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간 수요일]예언자 (마르코 6,1-6)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는 주님의 훈육을 견디어 내며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라고 권고한다. (히브리 12,4-7.11-15)
형제 여러분,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14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또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하나라도 솟아나 혼란을 일으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듣고 놀란 이들이 못마땅하게 여기자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마르코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히브12,4-7. 11-15)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6)
주님의 훈육은 영적 자녀가 된 성도에 대한 진정한 부성애의 표시이다. 그분의 훈육은 사랑하시는 이에게만 내리기 때문에 누가 주님의 훈육을 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있음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증거이다.
여기서 '훈육하시고'로 번역된 '파이듀에이'(paideuei)의 원형 '파이듀오'(paideuo)는 본래 '어린이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었는데, 여기에서 '양육하다', '가르치다', '습관을 들이다' 등의 의미가 추가되었다.
구약 그리스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는 주로 '응징하다', '교정하다', '훈계하다' 등을 뜻하는 히브리서 '야싸르'(yasar)의 역어로 나온다. 따라서 70인역에서는 '파이듀오'(paideuo)가 '가르치다'라는 의미보다는 '훈육하다'라는 의미에 보다 가깝다. 이 단어가 본절에서는 하느님의 훈육을 통한 교육이라는 개념을 나타내어 쓰였다.
유대 사상에서는 훈육을 '최후의 심판에서 보호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행동'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히브리서의 저자도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의 훈육이 성도들로 하여금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이기 때문에, 고난 중에 있는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실망하지 말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자녀가 된 당신 성도들을 멸망하는 악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치고 교정하시는 일시적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으로 인한 고난으로 침체에 빠졌을, 당시 히브리서 일차 독자인 히브리 출신의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릇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부모는 실상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나 불의에 가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전혀 상관하지 않으신다면,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내버려 두셨다는 것과도 같다.
하느님께서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되면 계속해서 훈육하심으로써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신다.
가르침이나 교정에는 꾸짖음이나 훈련이 불가피하다. 언제든지 그분께서는 우리 곁에 계시면서 당신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를 교육하며 훈련시키신다.
'채찍질하신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영적 자녀들에게서 허물이 발견될 때에 나타내시는 반응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채찍질하신다'로 번역된 '마스티고이'(mastigoi)는 현재 시제로서 '계속해서 매질하다' 혹은 '계속하여 응징하다'라는 지속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마스티고이'의 원형 '마스티고오'(mastigoo)는 끝에 납덩어리가 달려있는 '채찍'을 의미하는 명사 '마스틱스'(mastik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문자적으로 살점이 떨어지도록 심하게 '채찍질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육체적 폭력 행위를 뜻하는 여러 그리스어 단어들 중에 더욱 가혹한 형태의 처벌을 나타내는데, 후기에는 중대한 범죄에 뒤따르는 로마의 징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의 명령으로 이 형벌을 받으셨고(요한19,1),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사도5,40) 역시 채찍질의 형벌을 받았다. 그 채찍질은 참으로 가혹한 형벌로서 본문에서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무엇때문에 인정하시는 아들, 즉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아들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채찍질하시는가? 그 이유는 그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또한 그 아들을 상속자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본절의 '아들'에 해당하는 '휘온'(hyon)의 원형 '휘오스'(hyos)는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하는 아들이라는 법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내려지는 주님의 채찍이 아프다고 생각될 때, 이것은 그분이 나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증거임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그 채찍은 바로 아들된 우리를 향한 아버지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인 것이다.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복음(마르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4)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자주 사용했던 격언으로 보이는 말씀으로서 그들이 당신을 배척한 이유를 밝히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친숙한 사람에게서 특별한 것이 발견되면 잘 수용하지 않는다는 격언을 통해 당시 나자렛 사람들의 닫혀진 마음을 질타하셨다.
여기서 '예언자'로 번역된 '프로페테스'(prophetes; a prophet)는 '앞에'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pro)와 '보여 주다',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페미'(phemi)의 합성어로서 '앞에서 말하는 자', '미리 말하는 자'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한문으로는 '미리 예'(豫)자가 아니고 '맡길 예'(預)자를 사용한다. 하느님께로부터 위탁받은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예언자'라고 한다. 그러니까 예언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미래의 일을 미리 앞당겨 말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자신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자신들의 잘못과 죄를 들추어내고 비판하는 등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데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강한 거부 반응을 나타냈던 것이다.
여기서 '존경받지 못한다'로 번역된 '아티모스'(atimos; without honor)는 부정 접두어 '아'(a)와 '위엄', '존경'을 뜻하는 '티메'(time)의 합성어로서 '덜 귀하게 여기는'이라는 뜻 뿐만 아니라 '비천한'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표현은 단지 존경받지 못하는 소극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고향 사람들로부터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취급받음을 의미한다.
마르코 복음 6장 4절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친숙한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더 어렵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지 않으신다.
마르코 복음 6장 5절은 구원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불신하는 곳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일어날 수 없음을 계시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 6장 6절의 '믿지 않는 것'으로 번역된 '아피스티안'(apistian; unbelif; lack of faith)의 원형 '아피스티아'(apistia)는 부정 접두어 '아'(a)와 '믿을 만한', '신실한'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피스토스'(pistos)의 합성어로서 '불신앙', '불충실', '불성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믿지 않는 것'의 의미는 단지 온전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 대한 충실과 성실함이 결핍된 것까지를 포함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반응에 대해 놀라셨는데, 여기서 '놀라셨다'로 번역된 '에타우마젠'(ethaumazen; he was amazed at; he marvelled)의 원형 '타우마조'(thaumazo)는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여 당황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일반적인 기대치하고는 다른 반응을 보임에 대한 심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리하여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그의 공생활을 통해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로부터 도리어 온갖 멸시와 모욕을 당하시고, 결국 동족의 고발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1-3).”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을 때,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실 때,
제자들도 그 일을 함께 겪었음을 나타냅니다.
(루카복음 4장 28절-29절을 보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도 그 위기를 예수님과 함께 겪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나자렛 사람들이
제자들을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자렛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놀란 이유와 같을 것입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나자렛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과 권위와 지혜를 느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라는 나자렛 사람들의 말은,
그들이 치유 기적을 직접 목격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인데,
이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에 대해서,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어떤 의사도 친지들에게 의료 활동을 하지 않는다.” 라는 속담이 있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했는데,
아마도 실제로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로 뒤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선교활동을 할 때 사람들이 거부하거나 배척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예언자는 고향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박해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이유를,
“저 사람은 목수로서...” 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목수 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목수는 당시에 낮은 계층의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 가족들이 나자렛에서는 존경받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직업에 대한 편견과 예수님의 집안에 대한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5-6).”
여기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았다.”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그들이 믿었다면,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했을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청하지도 않았고,
기적을 일으키실 기회 자체를 예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청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었던 은총이었는데도, 청하지 않아서 못 받았습니다.)
그래도 몇 명은 예수님을 믿었고, 청해서 은총을 받았습니다.
“놀라셨다.” 라는 말은, “안타까워 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신 것은 존경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존경받지 못하는 것이 서운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
즉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고향이냐, 아니냐, 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고향 사람들을 편애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도 다른 지역 사람들과 똑같이 사랑하셨고,
똑같은 구원의 은총을 주려고 하셨는데,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없는 편견 때문에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은총을 거부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모든 일을 세속적으로만 판단했음을 나타냅니다.
또 이것은 그들의 주관심사는 ‘영적 구원’이 아니라
‘물질적인 복’이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내려 주셨다면,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목수 출신이었다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고 존경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가? 나자렛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
송영진 모세 신부

‘훈육과 채찍질’, ‘책망과 낙심’, 듣기만 해도 맥 빠지는 단어들입니다. 누구나 훈계나 책망을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나를 채근하고 독촉하는 소리를 들으면 낙심하고 맙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하고,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라고까지 격려합니다.
자신을 향한 비난과 책망을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을 줄 아는 사람은 성인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변명과 합리화라는 심리적 자기 방어 기제를 동원해서 시련과 책망을 성장을 위한 훈육의 기회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미 굳어진 나의 고정 관념과 편견이 나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자렛의 예수님 동향인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미성숙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 온 나자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큰 명망을 얻고, 권위 있는 예언자라는 사실을 애써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칭송하다 보면, 함께 자라 왔지만 비교되는 자신들의 초라한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기적은, 하느님의 능력이 나를 움직일 수 있음을 믿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때로는 시련과 고통이, 해이한 내 마음에 채찍으로 훈육하시는 하느님의 표징일 수 있고, 내 고집과 아집으로부터 풀려나 나를 변화시킬 이웃을 만나는 기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편견과 아집으로 굳어진 고집불통의 삶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