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간 월요일] 더러운 영 (마르코 5,1-20)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 못한 이들을 이야기하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다고 한다. (히브리 11,32-40)
형제 여러분,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타, 다윗과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에 대하여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으며, 약속된 것을 얻었고 사자들의 입을 막았으며, 34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벗어났으며, 약하였지만 강해졌고 전쟁 때에 용맹한 전사가 되었으며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35 어떤 여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식구들을 다시 맞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누리려고, 석방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고문을 받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38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39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40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군대라는 마귀가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몰아내 돼지 떼 속으로 보내어 고쳐 주신다. (마르코 5,1-20)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1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2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3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4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6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7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히브11,32-40)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39-40)
본문은 히브리서 11장 4~38절까지 언급된 옛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혹은 믿음을 가지고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시한다.
본문에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으로 번역된 '마르튀레텐테스'(martyrethentes)는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마르튀레오'(martyreo)의 수동태 과거분사이며, 그것은 어떤 사실의 진실된 모습이라는 인정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특히 11장에서 이 동사는 수동태로만 쓰였다.
여기서 이 표현은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여기에 거명된 사람들, 즉 아벨로부터 사무엘 및 여러 예언자들에 이르기까지, 이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증인이 하느님 자신임을 알게 한다.
그분께서는 언제든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택하거나 적어도 순교를 각오한 모든 이들을 위해 기꺼이 증인이 되어 주시고 그들을 인정해 주신다. 그러나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둘째는 믿음의 옛 사람들이 믿음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아의 구원에 대해 증거를 받았다는 것이다. 비록 그 실현을 그들이 당대에 보지는 못했으나 그 사실에 관해서는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라는 히브리서 11장 1절의 선언을 상기시킨다.
'약속된 것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생전에 메시아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한 사실을 나타낸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전, 곧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죽었던 것이다. 따라서 '얻지 못하였습니다'로 번역된 '우크 에코미산토'(uk ekomisanto)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갈바리아의 죽음을 통한 하느님과의 친교라는 충만한 축복을 얻지 못하였음을 증거한다.
믿음의 옛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약속의 성취를 얻지 못하였다는 본문의 내용과 관련하여 볼 때, 옛 사람들을 위해서는 종국적인 구원은 순전히 미래에 속하여 있고, 우리를 위해서는 그것은 이미 성취되었고,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것이다.
즉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한 약속이 이미 성취되었고, 재림을 통한 종국적 구원은 구약의 옛 사람들이나 신약의 성도들에게 모두 미래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히브리서는 성도인 우리가 현재 차지하고 있는 영적인 특권들과 비교해 볼 때, 옛 계약 아래 있는 영적 특권들이 열등하다는 사상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충분히 뒷받침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마태11,11)
이것은 현재 성도인 우리가 누리는 영적 특권이 구약 시대의 아무리 놀라운 믿음을 지닌 옛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옛 계약 아래 있는 사람들의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음을 잘 알게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본절은 하느님께서 신약 성도들을 위해 구약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좋은 약속을 예비하셨다는 사실을 말한다. 여기서 '내다보셨기'로 번역된 '프로블렙사메누'(probllepsamenu)의 원형 '프로블레포'(probllepo)는 '전에', '앞에'를 뜻하는 전치사 '프로'(pro)와 '보다'를 뜻하는 동사 '블레포'(bllepo)의 합성어로 '미리보다', '앞서 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신약 성도들을 위해 미리 준비하신 더 좋은 것은 무엇인가? '더 좋은 것'으로 번역된 '크레이톤 티'(kreitton ti)는 보다 정확히 번역하면 '더 좋은 어떤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과 그로 인한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친교를 가리킨다.
구약의 성도들은 신약의 성도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구원을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은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계획하신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구약의 성도들이 이 축복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옛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을 통한 구원을 믿음을 가지고 미리 본 반면에, 우리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을 가지고 영접한 것만이 다를 뿐이다. 결국 믿음에 따르는 상급이라는 면에서는 그들이나 우리가 다를 것이 없다.
'우리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본절을 정확히 번역하면,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가 된다. '히나'(hina)가정법 구문'인 본문은 하느님께서 신약 성도들을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목적 혹은 예비하심으로써 빚어진 결과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이것은 우리가 구약의 성도들을 완전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진다는 의미인 것이다.
옛 계약 아래 있던 믿음의 옛 사람들은 스스로는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이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구속 사업을 이루심으로써 믿음의 사람들이 완전함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함께 완전해지는 것이다.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라는 십자가상 예수님의 외침과 부활이 있기 전에는 아직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 사업의 공로와 그 효력이 신약 뿐 아니라 구약의 믿음의 옛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히브12,23). 그리스도의 구원에 그들도 초대된 것이다.
<마귀들과 돼지 떼>
1월 30일의 복음 말씀은 마르코복음 5장 1절-20절, ‘마귀들과 돼지 떼’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마르 5,2-3).”
‘더러운 영’은 ‘마귀’인데, 마귀를 ‘더러운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마귀는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없는 악하고 부정한 존재이며,
사람들도 부정하게 만들어 버리는 존재라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무덤’은 마귀들이 살기에 적당한 부정하고 불결한 장소를 뜻하는데,
마귀들은 죽음의 세력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라는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마귀들을 제압하거나 통제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마르 5,6-7).”
(마귀 들린 사람이 한 말은, 사실은 마귀가 한 말입니다.)
마귀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한 것은 예수님께 굴복한다는 표시인데,
이것은 경외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자기 생존을 위한 방어 차원에서 한 행동입니다.
(굴복하고 싶지 않은데도 굴복하는 척 한 것.)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라는 말은,
자기가 하는 일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말라는 요구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일이나 하고, 나는 그냥 내버려 두어라.”)
여기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라는 마귀의 말은,
신성모독죄, 즉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마귀에게 당신의 권한을 위임해 주셨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5,9).”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이름을 물으신 것은,
마귀의 정체와 본성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의 힘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은,
많은 수의 마귀들이 하나로 뭉쳐서 한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 여기서 ‘군대’ 라는 이름은 그 마귀들의 폭력성과 단결력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당시에 그 지역에는 군대가 민중을 억압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군대’ 라는 마귀의 이름은, 민중을 괴롭히는 군대가 마귀들과 같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독재 정권들도 악의 세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마귀들의 세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마르 5,10-12).”
지금 마귀들이 바라는 것은 지옥으로 쫓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은,
자기들이 인간들 속에 있을 수 없다면
짐승들 속으로라도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고,
이것은 지옥으로 쫓겨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타협안입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자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달려가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마르 5,13).
말 못하는 짐승들이었지만 돼지들은 마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일이 그렇게 될 줄을 알고 계셨을 것이고,
그래서 마귀들의 청을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돼지들이 죽었다는 것은 마귀들이 모두 지옥으로 쫓겨났음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려고 돼지들을 이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마귀들이 자기들 꾀에 빠진 것입니다.
(돼지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겠지만, 또 돼지 떼의 주인도 억울하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마귀 들린 사람이 마귀들에게서 해방되었다는 점입니다.)
돼지를 치는 이들은 놀라서 달아났고, 사람들에게 그 일을 전합니다(마르 5,14).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6-17).”
(여기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는
“떠나라고 요구하기 시작하였다.”로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라고 요구한 것에 대해서,
그들이 은총은 생각하지 않고 경제적인 피해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수님께 떠나라고 요구한 사람들은
돼지 떼 주인이 아니라 지역 사람들입니다.
(물론 돼지 떼 주인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1) 그들은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마귀들이 직접 괴롭히지 않는 한, 그들은 그것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별로 불편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자기들의 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자
그 변화 자체가 싫어서 예수님께 떠나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런 수구(守舊) 집단은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선과 악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친숙한 관습이나 전통을 기준으로 판단하려고만 합니다.
(그런 수구 집단은 그런 이유로 독재 권력을 옹호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은총을 주셨는데도 낯설다는 이유로 받지 않은 자들입니다.
2) 그들은 마귀들보다 더 힘이 센(마귀들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진)
낯선 존재를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마귀들이 쫓겨난 것을 본 그들의 첫 반응은,
“겁이 났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마르 5,15).
마귀들도 무섭지만, 마귀들을 쫓아내신 예수님을 더 무서워했다는 것.
이것은 아직은 믿을 준비도, 은총을 받을 준비도 안 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을 준비를 스스로 잘한 사람이 받게 되는 법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성령을 모독하는 것... 짓밟히는 진심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많은 병자들을 낳게 하실 때, 그 병자들 중에는 마귀들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복음 선포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이 가득 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중심도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이런 일들을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취급해버립니다. 예수께서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떠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당신의 모든 것을 마귀의 힘을 빌어 하는 것으로 취급해버리는 이들의 말이 이치에 어긋남을 지적하십니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는가 말씀하시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율법학자들의 말이 그들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엄청난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꼬기 위해 한 말이 틀렸음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그런 지적이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의 정신, 곧 예수님이 가지신 마음까지 짓밟아버리는 엄청난 모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노기띤 음성으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라고 말문을 여십니다. 그리고 이른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의 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의 말에 이처럼 무서운 저주에 가까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말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를 더러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비방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더러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단순히 비방한 것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받을 수 있는 어떤 욕설에만 해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한 사람이 사람과 세상에 내어 놓은 진심을 짓밟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심이 닿은 모든 사람들, 곧 예수님께서 그동안 고쳐주셨고 아껴주셨던 모든 사랑까지 짓밟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을 전하시러 이 세상에 사람이 되셨는데, 그 사랑을 사탄의 장난 정도로 여기고 넘겨버린다면 곧 하느님의 진심을 왜곡하는 일이기에 예수님께서 크게 속이 상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그 어느 곳보다 하느님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도시에 율법을 수호하는 이들이 하느님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하느님을 사탄으로 내 몰고 있으니 이런 일처럼 허탈하고 화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의 진심을 짓밟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업신여기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진심을 그렇게 대하는 것 역시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입니다.
사랑의 진심을 일방적인 선입견으로 왜곡시키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이라도 충분히 주님의 사랑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고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교만은 주님의 진심마저도 사탄으로 몰아갈 수 있음을 꼭 기억합시다. 그리고 나와 주변 사람들의 진심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선하게 가지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