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수요일]하느님 아들의 목소리 (요한 5,17-30)
이사야 예언자는, 설령 여인들은 제 젖먹이를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시온을 잊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사야 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으리니,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고 하신다. (요한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49,8-15)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이사야서 49장 1~7절은 주님의 종에 대한 주님의 부르심과 주님의 종에게 주신 성취 및 영광과 승리를 약속하는 두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였다. 이제 이어지는 이사야서 47장 8~13절까지는 주님의 종이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 행할 사명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서 49장 1~7절 단락에서 주님의 종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만 행할 수 있는데 반해서 본 단락에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자는 신약의 메시야로만 국한되지 않고 구약의 역사적 인물까지 포함하는 다중성을 지니고 있다.
즉 여기에서 주님께서 '너'라고 호칭하는 인물은 궁극적으로는 신약의 예수님을 지칭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바빌론 포로 유배 생활에서 해방시키는 키루스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에 해당하는 원문은 '뻬에트 라촌 아니티카'(beeth ratson anithika; in the time of my favor I will answer you)이다. 여기서 쓰여진 동사 '아니티카'(anithika)는 완료형인데, 그 일이 확실하게 성취될 것을 강조하는 예언적 완료형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가 본절의 내용 중 일부를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코린6,2)라고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해서 성취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은혜의 때'에 해당하는 '에트 라촌'(eth ratson)은 문자적으로 '호의로 받아들이는 때','열납의 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은혜'라는 뜻으로 번역된 '라촌'(ratson; acceptable)은 원래 '기쁘게 받아들이다'는 을 가지고 있는 '라차'(ratsah)에서 유래한 명사인 것이다. 이 단어는 특히 레위기에서 백성들이 바치는 희생 제물을 주님께서 호의로 기쁘시게 받아들이신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레위1,3; 19,5; 22,19.20.21.29; 23,11).
여기서 '호의로 받아들이는 때'는 메시야가 십자가상에서 죽어 하느님 대전에 완전한 제사를 바침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하느님 아버지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때를 의미함과 동시에, 그 결과로 인해 수많은 죄인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때 그들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때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이 있기 전까지는 하느님과 인간은 원수의 관계였고, 그들 사이에는 막힌 장벽이 있어서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로마5,10; 에페2,13-15). 그러나 메시야가 죄인들을 대신해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는 그 원수되었던 자들을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화해하게 되었다(로마5,1).
어떤 학자는 이 '은혜의 때'가 구약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50년마다 한 번씩 있었던 희년과 관련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희년의 특징은 노예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고, 빚을 갚지 못해 잃었던 상속 재산(기업)을 되찾아 주는 기쁨의 때라는 점에서 이런 주장도 고려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구원사적 측면에서 진정한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 오시는 구원의 날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한편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에 해당하는 '아니티카'(anithika)의 원형 '아나'(anah)는 본래 '큰 소리로 말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이 단어는 주님께서 당신의 종 메시야와 긴밀히 상호 교류를 하면서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메시야는 주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입어 하느님의 간택한 백성들을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생명과 구원을 얻게 하는 사업을 맡게 될 것이다.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본문은 앞 문장과 같은 의미를 전하는 동의적 대구를 이루는 문장이다. 여기서 '구원의 날에'에 해당하는 '우베욤 예슈아'(ubeyom yeshuah; and in the day of salvation)에서 '구원'에 해당하는 '예슈아'(yeshuah; salvation)는 메시야의 이름인 '예수'의 히브리어 어근이기도 하다(마태1,21). 그런 측면에서 '구원의 날'은 '예수의 날'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다.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가져오는 날에는 비단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닌 과거 하느님의 은혜에서 소외되었던 많은 이방 민족들까지도 무상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도와서 사명을 완벽하게 감당하게 하신다.
그리고 본문에서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에 해당하는 '아자르티카'(azarthika; I will help you)는 연약한 자를 주위에서 둘러싸 힘있게 돕는 것을 의미하는 어근 '아자르'(azar)의 완료 시제이다. 여기서 완료 시제는 과거에 이미 발생한 사건을 나타내는 역사적 완료가 아니고, 현재 문맥은 아직 발생하지 않는 미래의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료 시제를 쓰는 이유는, 그 사건이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서 완전히 정해져서, 비록 아직 발생하지 않는 일이지만 과거에 이미 일어난 것처럼 확실하기에 '예언적 완료'(prophetic perfect)로 쓰인 것이다.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5,17-30)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28~29)
요한 복음 5장 28절의 '이 말에'로 번역된 '투토'(touto; this)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주시는 것(요한5,26)과 심판하는 권한을 가지신 것(요한5,27)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을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이해하거나 수용하기가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당신 자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예수님의 주장이 어이없는 궤변으로 들렸던 것이다.
여기서 '놀라지'로 번역된 '타우마제테'(thaumazete; be amazed at; marvel at)는 '타우마조'(thaumazo)의 현재 명령형으로서, 부정어 '메'(me)와 함께 쓰여 금지를 나타낸다. '타우마조'(thaumazo)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기이히 여기다'와 '경탄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기적과 관련된 기사에서 많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놀라움을 드러낸다(마르5,20; 루카11,14). 그러나 대다수 정통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주장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메 타우마제테'(me thaumazete)는 '의심하자 마라'는 말로 알아 들어도 된다.
이어서 요한 복음 5장 28절 이하에는 세상 끝날에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된다는 것과 그 부활이 두 가지 다른 양상, 즉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타나게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이 두가지 양상은 모두 하느님의 엄격하고 정의로운 보상의 원리에 기초한다.
요한 복음 5장 29절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원문에서 문장 앞 부분에 나오는 '(무덤에서)나와'로 번역된 '엑포류손타이'(ekporeusontai; come out; come forth)이다. 이 동사는 '엑포류오마이'(ekporeuomai)의 미래 시제인데, 기본적인 뜻은 '나가다' 혹은 '나오다'이며, 여기서는 그 목적지가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두 가지이다.
하느님의 자녀와 세상의 자녀의 구분없이, 또한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이 두 가지 양상의 부활 중에 하나에 참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미래 시제는 예언적이고 예고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예수님의 이러한 경고는 세상 끝날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임을 드러낸다. 믿는 이들이 참여할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영원한 생명을 갖고 다시 살아나 영원토록 하느님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선(善)을 행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선'(善)에 해당하는 '타 아가타'(ta agatha; good)는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의 기초 위에서 행해진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반면에 이 세상의 자녀들이 참여할 부활은 '심판의 부활'인데, 이것은 그들이 '악'(惡)에 해당하는 '타 파울라'(ta phaula; eveil)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 '악'(惡) 중에서 가장 큰 것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인생의 모든 것들은 세상에서는 가치있는 것처럼 보여도, 하느님 대전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쓸모도 없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성을 주장하십니다. 성부와 성자, 두 분이 온전히 일치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뜻이지요. 이렇게 일치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일도 당신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 온전히 순명하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께 순명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뜻에 순명해야만 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어 사랑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앞날을 내다보십니다. 당신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신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운명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감히 사람이 저지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떤 위협이라도 진리를 침묵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온갖 유혹과 위협에도 진리만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 결과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심판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느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가?’ 우리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니면 ‘부끄러움과 후회 속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친 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가?’ 연옥의 상태입니다. 또는 ‘하느님을 끝내 거부하며 영원한 절망과 어둠 속에 머무는가?’ 지옥의 상태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나는 스스로 하지 않는다
- 윤경재 요셉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5,19~30)
유명한 노자 22장을 읽으면 오늘 복음말씀과 중첩되어 그 뜻이 선명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노자 22장은 보통 가,나,다 세 문단으로 나누어 읽는데 가운데 문단 글귀가 아주 비슷합니다.
“스스로 견해를 내지 않기에 분명하고,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기에 빛나며,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공을 이루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오래간다. 그는 오직 다투지 않기에 세상에서 그와 다툴만한 사람이 없도다.”
(不自見 故明, 不自是 故彰, 不自伐 故有功, 不自矜 故長.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노자22장 글귀는 마치 예수님을 두고 쓴 것처럼 보일정도입니다. 노자 글귀가 성립된 것이 최소 BC220년 이전이라 보면 인류의 지혜가 무엇을 지향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참고로 첫째 문단을 읽어봅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휘면 곧아진다. 패인 곳은 가득차고, 낡은 것이 새로워진다. (욕심을) 줄이면 얻고, 늘리면 미혹된다. 이러기에 성인은 ‘一(者)’를 품어 세상의 본보기로 삼는다.” 여기서 ‘一’은 道를 말하며 하느님이라 보아도 무방합니다.
셋째 문단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곡즉전’이라는 말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참으로 옹글어서 (만사가) 그리로 돌아간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두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최고의 겸사가 얼마나 위력이 있고 미더운지 노자를 보면 확실해집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눈이 가리면 가치전도가 얼마나 심하게 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지는 게 이기는 길이라고 보여주셨고, 꼴찌가 첫째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종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무관이셨던 임경업 장군은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우셨습니다. 그의 군사적 지휘능력, 외교적 탁월성은 ‘임경업전’으로 전해질 만큼 대단합니다. 임경업 장군께서 평안북도 영변에서 방어사로 지내던 시절의 일화입니다.
영변 지역에서 북쪽 오랑캐 침입을 지키는 요충지인 백마산성을 긴급히 보수 공사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인근 지역 백성이 모두 동원돼 돌과 목재를 날랐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한순간에 다치거나 죽어나가는 중노동을 밤낮으로 해야 했습니다. 자연히 불만이 커져갔습니다. 방어사가 시키는 일이니 하지 않을 수는 없고 그러다 보니 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쑥덕대기 바빴습니다.
하루는 누군가가 다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임경업인지 방어사인지는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거 알고나 있나 모르겠어. 다들 안 그런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그러게 말이야” 혹은 “방어사가 이 고생을 어찌 안단 말인가”라고 맞장구쳤습니다.
그때 한쪽에서 “여기 임경업이도 있으니 그런 걱정은 마시게”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쳐다보니 방어사도 허름한 옷을 걸친 채 백성들과 함께 돌을 나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미군이 역사상 처음 패배한 전쟁으로 기록되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은 민가를 불태우거나 우림지역에 제초제를 살포하였습니다. 그런 행동이 당시 군 임무를 완수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유일한 대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비인도적 행위로 오늘날까지도 비난받고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손해배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상처를 치유하러 많은 시간과 노력, 예산이 투입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참가국인 우리나라 군인들도 그 피해를 아직까지 겪고 있습니다.
눈앞의 이익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태를 정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그 사건 이후 미군은 전쟁의 교범원칙에 ‘합법성’을 추가했다고 합니다.
이 상반된 두 가지 예화는 ‘曲則全’의 이치가 여전히 유효하며 만고의 진리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몇 년 전부터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그 중 서번트 리더십은 겸손과 영적인 통찰력으로 구성원의 자율성과 도덕적 발전을 추구하며 구성원과 조직, 나아가 전 사회의 공동선을 이룩합니다. 위대한 리더들은 끊임없이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조직의 비전으로 승화시켜 구성원들과 공유하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서번트 리더십의 본보기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