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기도 (마태 6,7-15)

2017. 6. 22. 오전 4: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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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기도 (마태 6,7-15)


바오로 사도는,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다며, 하느님의 복음을 대가 없이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2코린 11,1-11)
형제 여러분, 1 아무쪼록 여러분은 내가 좀 어리석더라도 참아 주기를 바랍니다. 부디 참아 주십시오. 2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3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4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
5 나는 결코 그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6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일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7 여러분을 높이려고 나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대가 없이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다고 해서,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8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하려고 여러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바람에 그들을 약탈한 꼴이 되었습니다. 9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었습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10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걸고 말하는데, 아카이아 지방에서는 나의 이러한 자랑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11 내가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시며,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마태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제1독서(2코린11,1~11)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2)

 

코린토 2서 11장 2절과 3절은 바오로가 참 사도인 자신과 거짓 사도들의 역할을

각각 중매자와 유혹자의 역할로 비유하는 내용이다.

 

특히 코린토 2서 11장 2절에서 바오로는 참 사도인 자신의 역할그리스도께

코린토 신도들을 순결한 처녀로 중매하는 자로 비유하고 있다.

 

코린토 1서 4장 15절에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런 영적 아버지의 심정과 입장에서 코린토 신도들을 걱정하고 있다.

 

코린토 2서 11장 2절의 "열정을 가지고"로 번역된 '젤로'(zelo)

'열심'보다는 '시기' 혹은 '질투'라는 뉘앙스가 더 강한데,

바오로의 질투 단순히 인간의 소유욕과 결부된 이기적 질투가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성품에서 비롯된 거룩하고 경건한 질투이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거룩한 열정을 가지신 것처럼,

바오로 자신도 코린토 신도들을 보호하려는 거룩한 열정을 가졌음

이처럼 매우 강력한 어조의 단어를 사용해 표출한 것이다.

 

한편 코린토 신도들을 위한 바오로의 열정은 그들을 그리스도께

순결한 처녀로 드리려고 중매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약혼시켰습니다'로 번역된 '헤르모사멘'(hermosamen)

'결합시키다','함께 맞추다'라는 뜻을 가진 '하르모조'(harmozo)

부정(不定) 과거형으로 신약에서 여기만 나온다.

 

이것은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의 영적 아버지가 되어서 딸인 코린토 신도들을

한 남편 되신 그리스도와 약혼시키는 아버지 당시의 결혼 풍습을 연상케 한다

(마태22,1-14; 25,1-13; 요한3,29; 에페5,26.27; 묵시19,7.8; 21,2.9).

 

바오로는 여기서 코린토 신도들이 마치 순결한 처녀와 같은 면모 갖기를 갈망한다.

사실 처녀에게 강력하게 요구되는 덕목약혼자에 대한 순결과 신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약혼자, 남편이 그리스도로 나온다.

 

특히 여기서 남편 앞에 '하나'라는 뜻이 있는 '헤니'(heni)란 표현이 사용된 사실은

결혼 관계가 배타적이듯이 그리스도 안의 성도들도 오로지 영적 남편인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할 의무가 있다는 진리를 강력하게 나타낸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신부로 간주되어

영적 음란인 우상숭배를 자행하는 것이 금지되었듯이(호세4,12),

코린토 신도들 역시 한분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만

영적 순결과 충성을 바쳐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은 당시 음란과 우상숭배, 그리고 방탕으로 악명높던

코린토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경우,

코린토 1서 4장 11절의 언급은 상당히 특별한 의미로 전달된다(1코린6,9.10).

 

물론 코린토 신도들은 이러한 부도덕한 삶의 방식을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한 자들이었으나(1코린6,11), 다시 이전의

방탕 가운데로 돌아갈 우려가 늘 잔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1코린 5,1~13 참조).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6,7-15)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7~8)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에 해당하는 '메 밧탈로게세테'(me battalogesete;

do not keep on babbling; do not use vain repetitions)에서 '빈말을

되풀이하다'로 번역된 '밧탈로게세테'(battalogesete)원형 '밧톨로게오'

(battologeo)'말을 많이 하다', '생각없이 말하다', '쓸데없이 말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기도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이 했던 기도나(1열왕18,26),

에페소에서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외쳐댔던 아르테미스 숭배자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도19,34).

 

또한 하느님을 대상으로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기도를 반복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은총의 지위를 상실하고 죄중에 기도하거나,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기도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이들이 때로는 눈물로 애원하고, 때로는 논리적으로 하느님을 설득하는 조로

미사여구를 늘어 놓으며 장황하게 기도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하느님 앞에

아무 의미없는 말들을 많이 쏟아내는 것에 불과하며, 이런 기도는 하느님

대전에 올라갈 수가 없다.

 

마태오 복음 6장 8절'알고 계신다'에 해당하는 '오이덴'(oiden; knows)

완료형이다.

 

희랍어에서 완료형은 말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이미 동작은 끝났지만,

동작의 결과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여기서도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이미 기도하는 이의 형편을

과거로부터 알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우주의 삼라만상과 인류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께서 직접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당신께서 선택한 자녀의 청원 내용을

모르실 리가 없다.

 

따라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기도가 아니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진실한 기도라면 반드시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라고 하더라도, 그 기도의 응답이

늦어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때와 사람의 때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가장 적절하게 응답해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주의 기도'에 대한 해설은 2014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1,1~4)을 참조하십시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하느님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신앙인으로서 존재 이유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화라는 것이 쉽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씀드리고,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하는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대화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겠지만, 진정한 대화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도 애정이 있고, 신뢰와 상호 이해가 있으면 아이들이 참새처럼 지저귑니다. 서로가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들의 기쁨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족들 사이에 신뢰가 없고, 미움이나 불화가 있다면, 서로 각자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립니다. 무엇을 어떻게 얘기할까 고민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그분과 대화할 필요도 못 느끼고 그 대화의 의미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신뢰하는 마음으로 대화하다 보면,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동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 기쁠 때뿐만 아니라,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병자는 아버지께 건강을 주시라고 기도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인내의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라고 기도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 주십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젊었을 때는 왜 나를 그렇게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왜 나를 사랑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가 저를 진짜 미워했을까요?

아니 정말로 제가 저를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저는 저를 제일 사랑했고 그래서 제일 미워했던 것뿐입니다.

저를 사랑했기에 제가 더 훌륭한 저이기를 바랐던 것이고,

더 훌륭한 나이기를 바랐던 거기에서 조금 삐끗하는 바람에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제 생각에 훌륭하기를 바라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의 바람>과 <욕심의 바람>입니다.

 

사랑하기에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잘 되기를 바라지 않잖아요?

전혀 사랑치 않는 남의 집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고,

너무도 사랑하기에 자기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거지요.

남의 자식인데도 잘 되길 바란다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잘못 삐끗하면 욕심이 됩니다.

사랑과 욕심의 차이는 자유와 집착의 차이입니다.

사랑은 자유로이 바라고 욕심은 바라는 것에 집착합니다.

 

사랑이 가난하면 바라는 것을 자유로이 추구하지만 사랑이 가난치 못하여 욕심으로 바뀌면

바라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랑이 욕심이 되어 미움이 내 안에 똬리를 틀게 되면

내 안의 미움이 온갖 분탕질을 합니다.

 

먼저 내 안의 미움이 하느님의 사랑을 차단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내 안의 미움이 하느님의 사랑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할 텐데 말입니다.

 

이제 와서 점점 더 확신하는 것은

나에 대한 나의 사랑과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같이 간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는 거지요.

나에 대한 참사랑과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같은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내 안의 미움은 이웃을 미워하게 합니다.

내 안의 미움은 마치 색안경과 같아서

모든 사람을 미움으로 보게 합니다.

어쩌면 자기에게 향하는

미움의 화살을 밖으로 돌림으로써

자기를 찌르는 미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려는 심사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우리는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그 중심에

참 자기 사랑이 있음을

다시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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