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간 토요일]빵의 기적 (마르코 8,1-10)
하느님께서는 “너 어디 있느냐?”는 부름에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다고 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고 흙을 일구게 하신다. ( 창세 3,9-24)
9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23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24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엾이 여기시고 빵과 물고기를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게 하시어 사천 명가량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다. (마르코 8,1-10)
1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창세3,9-24)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9)
여기서 '부르시며'에 해당하는 '와이크라'(waiqra; and called)에서 '부르다'('카라'; qara)는 큰 소리로 '외치다'(1사무26,14; 1열왕13,12)라는 의미와 '소환하다'(욥기13,22)라는 의미도 지닌다.
즉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부인할 수 없도록 분명한 목소리로 그를 소환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소환은 아담과 하와 뿐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에게도 이루어진다.
또한 '물으셨다'에 해당하는 '와요메르'(wayomer; and said)에서 '묻다'('이르다';'아마르'; amar; 창세46,33)는 일반적으로 대화하는 것을 가리키나 더 나아가 '권하다'(에스테르3,4)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앞의 '부르다'가 죄에 대해 엄정하신 하느님의 공의를 부각시키는 표현이라면, '묻다'는 연약하여 죄를 지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와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죄는 미워하되 죄악 가운데 빠져 있는 그 인간 자체는 불쌍히 여기시고 몸소 찾아와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는 은혜가 풍성한 분이시다(이사1,18).
한편, '너 어디 있느냐?'에 해당하는 '아옉카'(ayekkah; where are you?)는 '어디'를 의미하는 의문 부사 '아예'(aye)에 '너'를 의미하는 접미사 '카'(ka)만을 붙인 극히 간략한 형태의 의문문이다.
그러나 길게 묻지 않고 간략하게 질문하므로 더욱 가슴 속을 깊이 파고 들며 강한 울림을 남긴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말씀은 모두 생략하신 채 단도직입적으로 아담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만을 표면으로 끄집어 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예'(aye)가 장소를 나타내는 의문부사이지만, 본절은 하느님께서 현재 아담이 있는 장소를 모르셔서 묻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아담으로 하여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으며,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상태인지 반성을 촉구하는 질문이다.
사실 아담은 이 질문을 받자마자 자신의 죄스런 상태를 돌아보고 겸허하게 하느님 대전에 나아와 회개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방문과 자신을 돌아보도록 촉구하시는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기회를 놓쳐 버렸다.
<사천 명을 먹이시다.>
“그 무렵에 다시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마르 8,1-3)”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먹을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에는 먹을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떨어져서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님 곁으로 모여들 때에는
각자 먹을 것을 가지고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사흘 동안 예수님 곁에서 지내는 동안 그것을 다 먹었고,
이제는 먹을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서 사흘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가르침도 듣고, 병도 고쳤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루카 9,11).”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먹을 것에 관한 걱정 같은 것은 하지도 않고,
예수님 곁에서 행복한 마음으로 그 사흘을 지냈을 것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먼저 걱정하셨다는 점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사람들이 먼저 불평한 것도 아니고,
먹을 것이 없다고 사람들이 먼저 걱정한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람들이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셨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려고 하십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라는 말씀에서,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저들은 분명히 길에서 쓰러지게 된다.” 라고
단정적으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혹시 ‘가까운 데서 온 사람들은 괜찮지만,
먼 데서 온 사람들은 쓰러지게 된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닐까?”
예수님께서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구분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먼 데서 온 사람들’만 걱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걱정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을 다 먹여야 하지만,
먼 데서 온 사람들은 특별히 먹을 것을 더 많이 챙겨 줄 필요가 있다.”
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남들보다 갈 길이 더 멀다면, 먹을 것이 남들보다 더 많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넓은 뜻으로 생각해서,
우리의 ‘신앙 여정’에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해도,
즉 신앙생활을 하면서 행복과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는 좀 더 짧고, 누구는 좀 더 긴 여행을 하는 차이가 있지만,
신앙인으로서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할 때도 있고, 세속의 유혹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믿음과 희망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걷다가 지칠 수도 있고, 지쳐서 주저앉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사정을, 즉 우리의 현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 라는 최종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고,
끊임없이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우리 쪽에서 할 일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5-57).”
우리가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힘으로 걸어갑니다.
물론 우리도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힘을 잘 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모든 일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마르 8,4).
이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다시 이 말은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제자들의 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권능을 믿고서,
한 번 더 기적을 일으켜 주십사고 요청한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말과 그들이 한 일은 교회의 역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중개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린 ‘빵 일곱 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빵 일곱 개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셨음을 알았기 때문에
제자들 쪽에서도 빵 일곱 개를 드림으로써 그 기적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한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굶주림은 예나 지금이나 인류가 넘고 싶은 가장 큰 과제입니다. 현대 사회가 비약적인 농업 혁명과 과학 혁명으로 굶주림을 해결해 냈지만,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는 굶주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최근 성인품에 오르신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성녀는, 지구상에 가난한 이들이 이토록 많은 이유를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나눔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는 모두 압니다. 문제는 나눔의 범위를 인맥과 민족, 이념과 체제의 굴레에 가두어 온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분명히 기적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엾이 여기셨다는 말과, 제자들이 가진 일곱 개의 빵과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축복하시고 나누어 주신 행위 이외에, 구체적으로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었고, 빵이 남기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 명을 어긴 아담이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과 대조됩니다.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측은한 마음은, 자기 책임을 그럴듯하게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합리화하는 아담과 하와의 이기적인 마음과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에게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땀을 흘리고 땅을 일구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고달픈 운명이 주어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목마른 군중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는 물음을, 이기심과 탐욕에 물들어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나에게 던지시는 하느님의 물음으로 되새겨 볼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