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루카 9,22-25)

2017. 3. 2. 오전 7: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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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루카 9,22-25)

2010. 2. 18.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 루카 9,22-25

모세는 백성에게,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을 내놓는다며,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라고 한다. (신명 30,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며,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 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풍수원 성당 야외 십자가의길과 묵주동상(2015.3.20.금)-62장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1독서(신명30,15-20)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5~16)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 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7~18) 

신명기 30장 15절에서 '보아라'(레에; reeh)라는 말이 쓰인 것은 이제 최종적인 선택이 각 개인에게 남았으니, 마지막으로 모든 주의를 기울여 생각하라는 의미 담겨있다. 

'너희 앞에'에 해당하는 '레파네카'(lepaneka;'네 얼굴 앞에'라는 뜻)'오늘'에 해당하는 '하욤'(hajom)이 전하는 뉘앙스는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의 두 길에 대한 제시가 매우 도전적이며 현재적이란 사실이다. 

즉 결코 비밀속에 감추인 신비스러운 그 무엇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얼굴 앞에서 볼 수 있는 실제적인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제시하는 것이다.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 (15) 

여기서 '행복'(복)으로 번역된 '토브'(tob) '좋은'(good)이라는 의미이며, 정관사 '하'(ha)와 결합하여 '좋은 것' 또는 '선'(善)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행'(화)으로 번역된 '라'(la)는 '악'(惡; evil)을 의미한다. 

여기서 '행복과 불행' '선과 악'을 말하는데, '선과 악' 어떤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각각 율법에 순종하는 삶 약속하는 '축복'(번영; 신명4,40; 5,29.33; 6,3.18.24; 10,13)과 그와 반대되는 '저주'(신명4,26; 8,19)를 말하는 것이다(신명11,26). 

'축복'을 의미하는 '선'(善)과 '저주'를 의미하는 '악'(惡)은 현세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에 '생명' '죽음'은 내세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예레미야 21장 8절에도 '이제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놓아 둔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두 길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여부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주어진 부가물이 아니라 우리 삶의 생명 자체이기에, 비록 계약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 선택 사항인 것처럼 주어졌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그 말씀을 지키는 것만이 생명을 위한 유일한 선택임을 알 수 있다.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16) 

신명기 30장 15절에 명사로 소개된 생명과 행복을 동사를 사용하여 한층 더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너희가 살고' 번역된 '하이타'(haitha)는 '살다'는 뜻을 가진 '하야'(haja)동사의 2인칭형이다. '하야'(haja)동사가 풍기는 뉘앙스는 '생명과 존재를 지켜가다'혹은 '생명을 소유하다'이다.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생명과 존재를 지켜가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또한 '번성할 것이다' 번역된 '라비타'(rabitha)는 '많아지다'란 뜻을 가진 '라바'(rabah)동사의 2인칭형이다.  

'라바'동사는 특별히 수적인 증가 나타내는 말로서 여기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후손의 축복이(창세15,5) 성취되는 것 의미한다. 이것을 볼 때 율법의 순종을 통해서 하느님의 백성이 누리게 되는 궁극적인 축복은생명과 계약 공동체의 백성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율법이 지향하고 있는 최종 목적지가 단순히 물리적이고 육적인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을 거쳐 새 예루살렘까지 향해 있음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 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7~18)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17) 

'돌아서서'로 번역된 '이프네'(ipne)는 '얼굴을 ~로 향하다','돌아서다' 뜻을 가진 '파나'(pana)동사의 미완료형으로서, '돌아서서 뒤를 바라보는'이란 뉘앙스를 가진다.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에 해당하는 '이프네 레보브카'(ipne lebobka)를 살펴보면, 마음의 고민을 가지고 생각하다가 결정하는 상황이 아니라, 이미 마음에 굳힌 생각이 그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국 모든 죄악과 불순종이 사람이 결정한 의지적인 생각에서 비롯됨 암시해 준다.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7)

 '유혹에 끌려'로 번역된 '닛다흐타'(nidahtha) '추진하다','몰아내다' 뜻을 가진 '나다흐'(nadah)의 수동형 2인칭으로 '내몰리다','이끌리다' 뜻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욕심에 이끌리어 행동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또한 '경배하고'로 번역된 '히쉣타하위타'(hishethahaita)는 '굽히다', '구푸리다'는 뜻을 가진 '샤하'(shaha)의 재귀형으로서,'스스로 몸을 구푸려서 경의를 표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에게 경배하는 몸짓을 묘사하는 말 뿐 아니라 절대적인 순종을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더욱이 '그들을 섬기면'으로 번역된 '아바드탐'(abadtham)은 '노예'라는 뜻의 '에베드'(ebed)명사와 동일한 어근('아바드'; abad)을 가지는 말이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결과 말해주고 있다. 

즉 출애굽을 통해 자유를 얻게 하신 하느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다시 죄와 죽음의 종노릇 하는 길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필연적 멸망과 땅의 상실, 즉 축복과 영화와 생명의 단절을 초래하게 된다.

이 말씀이 모세를 통해 B.C.1406년 경에 주어졌는데, 이 말씀이 실제로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의 멸망(B.C.722), 바빌로니아에 의해 남부 유다의 멸망(B.C.586), 바빌론에서의 포로 귀환(1차 B.C.537; 2차 B.C.458; 3차 B.C.444), A.D.70년 로마에 의한 멸망 후, 이스라엘은 1948년 독립까지 계속되며 그대로 이루어졌다.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복음(루카 9,22~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4~25)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하여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9,20)라는 위대한 신앙을 고백했지만, 그가 가진 메시아관은 고난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만을 받는 메시아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임할 수난에 대해 처음으로 예언하셨을 때 (루카9,22) 강력히 반발하였다(마태16,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만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자는 누구나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9,23). 

루카 복음 9장 23절에는 '날마다'에 해당하는 '카트 헤메란'(kath' hemeran)이라는 부사가 나오는데, 날마다 자신의 죄스런 본성과 결별하고 죽는 훈련을 거듭해야 함암시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9장 24절에는 '나때문에'라는 표현을 통해(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8장 35절에는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까지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에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거부하시고 '당신과 복음'더 우선적 가치를 두셨다. 

한편, 이러한 역설적 진리는 역사 가운데 그대로 실현되었는데, 가리옷 사람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사도들 중에 사도 요한만이 장수를 누렸을 뿐, 다른 사도들은 모두 순교하였다. 

그들은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품었기 때문에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 복음이 쓰여지고 읽혀지던 초대 교회 당시의 극심한 박해와 핍박을 당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배교와 순교의 갈림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순교의 길을 선택하게 한 감동적인 생명의 말씀이 되었던 것이다. 

루카 복음 9장 25절에서 '잃거나'에 해당하는 '제미오테나이'(zemiothenai; lose; forfeit)는 루카 복음 9장 24절의 '잃을','잃는'에 해당하는 '아폴레세이' (apolesei; will lose)와 다르다.

'제미오테나이'(zemiothenai)의 원형 '제미오오'(zemioo)는 신약 성경에서 여섯 번 나오는데 모두가 수동태로 쓰였으며, '손상을 당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도 부정사 수동태로 쓰여 '손상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루카 복음 9장 25절에서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친다'는 표현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제3자의 의지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상실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루카 복음 9장 24절의 '아폴레세이'(apolesei)스스로의 의지와 적극성으로 상실하는 것과 비교가 된다. 

말하자면, 루카 복음 9장 25절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으려 하다가, 또는 이미 얻어 누리면서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목숨과 생명을 박탈당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는 교훈을 던져 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목숨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생명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높은 가치를 두는,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할 영적 생명'을 말한다. 

본문에 나오는 '목숨'(생명)에 해당하는 '푸쉬케'(psyche; life)바로 '영혼 생명'(soul)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살아야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이 말씀의 뜻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즉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이라는 표현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면?”이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온 세상도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온 세상을 얻을 것인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세상에 속한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세상을 선택한 사람들을 보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갖지도 못합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도 얻지 못하면서 영원한 생명도 얻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허무하게 인생을 마칩니다.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얻는 사람들이 몇 명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인생도 허무하게 끝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후의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주님 앞에 서 있던 곳으로 가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들판의 온 땅을 내려다보니, 마치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창세 19,27-28).”
하느님께서 그 땅의 모든 것들을 멸망시키셨기 때문에(창세 19,25)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라는 말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것이 재로 변했고,
그 땅에서는 연기만 솟아오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한 묵시록을 보면, 바빌론이 멸망한 뒤에 상인들이 울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저 큰 도성!
고운 아마포 옷,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했었는데,
그토록 많던 재물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구나(묵시 18,16).”
하느님 뜻을 거스른 것들은 모두 재가 되어서 먼지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묵시록 저자는 새 예루살렘에 관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거기에는 밤이 없으므로 종일토록 성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민족들의 보화와 보배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1,25-27).”
사람들은 자기들이 귀한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가지고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지만,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그 나라에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 사랑, 선행... 등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간 것들은 그 나라와 함께 영원히 남아 있게 됩니다.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들은 그 나라의 밖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따라서 온 세상을 얻었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허무하게 사라질 먼지만 잔뜩 얻은 것과 같고,
그 자신도 그것들과 함께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을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기 위한 방법에 관한 가르침.)
“내 뒤를 따라오려면”이라는 말씀은,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내 뒤를 따라오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씀은,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로 해석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세속적인 것들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온 세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라는 말씀은, 단 한 순간도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버림’과 ‘비움’을 실천하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뜻인데,
온 세상을 버릴 때 겪게 될 고통을 감수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속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세속 사람들은 온 세상을 얻으려고 애를 쓰면서 살고 있는데,
신앙인은 온 세상을 버리려고 노력합니다.
바로 그렇게 다르다는 점 때문에 세속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 미움과 박해를 참고 견디는 것,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19-20).”


도대체 왜 그렇게 미워하는가? 자기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그렇게도 미운 일인가?
유대인들은 바오로 사도를 고발할 때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흑사병 같은 자로서... (사도 24,5).”
이 말은 그들이 왜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지 잘 나타냅니다.
자기들의 가치관과 질서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즐기면서 마음 편하게 살고 있는데 양심을 찌르는 말이나 하면서
죄 속에서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귀한 보물로 여기고 있는 것들을 버려야 할 쓰레기라고 하고......
그러니 신앙인들을 흑사병 같은 자들이라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이 힘들어서 적당히 타협한다면,
예수님의 뒤를 제대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희망하고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으면 안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제 십자가를 지고…” (마르 8,34)

오늘의 묵상

사순 시기를 생각하면 즉시 떠오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이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도, 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며, 그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의아할 때마저 있지요. 주님께서는 전능하신 손을 뻗으시어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어려움을 없애 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에게 끝도 없이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지…….
우리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입니다. 쇠가 불 속에서 단련을 받아야 더 단단해지듯이, 시련과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고, 신앙이 더욱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다른 이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대속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지요.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도 인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우리는 늘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십자가는 유달리 커 보이는데, 다른 이들의 십자가는 작아 보이기에 서운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하루하루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가족을 위해, 공동체에서 이웃과 동료를 위해 내가 희생하더라도 나만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오늘 묵상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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