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수요일]마귀를 돼지 떼 속으로 (마태 8,28-34)
아브라함은 사라의 청으로 여종인 하가르와 그가 낳아 준 아들을 내보내는데,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울부짖는 하가르에게 아들을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신다. (창세 21,5.8-20)
5 아브라함에게서 아들 이사악이 태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다. 8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다. 이사악이 젖을 떼던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9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가르가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10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세요. 저 여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사악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는 없어요.” 11 그 아들도 자기 아들이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이 일이 무척이나 언짢았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와 네 여종 때문에 언짢아하지 마라. 사라가 너에게 말하는 대로 다 들어주어라.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13 그러나 그 여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14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가져다 하가르에게 주어 어깨에 메게 하고는, 그를 아기와 함께 내보냈다. 길을 나선 하가르는 브에르 세바 광야에서 헤매게 되었다. 15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그 여자는 아기를 덤불 밑으로 내던져 버리고는, 16 활 한 바탕 거리만큼 걸어가서 아기를 마주하고 주저앉았다. ‘아기가 죽어 가는 꼴을 어찌 보랴!’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아기를 마주하고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17 하느님께서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그래서 하느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가르를 부르며 말하였다. “하가르야, 어찌 된 일이냐?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에 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18 일어나 가서 아이를 들어 올려 네 손으로 꼭 붙들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9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 하가르의 눈을 열어 주시니, 그가 우물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우고 아이에게 물을 먹였다. 20 하느님께서는 그 아이와 함께 계셨다. 그는 자라서 광야에 살며 활잡이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가다라인들의 지방에서 마귀 들린 이들에게서 마귀를 몰아내 돼지 떼 속에 들어가게 하시어 고쳐 주신다. (마태 8,28-34)
예수님께서 호수 28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29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30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31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33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34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제1독서(창세21,5.8~20)
하느님께서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그래서 하느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가르를 부르며 말하였다. "하가르야, 어찌 된 일이냐?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에 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일어나 가서 아이를 들어 올려 네 손으로 꼭 붙들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7~18)
여기서 '아이'에 해당하는 '나아르'(naar)는 이스마엘을 가리킨다. 창세기 21장 17절에서 하느님께서 들은 소리가 아이의 목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창세기 21장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스마엘도 어머니 하가르와 같이 울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울었던 이유는 행복했던 환경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서러움과 갈증에 지친 나머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고, 또한 어머니의 대성통곡하는 울음소리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들으셨다'에 해당하는 '와이쉬마'(waishima; and heard)의 원형 '샤마'(shama)는 단순히 '듣다'는 뜻만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다', 들은 바를 '이해하다', '응답하다'는 뜻도 있는데, 여기서도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이스마엘의 심정을 살피시고 어떤 조치를 취하실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두려워하지 마라'에 해당하는 '알 티르이'(al thiri; do not be afraid)는 '전율하다', '무섭다'라는 뜻의 동사 '야레'(yare)에 일회적인 금지를 나타내는 부정사 '알'(al; not)이 함께 쓰인 하느님의 은총과 위로의 말씀이다. 즉 계속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 두려움을 없애라는 말씀이다.
이 말은 성경에서 두루 사용되었는데, 깊은 절망과 슬픔 가운데서도 겸손하게 하느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지금도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께서 찾아 오셔서 위로해 주실 것임을 보여 준다.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원문에는 이유를 보여 주는 '키'(ki; for)라는 단어가 나오므로, '왜냐하면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로 번역된다. 이것은 바로 앞의 문장과 연결하여 하가르가 이스마엘을 계속 돌보아 주고 붙들어 주어야만 하는 근거가 된다.
또한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의 장래를 약속하셨던 하느님께서(창세16,10; 17,20) 이 구절을 통해 이 약속을 계속 이행하고 계심을 보여 준다.
결국 후에 이스마엘의 후손들의 영역이 하윌라에서 수르까지 확장된 것 (창세25,18)을 볼 때 이 약속은 성취된 것이다.
이처럼 이 구절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하가르에게 자식의 장래가 번성할 것을 재확인시켜 줌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용기를 심어 준 것이다.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복음(마태8,28~34)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29)~~예수님께서 "가라."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32)
영적 존재로서 영적 지각력이 뛰어난 존재인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향해 '하느님의 아드님'에 해당하는 '휘에 투 테우'(hye tou theu; the son of God)라고 불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사람들에 의해 고백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명칭은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적 명칭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데, 이러한 사람들의 고백 이전에 더 먼저 마귀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인지하였고, 예수님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에 해당하는 '티 헤민 카이 소이'(Ti hemin kai soi; what do you want with us)에서 '당신'으로 번역된 '소이'(soi)와 '저희'로 번역된 '헤민'(hemin)은 여격의 형태인데, 직역하면 '저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다.
이것은 '당신께서 저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또는 '저희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는 뜻으로서 자신들의 주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사적 질문이다.
그리고 '때가 되기도 전에'로 번역된 '프로 카이루'(pro kairou; before the time; before the appointed time)라는 표현은 먼저 마귀도 종말론적 심판과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권세의 종말이 올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하느님 나라가 임했지만 그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과 마지막 도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한편, 구약에서 돼지는 굽이 갈라지고 그 틈이 벌어져 있지만 새기짐을 하지 않으므로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되어(레위11,7; 신명14,8) 그것을 먹는 일이 가증스런 일로 여겨졌다(이사65,4). 하지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 있어서 돼지는 주요 음식이었고, 돼지 사육은 주요 수입원이었다.
본 사건의 배경이 되는 가다라인들의 지방은 이방인들이 살던 지역이었으므로 돼지를 사육할 수 있었다.
병행구절인 마르코 복음 5장 11절에는 2천 마리라는 구체적인 수가 제시된 반면에, 마태오 복음사가는 능력을 행하시는 그리스도께만 초점을 맞추기 위해 구체적인 보도를 단순화시켜 '많은'에 해당하는 '폴론'(pollon; many)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마태오 복음 8장 22절에서 호수로 빠져들어간 주체인 '돼지 떼'를 단수형으로 취급했지만, 물에 빠져 죽은 존재에 대해서는 복수형으로 취급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여기에서 '돼지 떼'로 하여금 내리 달려 호수로 들어가게 만든 내면적 동인은 '마귀'가 제공했지만, 실제 죽은 것은 '돼지 떼'였음을 나타내는 문학적 기법을 썼다.
그렇다면, 왜 마귀는 돼지 떼 속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하였을까? 이것은 그곳 사람들의 재산에 손실을 입히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원인을 예수님께로 돌려 예수님을 경계하게 하고, 그 지방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마태8,34).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셨지만, 사람의 영혼 생명이 물질적인 재산과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마귀가 돼지 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셨다고 본다.
<마귀들과 돼지 떼>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마태 8,28-29).”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은 호수 동쪽에 있는 이방인들 지역입니다. 아마도 ‘돼지치기’가 그 지역에서 살고 있는 ‘가다라인들’의 생업이었을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은, 그들이 무덤에서 살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는 말은, 마귀들이 무척 난폭했음을 뜻하지만, 지역 주민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이 서로 격리되어 있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서로의 영역에 대해서, 또는 서로의 생활에 대해서 지역 주민들과 마귀들이 암묵적인 타협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귀들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무덤에서 살면서 주민들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고, 주민들은 그곳에 접근하지 않음으로써 마귀들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고...)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우리의 생활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마라.” 라는 요구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마귀들이 하는 말입니다.)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라는 말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우리를 쫓아내려고 하는가?” 라는 항의입니다. 그런데 ‘때가 되기도 전에’ 라는 마귀들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마귀들이 쫓겨나야 하는 때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때, 또는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바로 그때이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태 8,30-32).”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당장 떠나라.” 라고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실 것을 마귀들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귀들이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달라고 청한 것은, 사람들 속에 있을 수 없다면 돼지들 속에라도 있게 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쫓겨난 마귀들이 갈 곳은 지옥뿐입니다. 지옥은 마귀들도 벌을 받는 곳, 즉 마귀들이 갇혀 있는 감옥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마귀들도 두려워하는 곳, 가기를 싫어하는 곳입니다.)
마귀들의 요청을 예수님께서 왜 들어주셨는지는 모릅니다.
어떻든 마귀 들린 사람들은 예수님 덕분에 마귀들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합니다. 말 못하는 짐승들도 마귀들이 자기들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돼지들을 죽이신 것은 아닌데, 결과만 보면, 또 돼지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돼지 주인에게 큰 피해를 입히신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마귀 들린 사람들이 마귀들에게서 해방된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33-34).”
‘돼지를 치던 이들’은 돼지 떼가 죽은 일이 자기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주인들에게 말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호기심 때문에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돼지 떼 주인들은 자기들이 입은 피해를 확인하려고 왔을 것입니다.
주민들이 예수님께 떠나라고 요구한 것은, 사실상 예수님을 쫓아낸 것입니다.
(여기서 ‘청하였다.’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뜻으로는 ‘요구하였다.’입니다.)
‘가다라인들’은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메시아에 대한 믿음도 없었고, 메시아를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대체로 그랬듯이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우상 숭배자들이 우상들에게 비는 것은 거의 항상 물질적인 복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비는 소원은 거의 대부분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과 부귀영화 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귀들이 자기들에게 특별히 어떤 해를 입히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들과 함께 사는 것에 그럭저럭 익숙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이 별로 고맙지 않았을 것입니다.
돼지 주인들은 자기들이 큰 손해를 본 것에 대해서 몹시 화를 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인데, 혹시 손해배상을 하라고 요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자 어쩔 수가 없어서 그냥 쫓아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루카 16,13-14).”
마귀들에게서 해방된 것에 대해서는 기뻐하지 않고, 물질적인 손해만 생각하는 가다라인들의 모습은 재물을 섬기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지역에 가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였을 텐데,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시기 전에 먼저 복음 선포부터 하셨더라도 이미 재물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귀담아듣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산상 설교에,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것들은 모두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하찮은 것들을 버리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마귀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고, 돼지 떼는 모두 물속에 빠져 죽었지요.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쳤다는 것과 이것을 전해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를 당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그 시대의 통속적인 전설의 양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돼지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일도 율법으로 금했지요(레위 11,7; 신명 14,8 참조). 이런 이유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불결하게 생각하는 돼지가 물에 빠져 죽은 사건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제발 떠나 달라고 간청을 하지요. 돼지 떼의 몰살 이야기를 듣고는 예수님이 두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은 것입니다. 변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누려 온 생활에 간섭받기 싫었던 것이지요.
더욱 나은 삶을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나 희생과 포기가 있어야 하는데,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 이런 변화를 거부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더욱 궁극적인 삶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욕망의 포기와 희생이 있어야만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