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화요일]첫째와 꼴찌 (마르 10,28-31)

집회서의 저자는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라며, 의로운 이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한다고 한다. (집회 35,1-15)
1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고, 2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3 은혜를 갚는 것이 고운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4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5 악을 멀리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 속죄하는 것이다.
6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7 사실 이 모든 것은 계명에 따른 것이다.
8 의로운 이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하고, 그 향기가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올라간다. 9 의로운 사람의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그 기억은 잊히지 않으리라.
10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네 손의 첫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라. 11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12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 13 주님께서는 갚아 주시는 분이시기에,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14 그분에게 뇌물을 바치지 마라. 받아 주지 않으신다. 15 불의한 제사에 기대를 갖지 마라. 주님께서는 심판자이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다는 제자들에게,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마르 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연중제8주간 화요일 제1독서(집회35장,1-15)
집회서는 지혜와 이스라엘 전통 사상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집회서의 신학 사상 중 가장 주목할 내용은 하느님의 지혜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곳을 모세의 율법이라고 본 것, 즉 율법과 지혜를 동일시했다는 점이다(집회 24,23~34).
따라서 집회서가 제시하는 하느님을 가장 잘 섬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율법에 절대적으로 충실하게 사는 것뿐이다(집회1,26;6,37;19,20.24).
특히 오늘 독서의 말씀은 율법과 계명 준수를 감사의 제사와 자선의 행위와 관련지으면서 그것이 악과 불의와 거리가 먼, 의로운 영혼 상태에서 이루져야 함을 계시한다.
"주님 앞에 빈 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사실 이 모든 것은 계명에 따른 것이다. 의로운 이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올라간다. 의로운 사람의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그 기억은 잊히지 않으리라.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네 손의 첫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라.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것 바쳐라. 주님께서는 갚아주시는 분이시기에,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집회35,6~13)
오늘 독서 말씀에서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라고 촉구하신다. 사실 소출과 수입의 열의 하나를 봉헌하는 것은 내가 수확한 것과 수입의 주권과 절대권이 우리 인간을 영육간에 늘 돌보아 주시는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내 자신이 땀흘려 일하고 지혜를 짜내고 해서 이만큼 힘겹게 얻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건강과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돌보아 주신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 십일조의 정신이고 봉헌의 영성이다.
그러니까 돈의 액수를 넘어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주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 봉헌과 십일조의 정신이며, 인본주의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 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십일조를 기쁘게 기꺼이 하면 갚아주시는 주님께서 일곱 배(집회35,13)로 갚아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일곱배는 백만원을 봉헌했으면 일곱 배인 700만원으로 갚아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안의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과 '충만'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주님 대신에 사람이 계속해서 주님 뜻대로 주님께서 주신 재화를 잘 쓰면 한없이 충만하게 그 이상으로 흘러 넘치도록 베풀어 주시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덮어놓고 십일조를 하면 일곱 배로 베풀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집회서 35장 8절과 9절을 보면 '의로운 이의 제물'이라고 전제 조건이 붙어 있다. 말하자면 대죄가 없는 은총지위에서 십일조를 봉헌할 때 일곱 배로 갚아주신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영이신데, 동물의 번제물과 그 향기를 왜 드시고 맡으시며, 돈이 왜 필요하시겠는가!
다만 제물은 인간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드리는 찬미와 감사와 속죄의 제사와 관련되기에 우리 인간을 거룩하신 주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만드시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늘 우리 인간들 자신의 삶속에 주 하느님을 참 주인과 참 부모로, 살아계신 주님으로 모시고 살으라는 하느님 중심의 사상 (신본주의; 神本主義)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10,28-31)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29~30)
마르코 복음 10장 29절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라고 기록되었지만, 마태오 복음 19장 29절에서는 '내 이름 때문에'라고 기록되어 있고, 루카 복음 18장 29절에서는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내 이름', '나와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다같은 의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며,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때문에', '~을 위하여'에 해당하는 '헤네켄'(heneken; for; for sake)은 전치사 '헤네카(heneka)의 소유격인데, 여기서 두 번 언급된 것은 이 전치사와 함께 쓰인 단어들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예수님 당신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족이나 집 등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는 것만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버린 사람'에 해당하는 '호스 아페켄'(hos apheken; one who has left)을 통해서 외적 및 내적 분리를 의미하는 포기를 가르치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내어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 속으로부터 진정으로 예수님을 가장 소중한 분으로 여기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되는 절대적인 기본 조건인 것이다.
한편, 마르코 복음 10장 30절의 '백 배'(a hundred times)는 반드시 산술적 의미의 백 배가 아니며,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내어버린 것의 백 배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많은 보상을 받게 됨을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이다.
그리고 그 보상도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그것보다 휠씬 더 소중한 영적인 축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그 보상이 현재와 이 세상의 삶이 끝 난 후 오는 세상인 내세 (미래)에 모두 받게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맛보며 살고,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 때문에 혈육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떄로는 핍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은 영적으로 더 많은 가족을 얻으며, 마음 속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와 기쁨을 주님 안에서 누리고 살기 때문에 이 말씀은 참된 내용인 것이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예수님을 위해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풍요'만이 아니라 '박해'도 겸해서 받는다는 내용이 여기 마르코 복음에만 나온다. 여기서 '박해'에 해당하는 '디오그몬'(diogmon; persecution)의 원형은 '디오그모스'(diogmos)이다.
신약에서 '디오그모스'(diogmos) 말고도 '박해'를 나타내는 단어가 하나 더 있는데, 코린토 1서 4장 12절에 나오는 '블라스페메오'(blasphemeo)라는 동사이다.이 동사의 뜻은 '비난하다', '중상하다', '헐뜯다'이다.
이 두 단어는 의미상으로는 모두 '박해', '핍박'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세부적으로는 '블라스페메오'(blasphemeo)는 '말을 통한 박해'이고, '디오그모스'(diogmos)는 '구체적인 행위로 가해지는 박해'를 가리킨다.
여기 본문에서는 '~중에', '~가운데', '~함께'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메타'(meta; with)와 함께 쓰였는데, '메타 디오그몬'(meta diogmon; with persecution)은 '박해 중에', '박해 가운데'라는 뜻이 된다.
이 말이 공관 복음서 중에 마르코 복음에만 기록된 것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자신의 일차적 독자인 로마 신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로마에 있는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 황제 네로의 극심한 박해 속에 있음을 알고, 그들이 겪고 있는 박해가 그리스도인이면 필연적으로 겪어야 되는 것임을 강조하며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 내용을 부각시켰다(마태5,10~12).

비우는 만큼 채워주신다.
세상 사람들은 소위 출세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며 권력을 누리려고 합니다.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국회의원이나 의회의원 지방자치 단체장이 되려고 하다가 명예를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회 청문회활성화법이 통과 되었는데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자기들이 통과 시켜놓고는
여야가 바뀌니까 소신도 바뀝니다. 잇속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출세라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
(마르10,28).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 받는다는 것을 출세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나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랑
삼아 말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내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한자리 주십시오.’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셨을 때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길가에서 논쟁한
것에서 드러났고, 세 번째 예고를 하셨을 때에도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이유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려야지, 자신을 위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려면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지닌 것을 첫째로 여기지만, 하늘에서는 많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봅니다. 무엇을 위해 썼느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 기쁘게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내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요? 아니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요? 재물, 권력이나 명예.
자식이나 건강을 첫째라고 생각한다면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
마음에 드는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여 마침내 천상에서 첫째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인간관계나 소유물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것에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만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비우는 만큼 그분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1베드1,13-15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라파엘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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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늘 시간이 부족하다면서 쩔쩔매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왜 그렇게 바쁘게 사십니까?”라고
물었지요.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많은 건물과 땅 그리고 돈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돈을 버려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왜 그렇게
돈을 버십니까?”라고 묻자 이번 역시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만족을 하지 못하고 더 큰 권력을 꿈꾸는
정치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왜 그렇게 큰 권력이 필요합니까?”
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그의 대답 역시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든 사람이 찾고 있는 ‘행복’이 정말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나이 지긋한 철학자를 찾아가 “행복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철학자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 평생 공부했지만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대기업 회장을 찾아가서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회장은 “그것을 알기 위해서 평생 돈을 벌었지만
아직도 행복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 답답한 이 사람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한 걸인을 만났습니다. 약간의 동전을 깡통 안에
넣으면서 뜬금없이 “행복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먹을 것과 잠잘 곳만 있으면 행복한 것 아닙니까?”
생각해보면 행복이란 별 것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들을
모으고 모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럴수록 행복하지 않은 느낌만
계속됩니다. 그러나 앞서 나오는 그 걸인의 말처럼 아주 자그마한 것에
만족할 수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커다란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재산까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함을 그리고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가족마저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 심지어
혈연관계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토록
원하는 참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첫째가 되려고 세상의 것들을 모으고 세상의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했지만, 이것들은 이 세상 안에서만 첫째의 모습일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들을 멀리해서 비록 세상 안에서는 꼴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아 첫째가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디서 첫째의 자리를 얻는 행복을 원하십니까? 세상 안에서도
첫째, 하늘 나라에서도 첫째를 원하시죠? 그러나 둘 다는 안 됩니다.
- 행복은 우리가 어떻게 끝을 맺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시작하느냐의
문제이다. 또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바라느냐의
문제이다(스티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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