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간 목요일]영원한 생명 (요한8,51~59)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며, 영원한 계약을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고 하신다. (창세 17,3-9)
그 무렵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4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5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6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8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9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예수님께서,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며,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하시자, 유다인들이 돌을 던지려 한다. (요한 8,51-59)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창세17,3-9)
그 무렵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나를 보아라. 너와 맺은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3-5)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3)
본문은 마치 건물이 무너지듯이 몸을 숙이고 얼굴을 땅에 붙이는 행동을 말한다. 창세기 15장 4절에 나오듯이 아브람은 75세에 하란에서 부르심을 받고 86세에 11년만에 사라이의 여종 하가르에게서 이스마엘을 얻고(창세16,16), 이제 99세에 13년만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신다(창세17,1).
즉 하느님께서 13년만에 나타나시자 아브람이 황급히 몸을 숙이며 엎드리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느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첩을 통해 자식을 얻은 자신의 범죄에 대한 회개의 표시이며, 전능한 하느님(창세17,1)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표시이다. 동시에 하느님의 계약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복종의 표시이다.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4)
'나를 보아라'에 해당하는 원문은 '아니 힌네'(ani hinne; As for me, behold)이다. 그러니까 본문에는 '내가'(ani)라는 인칭 대명사가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자신을 소개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힌네'(hinne; '보다')가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특별히 계약을 새롭게 해주실 것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창세기 17장 2절에 나온 '계약'이 이미 주어진 계약을 재확인하는 성격을 지녔다면, 창세기 17장 4절에 나오는 '계약'은 그것의 구체적 실현에 강조점이 있다.
즉 이것은 아브라함의 개명(창세17,5), 할례(창세17,11), 사라이의 개명(창세17,15), 이사악의 출생에 대한 약속(창세17,19), 이스마엘의 번성에 대한 약속(창세17,20) 등과 같이 이어서 언급될 구체적인 계약의 내용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7장은 창세기 12장 2절과 창세기 15장 5절에 주신 약속을 계약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성취해 가시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원문은 '웨하이타 레아브 하몬 꼬임'(wehaitha leab hamon goyim)이다. 히브리어에서 완료형은 말하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완료된 동작이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과거 완료나 현재완료, 미래완료를 다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너는 될 것이다'로 번역된 '웨하이타'(wehaitha)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로,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된 것을 선포함과 동시에 그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라는 직분을 이미 소유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둘째로, 미래에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을 약속하신다는 관점이다. 새 성경은 '될 것이다'로 표기되어 두번째 관점을 취한다고 볼 수 있는데, 하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의 선포는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첫번째 관점을 취할 수도 있다.
한편, '많은 민족들'로 번역된 '하몬 꼬임'(hamon goyim; many nations)은 '나라들의 풍부', 혹은 '나라들의 격동'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많은 나라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한 표현이다. 이것은 창세기 12장 2절에서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의 범위가 훨씬 확장되어진 것이다.
즉 아브람을 그러한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표현함으로써, 아브람이 이룰 큰 민족이 그의 당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 의해 성취되어질 것을 내다보고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축복은 역사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져 아브람의 후손이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아랍족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하느님의 약속은 아브람의 영적 후손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진 데에서 더욱 영광스럽게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5)
여기서 '더 이상'으로 번역된 '오드'(od; any more)는 '다시'(창세4,25), '계속','여전히'(시편139,18),'또'(2사무3,35) 로도 번역되는 부사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다시'로 해석하여 너의 이름을 다시는 아브람이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둘째, '계속'으로 해석하여 너의 이름을 계속 아브람이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새 성경은 두 가지 가능성을 다 지니고 있는 번역을 하였다.
이제 아브람은 아브람의 삶을 정리하고, 아브라함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사람이 된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어지는 역사적 순간이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의 의미를 넘어서 환경(탈출2,22), 소원(창세29,32-35), 가문(루카1,60.61), 사명(마태1,23)등과 같은 그 사람과 관계된 제반 상황을 반영한다.
실제로 야곱이 이스라엘로(창세32,38), 시몬이 베드로로(요한1,42), 사울이 바오로로(사도13,9) 이름이 바뀌면서, 그들의 생애는 대전환기를 맞이했다. 이것을 볼때 아브라함으로의 개명은 그의 생애에 중요한 전환기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살펴 보아야 할 단어들은 '아브'(ab), '람'(ram), '라함'(raham)이다. 먼저 '아브'(ab)는 동일 혈통의 창시자나 서열이 높은 자를 지칭한다. 또한 '람'(ram)은 '세우다', '일으키다'는 뜻이 있는 '롬'(rom)의 분사형으로 '높은'(이사6,1), '강력한'(신명32,27)등으로 번역되어, 높고 힘있고 존귀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라함'(raham)은 '군중'(multitude)이라는 뜻의 '루함'(ruham)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이것을 종합하면, 아브라함의 개명은 '존귀한 아버지'에서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바뀐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 이스마엘 족속(창세25,12-16), 크투라 족속(창세25,1-4), 에돔 족속(창세36,9), 이스라엘 민족 등 많은 후손들이 나와 말 그대로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란 이름이 가지는 예언적 의미의 진정한 성취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인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별 수만큼, 바다의 모래알 만큼 많아진데서 찾아야 한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개명은 하느님께서 그를 당신 구세사의 핵심 인물로 지목하여 전세계 모든 선택받은 자들을 당신의 나라로 이끄시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도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와 지위와 신분을 되찾은 것이므로, 이 믿음의 축복안에 들어있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이 무엇인지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는 말씀(계명)에 충실하는 것이 새로운 계약(신약)의 백성으로서의 올바른 삶이다. 그러기에 이것을 바탕으로 하느님 나라 확장을 위한 선교의 일꾼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과 성소를 사랑하며, 이름과 성소에 맞는 역할을 다 해야만 우리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복음(요한8,51~5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58~59)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이 존재했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요한 복음사가가 이 복음서의 서두에서부터 강조한 예수님의 신성(神聖)과 선재성(先在性)에 대한 신학적 주제와 관련된다.
특히 요한 복음 8장 5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에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낼 때, 그리고 신적 본질을 나타낼 때 흔히 사용한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라는 양식의 진술을 통해 자신의 신성(神聖; diety)과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을 동시에 명백하게 나타내셨다.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라는 양식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인 탈출기 3장 14절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이 선언의 중요성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며 중요한 영적 진리를 선포하실 때 주로 사용하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에 해당하는 '아멘 아멘 레고 휘민'(amen amen lego hymin; I tell you the truth)으로 시작된다.
요한 복음 8장 58절에서 아브라함은 과거 어떤 시점에서 태어난 존재임에 반하여,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존재하였음을 명백하게 나타낸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아담 이전, 즉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광 중에 계신 하느님이심을 유대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요한17,5),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은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요, 신성(神聖)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유대인들은 규정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적 본질을 모르면 그분의 주장을 믿고 수용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사람들의 태도에서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당신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예수님의 주장을 그들이 존경하는 조상 아브라함을 비하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당신 자신이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것이므로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를 범한 죄인으로 여겼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께 돌을 들어 던지려고 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중죄인, 특히 신성 모독죄를 범한 자들은 돌로 쳐죽이는 관습이 있었다(레위24,16).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 당시 자신들을 반대하는 예수님께 대한 적대감과 더불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신성 모독죄라는 죄목을 들어 돌을 던지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셔야 할 더 큰 일을 자각하시고, 잠시 뒤로 물러나시는 지혜로운 행동을 보이신다.
여기 '성전 밖으로'에 해당하는 '에크 투 히에루'(ek tou hierou; out of the temple)는 '성전에서 밖으로'라는 뜻이다. '히에루'(hierou)는 '히에론'(hieron)의 단수 소유격이다. 여기서는 건물과 마당을 다 포함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성전 밖으로 몸을 숨기셨다는 것은 결코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이미 당신 자신을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한 희생 양으로 내어 놓으셨으므로 새삼스럽게 죽음이 무서울 것이 없었다. 다만 아직 아버지께서 정하신 떄가 이르지 않았기에 피하셨을 뿐이다.
그분께서는 언제든지 하느님의 계획 및 목적에 보조를 맞추셨다. 앞서 나가거나 뒤에 처지는 일이 없이 언제든지 그분의 뜻을 따르셨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자주 보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보잘것없는 ‘목수의 아들’로, 율법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거짓 예언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신앙의 아버지’이므로, 누구도 감히 아브라함이 가진 신앙의 원천과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유다인들에게 쉰 살도 안 된 예수님께서 하신 오늘 복음의 이 선언은 ‘하느님의 모독자’로 사형당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도발적인 이 말씀, 당신께서 지니신 신성에 대한 계시는 유다인들을 격분시켰습니다. 그 말씀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던지신 예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들은 우리는 깊은 사색에 잠기며 질문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예수님의 자의식, 하느님을 모른다고 말하면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자의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선언은 우리의 지성만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점점 다가오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숨겨져 있던 당신의 비밀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예수님에 관한 진리는 논리 정연한 학문적 체계나 성경에 관한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체험으로 알아듣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진리를 체득하고 선포하는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