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르 8,34-9,1)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려 하자, 주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고 온 땅으로 흩어 버리신다. (창세 11,1-9)
1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6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8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며,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신다. (마르코 8,34─9,1)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창세11,1-9)
'바벨탑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혼란' '흩어짐'의 뜻을 지닌 '바벨'이란 말 속에는,
에덴 동산의 범죄 이후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이 집단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담겨 있습니다.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써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는
인간의 오만함을 하느님께서는 단죄하시고 그들의 말을 섞어 흩어 버리십니다.
인간이 신과 같아지려는 욕망은 신화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제4차 산업혁명' 또는 '제4의 물결'로 불리는 기술 융합과
인공 지능 개발을 통해 인간이 '정신'을 창조하려는 새로운 바벨의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오늘의 묵상>발췌-

제 십자가를 지고
중심을 잡아야, 중심을 잃지 않아야, 중심 안에 머물러 살아야 환상의 거짓 속에서 벗어나 한결같은 내적안정과 평화의 삶입니다.
삶은 이벤트가 아니라 평범한 나날입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고 평범한 삶이 혼란하고 무질서해지는 것은 대부분 이 중심을 잡지 못하거나 잃음으로 자초한 결과입니다.
어렵고 혼란한 시절일수록 중심을 잡아야, 중심을 잃지 않아야, 중심 안에 머물러 살아야 몸과 마음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삶의 중심은 두말 할 것 없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기위해 자나 깨나 끊임없이 미사와 성무일도를 바치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수록 굳건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믿음입니다.고백과 믿음은 함께 갑니다.
고백할수록 정체성도 또렷해지고 믿음도 견고해집니다. 한두 번 고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끊임없이 주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믿음도 시들어 버립니다.
주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고백뿐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하여 묻습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자문해야 하는 물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예견한 예수님의 착잡한 심정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복음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물음입니다. 베드로가 수제자답게 제자들을 대표하여 제대로 고백했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스승님이 그리스도란 고백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 우리의 생명, 우리의 진리, 우리의 구원, 우리의 힘, 우리의 사랑, 우리의 희망, 우리의 평화, 우리의 기쁨이란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을 통해 주님은 물론 우리 자신의 정체성도 분명해 집니다. 이런 끊임없는 고백과 더불어 주님과의 관계도 깊어지며 믿음, 희망, 사랑의 내적 힘도 증대됩니다.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살기위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주님께 믿음과 사랑, 희망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의 고백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아마 십자가 수난 시 주님의 고백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보자. 내게 다가와 보아라.”그대로 확신에 넘친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런 믿음의 힘을 지닌 사람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사람인데 누구를 무서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행동 없는 양심이 죽은 양심이듯이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진정 고백하는 믿음은 행동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며 이래야 믿음의 진정성이 입증됩니다.
말로만의 고백이 아니라 온 마음과 몸의 실천으로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다음 야고보 사도의 말씀입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과연 우리의 믿음은 산 믿음입니까? 죽은 믿음입니까?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실천의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복음말씀입니다. 그대로 역동적 믿음의 모습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말로만 고백할 뿐 아니라 실제로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좌절시키려는 베드로를 혹독하게 꾸짖는 주님이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십자가의 짐을 지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여 편하고 쉽게 살려는 우리 모두를 향한 질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탄은 우리 모두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안팎으로, 우리를 십자가의 짐을 내려놓고 편하고 쉽게 살아보라는 선으로 위장한 사탄의 유혹은 얼마나 많고도 집요한지요.
하여 주님의 기도 중 후반부,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구해 달라.’ 는 청원이 그리도 절실한 겁니다.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믿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믿음뿐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주님과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는 일은 바로 자기 목숨을 구하는 길이자 참 나를 실현하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억지로의 실천하는 믿음이 아니라 자발적 믿음의 실천은 주님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넘치는 은총으로 자발적으로 기쁘게 자기를 버릴 수 있고 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거창한 믿음의 실천이 아니라 아주 소박한 믿음의 실천입니다.
구체적으로 제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위한,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버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감하게 제 책임의,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삶의 목표이자 방향인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실천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이 길 말고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사람이 되는 길, 성인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평생 이렇게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 모두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잘 지고 주님을 잘 따를 수 있도록 충분한 은총과 힘을 주십니다. 아멘.
- 성요셉수도원 이수철(프란치스코)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르 8,34-37)”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길도 없고, 예외적인 특권이나 특혜를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내 뒤를 따르려면’은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은,
신앙생활은 언제나 항상 예수님이 기준이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도 예수님이고,
그 생명을 얻는 방법을 정하는 일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판단할 수도 없고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항상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살아야 합니다.
자기 주관이나 사상이나 의견을 버려야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인데,
이 말씀에는 “죽음도 각오해야 한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길 끝에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물만 얻을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또 그 길에 항상 십자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항상 어렵고 힘든 길만 걸어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다보면 쉬운 구간도 나오고 어려운 구간도 나오는데,
쉬운 구간만 골라서 걸어갈 수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쉽든지 어렵든지, 편안하든지 힘들든지 간에 그 길만을 똑바로 걸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제 십자가’ 라는 말에는
사람마다 십자가의 크기와 무게가 다르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공평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하느님(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각자 자신이 질 수 있을 만큼의 십자가만 주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다른 사람의 십자가와 비교하면 안 됩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라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나서 보면,
하느님은 지극히 공평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렇게 하였다.
더러는 더 많이, 더러는 더 적게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오메르로 되어 보자, 더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더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저마다 먹을 만큼 거두어들인 것이다(탈출 16,17-18).”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현세의 삶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고”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일이 목숨을 잃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얻으려고 노력했다면 얻을 수도 있었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사실상 잃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현세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또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나의 복음과 나를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은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 출세,
세속에서의 성공 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각자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것만을 향해서 가게 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씀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온 세상을 다 차지한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소원을 이루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살다가 실제로 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살다가
실제로 그 목표를 이룬 사람도 있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쪽 세상에서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에는
실패한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지금 당장에는 대통령이 되는 일이, 또는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는 일이,
또는 지금 자기가 세운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어리석은 하루살이’의 인생입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나기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2-6).”
“인생은 허무하다.”는 말만 되뇌면서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16,24-28)(마르 8,34-9,1)
(마태16,24-28)대체복음묵상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6)
'목숨을'로 번역된 '프쉬켄'(psychen)의 원형 '프쉬케'(psche)는 '숨쉬다', '바람불다'라는 뜻을 가진 '프쉬코'(psycho)에서 유래한 명사인데, '목숨'(life; 요한10,17)이라는 뜻 뿐만 아니라 '영혼'(soul; 마태10,28)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 후에도 소멸되지 않는 영혼도 가리키는 이중적인 용어이다.
마태오 복음 16장 25절에 나오는 역설적인 교훈은 이러한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 간의 대조 관계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즉 자신의 육적인 생명에 대한 애착만을 갖고 이것을 지키려는(히브2,15) 자는 끝내는 육적인 목숨과 더불어 영적 목숨까지 잃게 되지만(루카12,20),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 자신의 육적인 생명을 주님을 위해 바치고자 하는 헌신된 삶을 살 때, 오히려 그의 영혼이 살 뿐 아니라 종말에 그 육체 또한 주님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임을 뜻한다(야고1,19; 묵시21,4).
또한 '얻고도'에 해당하는 '케르데세'(kerdese; he gains)는 능동태인데 반해,'잃으면'에 해당하는 '제미오테'(zemiothe; lose)는 수동태로 되어 있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태'(voice)는 본문의 의미를 더 깊이 있게 전달해 준다.
즉 이 문장은 사람이 온 세상(천하)을 얻고자 적극적으로 힘쓰는 노력은 자발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하느님께서 그의 목숨을 거두어가심은 인력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이 구절을 직역하면,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위한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what shall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이다.
한글 새성경에서 '제 목숨을' 다음에 '주고'에 해당하는 '도세이'(dosei; shall give)가 빠져 있는데, 이것은 미래형이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일이 관습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나타내는 '격언적 미래형'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낸다. 결국 인간 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생명의 단(일)회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앞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25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최고로 소중히 여기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혼란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인 진리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있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유한한 육적인 생명보다 훨씬 소중한 영생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영생의 큰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그토록 소중한 목숨까지도 권능의 예수님께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각오를 촉구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