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진복 팔단 (마태 5,1-12ㄴ)
요한 사도는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과 수를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과 어린양 앞에 서서 경배하는 것을 본다. (묵시록 7,2-4.9-14)
나 요한은 2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4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11 그러자 모든 천사가 어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 둘레에 서 있다가, 어좌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말하였습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13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요한 사도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분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희망으로 자신을 순결하게 한다고 말한다. (1요한 3,1-3)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에 오르시어 여덟 가지 행복을 선언하신다. (마태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제1독서 (묵시7,2-4.9-14)
나 요한은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과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2-3)
본절의 천사는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칠 정도로 권세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천사는 네 천사보다 상위의 천사임에 틀림없다. 우선 이 천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인장'으로 번역된 '스프라기다'(sphragida ; the seal)은 '소유권'을 상징한다. 이 천사가 인장을 가지고 있다(에콘타 ; echonta ; having)는 것은, 3절에 의하면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찍어 하느님의 소유로 날인하고, 죽음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것이란 의미를 함축한다.(탈출12,23)
실제로 에제키엘서 9장 1절 이하에서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예루살렘의 죄로 인해 괴로워하는 이들의 이마에 표를 해서(에페9,4.6) 그 성에 퍼부어질 심판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인장은 소유권을 의미하고 소유권은 보호를 나타낸다. 그 인장의 정체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묵시14,1) 라는 언급에서 드러난다.
묵시록에서는 전반에 걸쳐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이들(묵시9,4;14,1; 22,4)과 사탄의 표를 받은 이들(묵시13,16 이하; 14,9; 19,20; 20,4)이 대조가 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인장을 소유하고 있는 이 천사는 그리스도의 구속 성혈의 공로로 인한 구원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계신 하느님'(테우 존토스; theu zontos; of the living God)이란 어구에서 '살아계신'(존토스;zontos)이란 수식어는 '살다', '생존하다' 라는 뜻을 지닌 '자오'(zao)의 현재 분사형으로, 목석에 불과한 우상과는 달리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면모를 잘 드러낸다.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해 돋는 쪽' 은 명백히 '동쪽'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보통 동쪽은 하느님의 옥좌가 있는 장소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 임재와 현존의 상징적 장소인 만남의 천막(성막)의 문도 동쪽에 있고(탈출27,13) 하느님의 영광도 동쪽에서 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에제43,2) 뿐만 아니라 의로움의 태양(의덕과 정의와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 (말라기3,20)라는 예언은 해 돋는 쪽에서 등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과 관련된다.
여기서 '올라오는' 으로 번역된 '아나바이논타'(anabainonta; ascending)는 '올라오다', '자라다' 라는 뜻을 지닌 '아나바이노'(anabaino)의 현재 분사형으로 그 존재가 해 돋는 쪽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음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본문은 네 천사와 구별되는 존재의 또 다른 면모에 대한 언급이다. 그것은 바로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친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큰 소리'로 번역된 '포네 메갈레'(phone megale)는 묵시록 6장 1절에 언급된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천둥같은 소리로 말하는' 것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네 천사를 압도하는 위엄에 찬 권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천사를 호령하는 다른 천사의 면모에서 유다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묵시5,5)
본문에서 '외쳤습니다'로 번역된 '에크락센'(ekraksen)은 '소리지르다', '부르다', 라는 뜻을 지닌 '크라조'(krazo)의 부정(不定) 과거형으로 네 천사에 대한 다른 천사의 압도적 우위를 보여준다.
그런데 본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암시하는 다른 천사가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대상은,'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 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이런 권한을 위임받은 네 천사의 역할은 묵시록 7장 1절에 나오는데,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이나 바다나 그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바람'(아네무스 ;anemus)은 묵시 문학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요소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러니까 요한은 유대 묵시 문한에서 흔히 사용되는 바람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땅과 바다로 상징되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각종 나무를 향해 무서울 정도로 돌진하고 있는 바람의 모습과 더불어 여기서 '그 어떤 나무'(각종 나무)가 등장하는 것은, 나무가 바람의 세기를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표징이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라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여기서 '하느님의 종들'(묵시1,1)이란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는 예언자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며,본문도 그러하다.
그리고 '해치지 마라'로 번역된 '메 아디케세테'(me adikesete)는 동사를 부정하는 부정어 '메'(me; not)와 '불의를 행하다', '해롭게 하다' 라는 뜻을 지닌 '아디케오'(adikeo)의 부정(不定) 과거 명령형이 함께 사용된 것으로, 네 천사에 대한 다른 천사의 강력한 제지를 보여준다. 본문에 의하면, 이 억제 기간은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로 한정된다.
본문은 심판의 바람, 재앙의 바람이 땅과 바다와 나무를 해치려고 이미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 심판을 유보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심판의 지연은 그에게 속한 종들 모두가 인장받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4)
요한은 인장을 찍거나 또는 인장을 받는 대상의 선택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는 본절에서 단순이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를 들었고(에쿠사; ekusa; heard),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인장을 받은 이들이 십사만 사천이라는 사실만을 밝힌다. 이같은 방식으로 요한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치는 행위가 하느님의 신비에 속하는 일임을 암시한다.
본문에 언급된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십사만 사천'은 하느님의 모든 백성, 즉 전체로서의 교회를 상징하는 체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묵시록 7장 5-8절에 의하면,이 수는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뽑혀 12,000X12 = 144,000 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부터 산출된 144,000이란 수는 민수기 1장 19-46절에서 전투를 위해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할 것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거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도합 603,550 명으로 본문에 언급된 144,000명과는 현격한 차이를 이룬다.
아울러 묵시록 7장 5-8절에 언급된 열두 지파에서 뽑힌 각각의 수는 12,000명으로 모두 통일되어 있는데, 이것은 요한이 특정 의미를 전달해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상징적인 수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실제로 144,000은 12X12X1000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구약의 백성(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12)과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그 기초가 되는 12사도)의 수로 곱하고, 거기에 무한성을 나타내는 수(1000)를 곱한 것으로,전체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결코 묵시록 7장 9절에 언급된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요한은 144,000이라는 '무제한적 제한'의 수를 통해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틈 큰 무리'가 내포한 동일한 관념, 즉 전체로서의 하느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서 또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9)
요한은 7장에서 교회의 이중적 존재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지상 교회와 천상 교회이다. 전자는 7장 1-8절에서 언급하였고, 후자는 9-17절에 묘사된다.
요한은 앞서 심판 중에서도 지상 교회를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언급하는 반면, 9절이하에서는 지상 교회의 대응자로서의 천상 교회를 묘사한다. 이로써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신실하심이 궁극적으로 성취된 것을 표상한다.
요한은 본문에서 구원받은 모든 하느님의 백성 곧 천상 교회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 나무가지를 들고서,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는 모습을 소개한다. 여기서 큰 무리가 입고 있는 '흰 옷'의 이미지는 '정결','순결','승리','순교' 이다.(묵시1,14; 3,5.18; 6,11)
그리고 본문에서 '야자나무 가지'(종려나무 가지)로 번역된 '포이니케스'(phoinikes; palms)는 '포이닉스'(phoinix)의 복수형 명사로,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불사조'(phoenix)를 뜻한다. 이것은 불사조(不死鳥)란 표현이 의미하는 그대로 '부활'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해 부활 대축일 전 주일인 성주간의 첫날인 예수 수난 주일을 '성지 주일'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들을 가지고 환호한 것에서 기인하지만, 그 속에는 수난과 부활 사상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레위23,40; 느헤8,15;시편 92,13)
한편, 11절에 '네 생물'(4 creatures) 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묵시록 4장 6-7절에서 더 자세히 나오지만, 모든 동물계에서 가장 고상한 것과 가장 강력한 것과 가장 지혜로운 것과 가장 민첩한 것을 상징하며, 사람을 포함한 자연계의 각 대표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앉아,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고 하느님의 지극하신 엄위로움을 예배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원로들'(presbyters)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묵시록 4장 4절에는 '24원로'로 나온다. 이것은 12+12로서, '열두 문들'과 '열두 기둥들'로 상징되는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에 직접적으로 대응되는데, 명백히 '하느님 백성 전체'를 상징한다. 24원로들은 지상 교회와 천상적 대응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히 빨아 희게 하였다." (13-14)
여기서 '큰 환난'은 종말에 발발할 '대환난'(the great tribulation)을 나타내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묵시3,10;다니12,1) 만일 그렇다면, 묵시록 6장 11절에 언급된 대로 그리스도교의 순교자들의 수가 충만해질 최후의 환난을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큰 환난을 '겪어 낸' 에서 '낸'(나오는)에 해당하는 '에르코메노이'(erchomenoi)는 '오다', '가다' 라는 뜻을 지닌 '에르코마이'(erchomai)의 현재 분사형으로, 이들이 큰 환난에서부터(에크;ek; out of)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본절에 언급된 원로 중 하나의 언급은 현재의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종말론적 대환난 기간을 막 통과한 셀 수 없는 무리, 곧 십사만 사천에 역투사하여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 흰 옷 입은 자들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묵시록7,9.11)
따라서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이들 모두가 다 큰 환난에서 순교당한 이들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특히 본절 이하 묵시록 6장 9절이나 20장 4절처럼, 죽임을 당하거나 목베인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천상 교회는 순교 행위가 아니라 순교적 정신과 영성으로 승리를 쟁취한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고스란히 자신의 몸에 짊어진 자들이다. 즉 그들은 예수 그리스께서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유다 지파의 사자가 된 것처럼, 고난받고 죽임당함으로써 사탄을 이기며(묵시12,11),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단장된 이들이다.(묵시19,7.8 ;21,2)
여기서 '빨아'로 번역된 '에플뤼난'(eplynan)는 '씻다', '빨다' 라는 뜻을 지닌 '플뤼노'(plyno; wash)의 부정(不定) 과거형이다. 이것은 이 흰옷 입은 자들이 자신들의 옷을 과거에 이미 단번에 씻고, 단번에 희게 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탈출19,10)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복음 (마태5,1-12ㄴ)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11~12)
마태오 복음 5장 11~12절은 10절에 나오는 여덟번 째 행복의 보충 내용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3절~10절까지의 전체 팔복(八福)의 보충 내용으로서의 성격이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 때문에'에 해당하는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heneken dikaiosynes; for righteousness)와 비교할 때, '~때문에', '~을 위하여'
라는 뜻을 지니는 '헤네켄'(heneken; for)은 동일하고, 다만 '의로움'(디카이오쉬네스;dikaiosynes)이 '나'(에무; emou; me)로 바뀌어진 것만 차이가 있다.
사실 마태오 복음 5장 6절과 10절에 나오는 '의로움'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dikaiosyne; righteousness)는 윤리적인 의로움인 동시에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종교적인 의로움이다
즉 죄인을 심판하고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인 '공의'(公義)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은 6절보다 종교적인 측면이 더 강한 의로움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느님의 의로움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삶은 바로 '의로움', '의'(義)의 전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다는 뜻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마태오 복음 5장 3~10절까지 나오는 팔복(八福)의 서술에서는 모두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토이'(autoi; they)인 3인칭 남성 복수 주격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5장 11절과 12절에서는 '너희'에 해당하는 '휘마스'(hymas; you)라는 2인칭 복수 대명사가 나온다. 이렇게 인칭이 바뀐 것은 지금까지 말했던 객관적인 진리를 이제는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태오 복음의 일차적 독자였던 초대 교회 시대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현실, 즉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미래에 주어질 하느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결코 좌절하지 말 것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도 들어 있는 것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하느님의 거룩함을 훼손시키는 신성모독자로 취급되어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또한 로마 지배 세력으로부터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반국가사범이란 죄목으로 잔인하게 처형당했으며, 일반 믿지 않는 대중들로부터는 자신들의 믿음 생활 때문에 질시받고 부도덕한 자들로 매도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마태오 복음 5장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을 삼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셨는데, 이러한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애통해할 수 밖에 없기에, 이제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두 번 거듭 명령형을 사용해서 이러한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제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기뻐하고'에 해당하는 '카이레테'(chairete; rejoice)의 원형 '카이로'(chairo)는 '기뻐하다', '안녕하다'는 뜻으로서,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며 행복에 겨운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아갈리아스테'(agalliasthe; be glad)의 원형 '아갈리아오'(agalliao)는 '영화롭게 하다', '높이다'는 뜻이 있는 '아갈로'(agallo)와 '뛰다', '솟아나다'는 뜻이 있는 '할로마이'(hallomai)의 합성어로서 밖으로 넘쳐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희열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특히 이 두 단어가 모두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지금 극한 고난의 상황에 있어도 그 기쁨이 넘쳐나야 함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박해는 절망과 고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받게 될 영광과 기쁨의 약속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상'으로 번역된 '미스토스'(misthos; reward)는 '품삯', '임금', '보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박해를 이겨낸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이 상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당신의 기준에 다라 각자에게 적절한 상을 주신다(마태20,1~16; 루카17,7~10).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에게 '상이 크다'는 약속에서 '크다'에 해당하는 '폴리스'(polys; great)는 크기가 크다(large)는 뜻이 아니라 양이 아주 많은 (much) 것을 뜻한다. 이것은 천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상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 지상의 어떤 보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갖가지 보상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미래에 종말론적으로 주어질 이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믿는 이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추가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박해받았던 사실을 회상케 하며,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자들도 '나 때문에'(마태5,11) 즉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과 하느님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시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듯이, 이제는 제자들이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신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여 헌신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 모두의 공통된 바람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거룩함’은 본디 ‘다른 분’, ‘따로 떼어 놓은’, ‘구분 지어진’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태초에는 하느님께만 쓰인 칭호였습니다. 곧,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초월적인 상태, 그래서 우리가 삶 안에서 감히 참여하기 어려운 경외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서 주 하느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라고 하시며 인류를 당신의 거룩함에 초대해 주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도 여타의 민족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려 노력했습니다.
우리 인류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거룩함은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는 사랑입니다. 곧, 거룩함은 계명을 준수하거나 외적으로 정화된 모습을 갖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인들은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려 노력하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이야말로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참행복도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슬퍼하고 박해를 받을 때도 있지만, 이를 통해 오히려 하느님을 만나고, 위로를 받는 사람들 안에 존재합니다.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또한 나의 삶과 생명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