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화요일]첫째와 꼴찌(마르코 9,30-37)

2017. 2. 21. 오전 7:50:20

글자


 

[연중 제7주간 화요일]첫째와 꼴찌(마르코 9,30-37)

끝까지 섬기는 자가 되자

집회서의 저자는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키고 주님을 믿으라며, 주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너그럽고 자비하시다고 한다. (집회 2,1-11)
1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2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3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4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5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6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7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8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을 믿어라. 너희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9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바라라. 그분의 보상은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이다. 10 지난 세대를 살펴보아라. 누가 주님을 믿고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을 경외하면서 지내다가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 누가 주님께 부르짖는데 소홀히 하신 적이 있느냐?
11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로 논쟁하는 것을 보시고, 첫째가 되려는 이들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며 어린이 하나를 그들 앞에 세우신다. (마르코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제1독서(집회2,1-11)


집회서 1장 14절에서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라고 했다. 여기서 '경외함'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어른을 삼가 공경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말한다. 

오늘 집회서 2장 1~11절 말씀은 모든 지혜의 기초요, 시작인 <주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전제 조건이요, 필연적 통과 과정인 시련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으며, 그 시련을 겪을 때 어떤 삶의 자세와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계시해 준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을 믿어라,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집회2,1~7) 

거룩하신 주님을 경외하는 인간들이 먼저 자신이 갖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인간성의 찌꺼기와 본성적인 요소들이 걸러져야 하기 때문에 시련을 통한 정화의 작업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 단련의 과정이 인간 본성에 반하기 때문에 상당히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워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붙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동시에 그럴 때 마지막에는 번창하며(3절)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인 선물이 보상으로 주어진다(9절)고 말한다.  

오늘 집회서 말씀은 신약의 야고보 서간 1장 2절이하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야고1,3) 

먼저 여기서 '시험'으로 번역된 '도키미온'(dokimion)마치 금, 은을 뜨거운 불 속에 넣고 녹여 그 진위를 시험하듯이 믿음의 진위를 입증하거나 시험하는 단련(연단)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야고보 서간 1장 3절 베드로 전서 1장 7절에만 나타난다. 

즉 야고보서 1장 3절에서 이 단어는 시험 곧 단련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진위를 테스트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성도의 삶에 있어서 이것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되풀이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복적으로 닥치는 믿음에서의 시련그것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여기서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넨'(hypomonen)의 원형 '휘포모네'(hypomone)는 '~아래에' 란 뜻의 전치사 '휘포'(hypo) '머물다'(마태10,11)란 뜻의 동사 '메노'(me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문자적으로는 어떤 상황아래 흔들림없이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며 나아가서 '확고부동', '복지부동', '항구성'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휘포모네'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과 경건을 충실하게 지켜나간다. 

결론적으로 여러가지 시련을 기쁨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이유는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자세를 온전히 구비하게 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시험을 당하는 그 당시는 비록 그것이 힘겨울지라도 결국 믿음으로 잘 인내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난의 시험없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영적 기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2012년 9월23(일) 오늘의 묵상, 연중 제25주간 일요일, 마르코 9장 30절-37절

<낮춤과 섬김>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 말씀은, “가장 높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관한 방법론이 아니라, 신앙인의 기본자세에 관한 가르침인데,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고 하지 말고,
모든 이의 꼴찌가(종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속마음에 ‘높임’을 받으려는 욕심이 있음을 감추고, 겉으로만 낮추면 안 됩니다.
그것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이 될 뿐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3-15).”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 싶어서 꼴찌가 되신 분이 아니라,
원래 첫째이신 분인데도
당신 스스로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신 분입니다.
그것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낮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5-8).”
신앙인은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는 사람이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에 계시니 신앙인도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이 말씀은, ‘섬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세속에서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보다 낮은 사람을 섬기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가르침은, 사실은 ‘모든 사람’을 섬기라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에는 자기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씀은,
이 가르침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 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힘없고 가난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지금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간에
자기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최후의 심판’ 때에 하시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가장 작은 이가 곧 나다.”입니다.
신앙인은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시며 스승님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장 작은 이가 곧 나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신앙인은 작은 이들을 섬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작은 이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분입니다.)
‘섬김’의 경우에도 속마음과 다르게 겉으로만 하면 안 됩니다.
만일에 속으로는 예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만 섬기는 척 한다면, ‘위선’이라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작은 이들을 섬기는 일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인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하는 사람입니다(마태 7,21).
여기서 ‘받아들이다.’ 라는 말은, ‘섬기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말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너희를 받아주시기를 바란다면,
너희가 먼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여라.
만일에 너희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너희를 받아주시지 않을 것이다.”


어느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제자들의 모습도
‘작은 이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마태 12,1).
그때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은 보지 않고
밀 이삭을 뜯어 먹는 모습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마태 12,2).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사이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만일에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의 배고픔을 헤아려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것은 작은 이들에게 ‘섬김’을 실천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섬김’은 사실상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보다 위에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이것은 세속의 법에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만일에 법에 사랑이 없다면, 그 법은 사람을 억압하는 나쁜 힘이 될 뿐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묵상

무한 경쟁 시대에 성공은 남보다 더 성실히, 더 일찍 자신의 능력을 보일 때 얻어지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정말 열심히 살아 가난에서, 실직에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우리 사회는 과거처럼 우직하게 열심히만 산다고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뜻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첫째가 되는 길만 가르쳐 온 세상에서 스스로 꼴찌가 되고, 사람들에게 종처럼 보이고, 학교에서 왕따를, 직장에서는 실직을, 상점에서는 손님들의 갑질에 무시당하는 것이 어떻게 성공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으셔야 할 메시아의 수난을 알아듣지도 못했고,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정권을 잡으시면 어떻게 할지 자기들끼리 서열 다툼까지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내 영이 맑아져서 세상 것보다 하느님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욕망이 더 커지는 우리의 모습이 제자들에게서도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성공의 길은 역설적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어린이란 약하고, 때로 고집스럽고, 성숙하지 못해서, 요즘 같으면 키우고 싶지 않은 애물단지 같은 존재를 뜻합니다. 그래서 그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허영과 욕심, 자존심까지 버리면서 사람들을 섬기려 할 때 진정한 자유를 체험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집회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믿음은 꼴찌가 되어도, 남의 종이 되어도 행복이 하느님 손에 달려 있음을 굳건히 믿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닐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맹사성은 조선 시대의 학자입니다.

 나이 열아홉에 장원 급제를 하여 스무 살에 군수가 됩니다.

젊은 그는 나이 많은 선비를 찾아가 묻습니다.

“어른께서는 군수로서 삼아야 할 좌우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건 어렵지 않소이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는 일입니다.”
“그거라면 삼척동자도 아는 이치 아니오. 먼 길을 온 제게 고작 그 말을 하시다니요?”

맹사성은 거만하게 일어서려 합니다. 그러자 선비는 차 한 잔을 빌미로 붙잡습니다.

그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습니다. 차를 따르면서 두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비는 찻물이 넘치는데도 자꾸만 찻잔에 차를 따릅니다.
“어르신,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맹사성이 소리쳤지만 선비는 계속 넘치도록 따릅니다.

그러고는 화가 나 있는 맹사성을 쳐다보며 말합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면서 어찌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모릅니까?”
많이 안다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풍성함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싫어하면 하늘도 싫어합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면 하늘 역시 인정합니다.

세상은, 겸손하고 섬기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조금 안다고, 조금 자리가 높아졌다고 우월감에 젖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러한 실수를 계속합니다.


  •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영원한 생명 (마르 10,17-27)17.02.27조회 47[연중 제7주간 금요일]이혼장 (마르코 10,1-12)17.02.24조회 94[연중 제7주간 화요일]첫째와 꼴찌(마르코 9,30-37)17.02.21조회 113[연중 제7주간 월요일]벙어리 치유 (마르코 9,14-29)17.02.20조회 124[연중 제6주간 토요일] 변모사건 (마르코 9,2-13)17.02.18조회 51[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르 8,34-9,1)17.02.17조회 51[연중 제6주간 월요일]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 (마르코 8,11-13)17.02.13조회 52[연중 제5주간 토요일]빵의 기적 (마르코 8,1-10)17.02.11조회 52[연중 제5주간 목요일]이교여인의 믿음 (마르코 7,24-30)17.02.09조회 49[연중제5주간월요일]구원 (마르코 6,53-56)17.02.07조회 51[연중 제4주간 수요일]예언자 (마르코 6,1-6)17.02.01조회 51[연중 제4주간 화요일] “탈리타 쿰!” (마르코 5,21-43)17.01.31조회 52[연중 제4주간 월요일]더러운 영 (마르코 5,1-20)17.01.30조회 287[1월 28일 토요일 설날] 준비하여라 (루카 12,35-40)17.01.28조회 272[연중 3주간 금요일] 겨자씨 한 알 (마르코 4,26-34)17.01.27조회 54[연중제3주간 목요일] 일꾼 (루카 10,1-9)17.01.26조회 53[연중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뜻 (마르코 3,31-35)17.01.24조회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