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마태 2,13-15.19-23)
집회서의 저자는 부모를 공경하라며, 효행은 잊히지 않으리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고 한다. (집회서 3,2-6.12-14)
2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3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4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5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6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12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13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14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이집트로 피신했던 요셉은 헤로데가 죽었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와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마태오 2,13-15.19-23)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9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21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22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23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 마리아,요셉의 성가정 축일(집회3,2-6 12-14)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3~6)
집회서 제1부(1,1~16,23)에서 저자는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임을 천명한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므로 주님을 제대로 알아 모시지 않으면 그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다(1,14).
여기서 '경외함'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어른을 삼가 공경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말한다. 실제로 저자는 먼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언급한 데(1~2장) 이어서 곧바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가르친다(3장).
오늘 성가정 축일 독서는 집회서 3장 2~6절과 12~14절의 말씀이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3)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6)
이 말씀은 탈출기 20장 12절의 십계명을 연상시킨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공경하라'라고 번역된 '캅베드'(kabbed)는 '무겁다','존귀하다', '많다'는 뜻을 지닌 '카베드'(kabed)의 능동형 명령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존경하라','절대적으로 존귀케 하라'는 매우 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카베드'는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며 경외한다는 문맥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은 부모를 섬기고 공경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잘 보여준다.
사실 부모란 단순히 자식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한 생물학적 매체 혹은 이 땅에서 양육하고 지원하는 물리적 후원자 정도의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바대로 부모는 이 땅에서 하느님을 대신하는 권위를 지닌 존재이므로 자녀는 부모 섬기는 일을 하느님 섬기듯이 정성껏 하여야 한다.
또한 이렇게 부모를 섬기고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섬기며 순종하는 법까지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느님 뿐만 아니라 그 권위를 지상에서 대행하는 우리의 육신적인 아버지이신 부모를 하느님께 하듯 섬겨야 할 것이다.
탈출기 20장 12절에 '오래 살 것이다'라고 번역된 '야아리쿤'(yaarikun)은 '연장하다', '확장하다'는 뜻이 있는 '아라크'(arak)의 사역 능동형 동사로서 '길게 하여 주다', '연장시키다'는 뜻이다. '아이리쿤'(airikun)는 사역형 동사이므로 '길어지게 하시는' 보이지 않는 주어인 하느님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즉, 생명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장수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생명 연장의 약속이 아니라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 삶이 복될 것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실로 하느님께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면, 그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 인생을 또한 책임져 주시지 않겠는가?
사도 바오로는 이 아름답고 복된 약속을 에페소서 6장 1~3절에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자녀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이는 약속이 딸린 첫 계명입니다.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하신 약속입니다."
<피앗사랑>카페의 <강론글모음>의 <부부대화법>과 <천주교교리>의 <십계명; 네째 계명>도 참조하기 바란다.
<성가정>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자다 말고 밤중에 갑자기 일어나서
갓난아기와 산모를 데리고 피난을 가게 된 요셉의 심정은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웠을까?
그런 상황에서는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는 사람에게 가서 의지하려고 할 텐데
천사는 낯설고 먼 외국 이집트로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요셉은 말없이 그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믿음과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한 침묵과 순종은
요셉에게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성덕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그런 지시만 하고 그냥 사라졌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사는 베들레헴에서 이집트까지 성가정의 피난길을 지켜주었을 것이고,
또 이집트에서의 피난 생활도 함께 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믿음은 주님께서 항상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으니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에사우를 피해서 하란으로 도망갈 때, 야곱은 몹시 외롭고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베텔에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5).”
나중에 야곱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천사가 요셉에게 말할 때에도,
하느님께서는(천사는)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너를 지켜 주겠다.”
라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더라도
요셉이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그를 인도해 주셨을 것입니다.)
성가정이 이집트에서 지내는 동안 헤로데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같은 상황이 반복됩니다.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마태 2,19-20)”
요셉은 그때에도 바로 순종합니다.
그런데 이집트로 갈 때와는 조금 다른 상황이 이어집니다.
아마도 요셉은 유다 지역 베들레헴으로 갈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폭군 아르켈라오스가 그 지역을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합니다(마태 2,22).
(믿음이 부족해서 요셉이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두려워했다는 말은 ‘꺼렸다.’로 해석됩니다.)
그러자 천사는 나자렛으로 가라고 지시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세심하게 성가정을 지켜주셨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처음에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라고 말할 때부터(마태 1,20) ‘보호’를 약속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주님께서 언제나 항상 지켜주실 것이니...”)
‘성가정’이라는 말은,
좁은 뜻으로는 예수님, 성모 마리아, 요셉의 가정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넓은 뜻으로는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든 신앙인의 가정들을 가리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성가정을 본받아서 성가정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가정을 지켜주셨던 것처럼
언제나 항상 모든 신앙인의 가정을 지켜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혼인과 이혼에 관해서 가르치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혼인은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맺어 주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가정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은 맺어 주시기만 하고, 또 만들어 주시기만 하고,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신 일이니 계속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보호와 사랑을 믿어야 하고,
믿음 속에서 응답하고 순종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식구들이 모두 세례를 받게 되면,
“드디어 우리 집도 성가정이 되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식구들이 모두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해야 성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이고,
식구들이 모두 일치를 이루고 협력하고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남편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
이 말은, 남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아내들에게도 해당되고,
부모들과 자녀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가정은 ‘작은 교회’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식구들의 사랑은 단순히 혈육에 대한 사랑으로만 멈추면 안 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신앙 공동체의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식구니까 당연히 사랑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여정에서 바로 옆에 있는 영적 동반자이기 때문에
서로 믿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식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또 식구들과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헤로데의 보복을 피해 아기 예수님과 이집트로 피난을 갑니다. 갓 출산한 마리아에게는 너무나 큰 시련과 고통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어려운 고비마다 천사를 보내시어 성가정을 지켜 주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가족 간의 대화와 신뢰마저 점점 무너집니다. 어쩌면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도 그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부족함부터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처음 가정을 꾸밀 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쁘게 지내다 보니 이상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의 뒤만 허겁지겁 쫓아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가정을 실현하려면 가족에 대한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함께 가족의 역할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족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하는 가시가 있습니다. 건강이나 과중한 직장 업무, 동료와의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과중한 학업이나 취업난도 큰 가시입니다. 그런 가족의 아픔을 배려해야 합니다. 가족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하기에 많은 대화가 필요합니다.
가족 모두가 주님을 바라보며 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함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도 이집트 피난길에서 나자렛의 성가정을 지켜 주셨듯이 우리 가정을 모든 위험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성령이여, 오소서. 누리를 새롭게 하소서.
며칠 전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탄생을 기쁜 마음으로 장엄하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오심으로 모든 것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그분께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은 첫 장소가 가정이었기에 오늘 성가정 축일을 지냅니다.
이 축일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띱니다. 현대의 많은 사회 문제의 출발점이 가정이란 점에서 가정을 다시 세우는 것이 새로운 사회 건설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기쁨의 분위기가 끝나자마자 마태오는 이 성가정에 찾아온 위험을 묘사합니다.
자신의 아내와 세 아들마저 처형할 만큼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못할 짓이 전혀 없는 잔혹한 헤로데는 메시아 왕의 탄생에 관한 소문을 들은 이후로 그 아기를 죽이겠다는 일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천사를 보내어 요셉에게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의로운 요셉은 꿈에서 받은 지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곧바로 길을 떠납니다. 밤에 떠났다는 마태오의 언급은 이 성가정이 느꼈을 긴박함과 동시에 요셉의 순명이 얼마나 즉각적인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섭리로 아기는 보호받고 요셉은 아버지 하느님의 보호의 충실한 중개자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분명 아기 예수 중심이지만 아기는 항상 그 어머니와 함께 언급되고 아기와 어머니, 두 단어가 마치 하나의 단어인 듯 반복되고 있습니다. (마태 13.14.20.21절)
이것은 어머니 마리아와 아기 예수 간의 깊은 사랑의 일치를 암시합니다. 마태오는 이 거룩한 가정 구성원의 덕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면서 피난 사건이 가지는 의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이 사건 또한 하느님 말씀의 성취로서 출애굽 사건은 아기 예수의 피난과 귀환 사건의 예표가 되고 아기 예수의 사건은 출애굽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이스라엘과 역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집트로 건너갔다가 하느님 섭리에 의해 구출되었다는 공통의 사실에서 마태오는 두 사건 간에 일종의 예형론 tipologia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오는 이 예형론 안에서 예수님의 삶과 사명 안에 이스라엘 역사가 총체적으로 요약되어 있다는 결론을 얻습니다.
이집트의 속박도, 바빌론 포로 생활도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을 수 없으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던 하느님은 이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재현하는 동시에 그 결실을 맺게 하는 메시아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활짝 열어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외적이고 물리적인 해방을 이루게 한 당초의 출애굽 사건은 이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마태 1,21) 근본적인 해방사건 안에서 완성되며,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가 예수님 안에서 절정과 완성에 이릅니다. 사실 이 근본적인 해방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뤄지는데 루카도 예수님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엑소도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9,31)
새 번역성경에서 ‘세상을 떠나실 일’이라고 번역된 이 그리스어는 탈출, 떠나감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도 출애굽 사건을 하느님의 종말론적 구원 역사에 자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사 11,16; 호세 2,16; 12,10; 미카 7,15)
구원 사건의 재현과 완성 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전망 안에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왜 주님이신 그분께서 악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 이집트로 피신하셔야 했는가에 대한 답이 제시됩니다.
마지막으로 마태오는 귀환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 정착하는 것을 전하며 이것 역시 하느님 말씀의 성취라고 언급합니다. 나타나엘의 말에서 잘 나타나듯이(요한 1,46) 나자렛은 이스라엘 북부 지방의 작은 마을로서 메시아가 바로 이런 동네 출신으로 일컬어졌다는 사실은 그분이 멸시받는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뿐 아니라 무엇보다 낮은 곳에 계시면서 우리 모두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 평범하신 분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수렴하심으로써 모든 당신 백성을 대표하는 보편성을 지니신다는 사실과 함께, 그분의 이 평범함은 우리를 그분과 묶어주는 단단한 끈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삶으로 우리를 당신과 하나로 묶어주셨고 그 일치는 세례를 통해 우리 각자에게 구체화됩니다.
이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간이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관계 특히 가족 관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태도를 요구합니다.
그분과 하나 되었기에 이 관계에서도 언제나 그분이 기준점이요 이상이며, 그분은 이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갈 힘의 원천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족의 모델을 제시해 줍니다.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시편 133,1)

복음: 마태 2,13-15.19-23:
이집트 피난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한 가정이 겪는 고통스럽고도 극적인 사건들에 집중되고 있다. 요셉이나 마리아 혹은 아기 예수가 주인공이 아니라, 한 가정의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하는 말은 한결같이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13.20절)라고 하고 있다. 이는 어느 것도 따로 생각할 수 없는 단일한 결합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복음 전체에 흐르고 있다(14-15절.21절). 여기에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 즉 나자렛 가정의 가족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감정과 행동의 완전한 일치를 강조하고 있다. 서로간의 봉사와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아기 예수’에 대한 사랑이다.
아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적으로 나이 때문에 또 그의 사명 때문에 닥치는 어려움에 대해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징표들을 알아듣고자 하는 마음자세로써 아기를 보호하고 도와주고자 애쓴다.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사람의 협력관계를 볼 수 있다. 가족들 상호간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로 이 가정의 삶이 전개되고 있다.
나자렛 성가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것이다. 우선, 가정의 참된 의미는 오직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를 깊이 나눌 수 있는 곳에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영혼과 육신을 결합시켜주며, 사랑은 삶의 극적인 어려움까지도 극복하도록 해준다. 사랑이 없으면 가정은 무너지고 말며, 사랑이 식어 가는 가정에는 법적 조치도 사회적 대책도 아무 소용이 없다. 가정은 사랑과 그 사랑의 요구가 회복될 때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두 번째 사실은 가정이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은 바로 사랑의 최대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이 진정한 의미의 가정이 되려면, 나자렛 가정과 같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빛과 영감에 항상 개방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가정이 근본적으로 ‘종교적’ 차원을 가져야 하며 하느님께 대한 ‘감각’을 양성해야할 의무도 있다.
세 번째는 나자렛 성가정이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고 하느님께 온전히 개방되어있었기에 이 세상과 인간적인 문제에 ‘개방되어’있다는 점이다. 즉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람이며, 마리아는 예수로 하여금 형제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느끼게 해주는 협력자 역할을 할 것임을 말해줄 것이다.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23절). 이 말씀은 나자렛이 아무런 명성도 없는 보잘것없는 동네이다(요한 1,46참조). 이 동네와 예수님을 연결하는 것은 당신의 겸손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결합을 입증하는 것이다. 가정은 ‘개방된’ 공동체이다. 그것은 가정이 사랑에서 생기고 사랑 안에 자라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안에 폐쇄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다.
한 가정을 이루는 남편과 아내를 ‘한 몸’(창세 2,24)이라고 할 때, 그리고 부모와 자식간을 연결시켜주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몸’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이 그리스도의 ‘몸’이란 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담겨있는 것으로써, ‘하느님의 말씀’과의 항구한 일치가 가족들 모두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랑 속에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가정들과의 만남으로 서로 ‘가르치고’ ‘충고함’으로서 현대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혼인의 의미, 부부사랑, 생명의 가치, 자녀들의 가치, 자녀들의 교육, 부부 상호간의 신뢰 등에 대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개방된’ 가정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 부부간의 넘치는 사랑과 자녀들의 기쁨에 찬,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정’, 한평생 이루어졌으면 하는 이 놀라운 기적은 인간들의 깨어지기 쉬운 사랑을 감싸주고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로 바꾸어놓는 하늘로부터의 ‘축복’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러한 가정을 실제적으로 만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가정 축일은 오늘의 가정이 지녀야할 모든 가치 즉 사랑, 헌신, 희생, 정덕, 생명 존중, 노동, 평화, 환희 등을 알아들을 수 있는 열쇠를 던져주고 있다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말씀하셨다.
- 조욱현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