테'(methe; drunkenness) '너무나 많은 술에 만취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방탕''만취'성령에 충만된 상태와 대조적으로 세상의 쾌락과 관심에 취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한다. 

또한 '일상의 근심'으로 번역된 '메림나이스'(merimnais; the anxieties of life)의 원형 '메림나'(merimna)는 어원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리다'는 뜻으로서,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나뉘어져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찬 상태를 가리킨다. 

마음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마음이 물러진 상태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물러지는'으로 번역된 '바레토신'(barethosin; be weighed down; be overcharged)의 원형 '바뤼노'(baryno)는 무거운 것으로 '내리 누르다'뜻으로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하느님의 뜻이 분명하게 보이지만, 자신의 관심과 쾌락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을 누르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한편, 루카 복음 21장 34절'덫처럼'(원문에는 35절)에서 '덫'으로 번역된 '파기스'(pagis; a snare)는 문자적으로 '함정','올가미'와 같은 뜻이지만, 비유적으로는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위험'을 나타낸다(로마11,9; 시편68,23). 

이것은 갑작스럽게 온 심판을 말하는데, 평상시 동물들이 잘 다니는 길에 놓여진 덫이 어느 순간 갑자기 피할 수 없는 위험으로 닥치듯이, 일상의 삶 속에 갑자기 찾아오는 재난, 곧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러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와 의무가 루카 복음 21장 36절에 나온다.

첫째깨어 있는 삶인데, 여기서 '깨어'로 번역된 '아그륍네이테' (agrypneite; watch)의 원형 '아그륍네오'(agrypneo)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로서 잠에 들지 않는 것(전쟁터에서 보초를 서듯)을 말한다. 

둘째늘 기도하는 삶인데, 이것은 기도가 삶의 일부가 되어 늘 기도하며 사탄의 유혹과 대적하고, 늘 하느님과 친교하는 것을 말한다.


2015. 11. 28<연중 제 34주간 토요일>



<취생몽사>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루카 21,34-35).”


‘방탕과 만취’ 라는 말에서 ‘취생몽사(醉生夢死)’ 라는 사자성어가 연상됩니다.
(취생몽사 - 술에 취해 잠자는 동안에 꾸는 꿈속에서 살고 죽는다.
즉 한평생을 아무 하는 일도 없이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을 뜻하는 말.)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인생은 허무하다.” 라는 말이나 하면서,
내세에 대한 믿음도 희망도 없이 아무렇게나 막 살다가
자신이 말한 그대로 허무하게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생은 허무하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일상의 근심’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을 뜻합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날마다 열심히 노동을 하는 것 자체는 선한 일이지만,
너무 지나치게 그것만 걱정하고 집착하다가 신앙을 버린다면
그 모습도 방탕과 만취에 빠져 있는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덤불’이 바로
‘방탕, 만취, 일상의 근심’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잠자는 이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이들은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4-9).”
이 말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기를 바란다면,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권고입니다.


‘그날’, 즉 심판의 날은 갑자기 들이닥치겠지만,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사람은 그날이 언제 어떻게 닥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평소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심판의 날이 언제 어떻게 오더라도 살던 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방탕, 만취, 일상의 근심 때문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은
마치 무방비 상태로 적군에게 기습을 당한 것처럼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이 말씀은 무방비 상태로 심판의 날을 맞이하지 않도록
평소에 꾸준히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은 종말의 심판을 가리키고,
그 일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은, 멸망을 선고받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뜻합니다.
그 힘을 지니도록 하라는 말씀은 그 자격을 얻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라는 말씀은,
“다른 일은 하지 말고 하루 종일 기도만 하여라.” 라는 뜻은 아니고,
항상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신앙인으로서, 또 신앙인답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또 가장 필요한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이라는 덫에 치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


‘기도’는 유혹을 물리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고, 유일한 무기입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려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해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간절함은 생각으로만 그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라는 말이 있는데, 신앙인의 ‘실천’ 가운데 ‘첫 번째 실천’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기도’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시작이고, 동시에 완성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그 모습은 “늘 깨어 기도하여라.” 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일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세속은, 또 마귀는 끊임없이 신앙인들을 유혹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그 유혹과 맞서 싸우는 전쟁과도 같은 생활인데,
기도하지 않으면 그 전쟁에서 백전백패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기도하면서 죄를 짓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어쩌다가 본의 아니게 죄를 지었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은 금방 회개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죄에 빠지는데, 그것은 영적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유혹과 죄에서 지켜주는 ‘영적인 힘’을 기도에서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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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간 월요일]중풍병자치유 (루카 5,17-26)16.12.05조회 77[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마르코 16,15-20)16.12.03조회 50[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4-36)16.11.26조회 52[연중 제34주간 금요일]징조 (루카 21,29-33)16.11.25조회 51[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누가 내 어머니냐?(마태 12,46-50)16.11.21조회 54[연중 제33주간 토요일]부활 (루카 20,27-40)16.11.19조회 56[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성전 정화 (루카 19,45-48)16.11.18조회 52[연중 제33주간 목요일]예수님의 눈물 (루카19,41-44)16.11.17조회 50[연중 제32주간 금요일]사람의 아들의 날 (루카 17,26-37)16.11.11조회 84[연중 제31주간 토요일]하느님과 재물 (루카 16,9ㄴ-15)16.11.05조회 49[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불의한 집사의 비유 (루카16,1-8)16.11.03조회 50[연중 제31주간 목요일]되찾은 양의 비유 (루카 15,1-10)16.11.03조회 50[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진복 팔단 (마태 5,1-12ㄴ)16.11.01조회 51[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루카14,12-14)16.10.31조회 52[연중 제30주간 화요일]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루카 13,18-21)16.10.25조회 111[연중 제29주간 토요일] 회개 (루카 13,1-9)16.10.22조회 239[연중 제29주간 목요일]불 (루카 12,49-53)16.10.20조회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