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간 목요일]회개의 기쁨 (루카 15,1-10)
바오로 사도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고백한다. (필리피 3,3-8ㄱ)
형제 여러분, 3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4 하기야 나에게도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는 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5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투덜거리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과 은전의 비유를 들어 가르치신다. (루카 15,1-10)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제1독서(필리3,3~8ㄱ)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7~8)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지금까지 자랑해 오던 것을 '이롭던 것'(유익)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이롭던 것'으로 번역된 '케르데'(kerde; gain)의 원형 '케르도스'(kerdos)는 '이익','이득'(필리1,21; 3,7; 티토1,11)이란 뜻의 단어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리사이인으로서, 그것도 유대교의 골수분자로서 자신이 누리고 있던 혈통, 가문, 종교적 유산과 열심, 지식, 율법준수 등 육체의 자랑 거리들을 하늘 나라의 의로움을 얻는 데 유익이 되는 것으로 여겼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이제 전에 유익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로 인해서', '~때문에' 라고 번역될 수 있는 전치사 '디아'(dia; for)가 목적격을 취하고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여기서 '해로운 것'(해)란 뜻으로 번역된 '제미안'(zemian)의 원형 '제미아'(zemia)는 '손해'(사도27,10), '손상'(사도27,21)이란 뜻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자신의 여러 외적 조건을 (필리2,4~6) 그리스도를 향한 올바른 신앙을 갖게 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실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이때 '여기게 되었습니다'하는 의미로 번역된 '헤게마이'(hegemai; consider)는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일의 영향력이 현재에도 미침을 나타내는 시제인 현재 완료형으로 기록되어, 가치관이 바뀐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뒤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에게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사도 바오로가 이전에 소중한 것으로 여기던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 것은 육체적 자랑 거리가 영적 진보를 막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출발해야 할 신앙 생활이 육체적 자랑거리를 의존하는 것에 의해 침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했던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사도 바오로는 앞선 필리피서 3장 7절에 이어 자신의 육체에 관한 자랑거리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상 모든 것을 손실로 여기고 있음을 밝힌다.
이 '모든 것'에는 지금까지 사도 바오로가 가치 있다고 여기던 것의 전부로서 유대교 내에서 그가 누렸던 높은 지위 등도 포함될 것이다. 여기서 '여깁니다' 라는 의미로 '헤구마이'(hegumai)의 원형은 '헤게오마이'(hegeomai)이다.
이 동사가 3장 7절에서는 현재 완료 시제(헤게마이; hegemai)로 사용되었는데, 본절인 3장 8절에서는 현재 시제(헤구마이; hegumai)로 사용되었다. 앞서 현재 완료 시제를 사용한 것과 여기서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은 과거와 현재 뿐 아니라 앞으로도 변함없는 사실임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항상 이러한 태도를 견지할 것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사도 바오로가 세상 모든 이롭던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높고 고상하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가던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확인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일이 모든 것 위에 뛰어난 가장 위대한 일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는 지식'으로 번역된 '그노세오스'(gnoseos)의 원형 '그노시스'(gnosis)는 구약 히브리어 '야다'(yada)의 역어로서,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친교 혹은 본질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란, 그리스도 예수님과 관계없던 사도 바오로가 그와 깊은 친교속으로 뛰어들어서, 그와 깊이 있는 밀접한 친교를 나누고, 그가 누구인지 본질적으로 깨닫게 된 것을 말한다. 그 지식으로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그 이후 그의 평생의 삶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삶이 되었다.
한편, '지고한 가치'로 번역된 '휘페레콘'(hyperechon)은 '~위에', '~을 넘어서는' 이란 의미의 전치사 '휘페르'(hyper)와 '가지다', '소유하다' 라는 의미의 동사 '에코'(ech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위로 올라가다', '뛰어나다'(로마13,1; 1베드2,13), '탁월하다','능가하다'(필리4,7)라는 뜻을 지닌 '휘페레코'(hyperecho)의 현재 분사형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가장 고상한 궁극적 가치가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복음(루카15,1~10)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2)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정한 자 혹은 율법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로 여겨지던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애초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한결같이 거부하므로(루카14,18~20), 그들은 단 한 명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루카14,24).
그래서 대신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와는 상관없이 보이는 사람들, 곧 세리와 죄인들이 그 잔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 속에서 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세리들,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들과 식사를 즐기셨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랑하는 율법과 거리가 먼 이들을 받아들이고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발이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일을 서슴지 않고 강행하신 이유는 당신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사명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선취하는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루카14장).
여기서 '받아들이고'로 번역된 '프로스데케타이'(prosdechetai; receives; welcomes)의 원형 '프로스데코마이'(prosdechomai)는 어떤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며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로마16,2; 필리2,29).
즉 '프로스데케타이'(prosdechetai)는 도움을 얻거나 존경하기 때문에 맞아들이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대하실 때, 마치 유대인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대하듯 하신 것이다.
경멸받으며 기피되던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파격적 행동은 당시의 사람들, 특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해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일컬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요,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아냥거린 것이다(루카7,34).
유대인에게 있어서 '함께 식사하는 행위'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같은 부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사람들 중에서도 경멸받는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필리2,7). 하지만 잃어버린 자들인 세리들과 죄인들이 초청을 받아들여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자들이 분명하기에,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당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루카 복음 15장 6절과 10절이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와 '잃은 은전 한 닢의 비유'의 결론이 되어서, 잃어버린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그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 준다. 이런 기쁨은 한 명의 죄인이라도 찾고 찾으시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발견할 때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들을 마침내 하느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 돌아온 죄인들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는 반드시 놀라운 기쁨이 생겨난다.
루카 복음 15장 10절의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는 표현은 죄인의 회개가 하느님께 속한 천사들도 기뻐할 정도로 너무도 중요한 사건임을 나타낸다.
<구원의 기쁨, 회개의 기쁨>송영진 모세 신부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루카 15,5-6).”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하고 말한다(루카 15,9).”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는
함께 기뻐하자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회개해서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초대입니다.)
‘잃은 양’이었던 우리가
회개해서 ‘되찾은 양’이 되면,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데,
사실 그것은 우리에게도 큰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구원을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양을 되찾고 나서 벌이는 잔치의 주인공은 주인이기도 하고,
‘되찾은 양’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이런 선고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2,13).”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30).”
여기서 ‘울며 이를
간다.’는 말은, ‘후회, 분노, 절망’을 나타냅니다.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또는 자기를 멸망시킨
하느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완전한 절망.
(후회와 분노와 절망 자체가 지옥의 형벌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구원을 받게 된
사람은 이런 말씀을 듣게 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 자체가 천국의
행복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잃은 양’은 ‘부러진
갈대’와 같습니다.
‘되찾은 양’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받은 ‘성한 갈대’입니다.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루카 15,4) ‘부러진 갈대’를 어떻게든 고쳐서 ‘성한 갈대’로 만드시는 의사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와 노력입니다.
지금 ‘잃은 양’이나 ‘부러진 갈대’처럼 살고 있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찾으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어떻게든 고쳐 주실 것이고 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포기해 버리면,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배반자 유다는 ‘잃은
양’이었지만, 자기 스스로 포기하고 자살함으로써 결국 목자를 떠나버린 양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이렇게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완전히 ‘되찾은 양’이 되어서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사람.
2) ‘잃은 양’으로 살고 있긴
하지만 목자에게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
3) 어떤 때에는 ‘잃은 양’이 되었다가, 어떤 때는 ‘되찾은 양’이 되기도 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
4) 몸은 목자와 함께 있지만 한눈을 팔면서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사람.
5) ‘잃은 양’인데도 자기가 ‘잃은
양’인 줄 모르고 있는 사람.
6) 목자가 필요 없다고 하면서 목자를 거부하는 사람.
7) 참 목자가 누구인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이 ‘잃은 양’인 줄 모르고 있었던 ‘잃은 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회개시키려고, 즉 그들을
‘되찾은 양’으로 변화시키려고 많은 애를 쓰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자기들이 ‘잃은 양’이라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되찾은 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끝까지 ‘잃은 양’으로 남아 있다가 결국 ‘버림받은 양’이 되었을
것이고...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은 겉으로는 모두 ‘되찾은 양’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또는 기쁨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자기가
정말로 ‘되찾은 양’인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왜 기쁨이 없는지, 그 원인과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기쁨이 없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죄 속에서 살고 있다면 기쁨이 없습니다.
회개를 했다고 해도 제대로 된 회개가
아니었다면 기쁨이 없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은 기쁨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로 성실하게
일했지만, 마음속에 기쁨은 없고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가 바란 것은 아버지와 함께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세속적인 즐거움과
재미였기 때문입니다(루카 15,29).
기쁨이 없었으니, 그의 성실함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실함이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거짓 성실’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그런 식으로 한다면, 그것은 무척 힘든 고역이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신앙생활 자체가 기쁘기 때문에 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굿뉴스게시판 우리들의 묵상 107851
찬미예수님! 김동식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신부님 글에~‘잃은 양’이었던 우리가 회개해서 ‘되찾은 양’이 되면,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데,~~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해서가 맞나요? 셩경 루카 복음15장을 잘 살펴보시면 양의비유, 은전의비유, 두아들의 비유가 한 이야기라는걸 볼수 있어요. 회개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랍니다. 그러므로 늘 감사해야지요. 다시한번 생각해 봅시다. 좋은 하루 허락하시는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올립니다. 살롬. 김종업 (rlawhddjq)
| 오늘의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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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많이 발전하면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가진 것들도 참으로 많아서 부족한 것이 없을 지경입니다.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것이, 꿈만 꾸면 곧 현실이 되는 그런 세상입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부족한 것도 있지만,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