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월요일]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오시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리니,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고 예언한다. (이사야 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8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9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예수님께서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며 중풍에 걸린 이를 고쳐 주시어,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신다. (루카 5,17-26)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루카 5,17).”
여기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라는 말과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라는 말을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가르치는 일과 병을 고쳐 주는 일을 동시에 하신 것 같습니다.
(설교를 하시다가 병자가 오면 병을 고쳐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신 다음에는 다시 설교를 계속하시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기도 하고, 병을 고쳐 주시는 모습을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루카 5,18-19).”
지금 이 장면은 뭔가 많이 부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구멍을 낸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군중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없었다는 것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 것일까?
뒤의 25절에는 치유된 병자가 돌아가는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5).”
예수님 앞으로 갈 때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지붕을 통해서 가야만 했는데,
돌아갈 때에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갔습니다.
자기가 누워 있었던 평상을 들고서...
따라서 처음에 예수님께 다가갈 때에도
사람들이 조금씩 비켜주었다면 그 사이로 지나갈 수 있었을 텐데,
아무도 비켜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황은 사람들이 그 병자가 예수님께 가는 것을 막은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님과 그 병자 사이에 ‘사랑 없는’ 장벽이 된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예리코의 바르티매오가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 (마르 10,46-48)”
사람들은(제자들도) 바르티매오를 예수님께 인도해 주기는커녕 가로막는
‘차갑고 사랑 없는’ 장벽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을 꾸짖은 일도 연상됩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3-14)”
제자들은 예수님과 어린이들 사이에서 ‘사랑 없는’ 장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언짢아하시며’는 ‘화를 내시며’ 라는 뜻입니다.)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병자를 내려 보내는 장면에서
부자연스러운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시간이 꽤 흘렀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셨을까?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그런 고생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씩만 옆으로 비켜 앉아서 통로를 만들어 주라고 말씀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예수님의 속마음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병자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믿음의 시련’이 되었을 것이고,
사랑 없이 앉아 있기만 했던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이 얼마나 차가운 사람들인지를 깨닫게 만드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병자만 병자였던 것이 아니라,
앉아서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들도 영혼이 병든 병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영혼이 병든 상태입니다.)
사람들이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은 병의 치유를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루카 5,20).
아마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몸의 치유보다 영혼의 치유가 더 급한 일이었거나,
아니면, 병자 자신이 예수님께 ‘죄의 용서’를 먼저 청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말씀하신 일이 낯설게 보였던 것 같고,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루카 5,21).
그들이 설교와 병의 치유는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으면서도
‘죄의 용서’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하느님 외에는 사람의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고,
그때까지 사람의 죄를 용서한 예언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라는 그들의 말은 맞는 말인데,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모르고서 한 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기준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중풍을 고쳐 주심으로써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사람을 구원하는 권능을 모두 드러내셨는데,
그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랑 없음’을 회개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저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기만 했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 회개했는지...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랑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25,45-46).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에게 병을 고쳐주시기는커녕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고, 이를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분개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질병은 죄로 인한 결과라 생각했습니다. 중한 병에 걸린 것은 그만큼 죄가 크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지요. 따라서 병이 나으려면 죄를 용서받아야만 했습니다. 죄는 누가 용서해 줍니까? 율법 교사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정체도 잘 모르는 예수님께서 병자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시니, 도저히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병자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반면 병이 치유된 것은 그 병자가 일어나 걸음으로써 증명이 되지요.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먼저 고쳐 주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의 죄까지도 씻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권위가 예수님 안에 계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임을 이 세상 곳곳에 널리 전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