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요한 20,24-29)

2017. 7. 3. 오전 4: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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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요한 20,24-29)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고도 불렸다(요한 20,24 참조).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그는 매우 강직한 제자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해치려고 했던 베타니아 마을로 가시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큰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강한 불신도 보였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한다. (에페 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고야 믿겠다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하시자,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한다. (요한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제1독서(에페2,19-22)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어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19~20)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19) 

에페소서의 주제 교회의 일치의 당위성이다. 에페소서 2장 19~22절은 교회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된 절대 유일한 하나의 구원 공동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원받기 이전의 이방인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였으나(에페2,11~12절),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수평적 평화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에페2,13~15절), 구원받은 성도들 모두가 하느님과 수직적 평화를 이루었다는(에페2,16~18절) 사실에 근거를 두고 에페소서 2장 19절 이하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2장 11~18절에서 갓 교회에 속하게 된 이방인 출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 공동체인 교회가 어떻게 신약 시대에 이르러 자기들 이방인들까지 포함시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였다. 

이제 에페소서 2장 19~22절 단락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을 대상으로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하여 형성된 단일 공동체라는 중요한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우케티'(uketi)'더 이상 ~이 아니다'(no more)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강조 부정어이다. '크세노이'(ksenoi)'파로이코이'(pharoikoi)'외국인' 혹은 '이방인'(나그네)이라는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강조 부정어와 더불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명사를 반복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하느님께 나아감을 얻는 특권을 받았으므로, 이제부터 이방 성도들 역시 더 이상 천국의 시민권과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절에서 영어의 'not ~ but'의 용법과 동일하게 앞선 부분의 부정을 통하여 뒷부분의 내용을 더욱 강조하는 '우케티~ 알라'(uketi ~alla) 용법을 사용하여 이방 성도들이 '외국인''이방인'이 아니며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고 '하느님의 한 가족' 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갖는 신분의 변화첫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되는 것이다. '성도'에 해당하는 '하기온'(haghion)은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사용되던 구약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이다(다니7,18). 

사도 바오로도 본문에서 성도를 구약적 개념으로서 사용하였다.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적, 지리적으로는 비록 외국인이지만, 한 성령 안에서 완전히 성도와 동일한 시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된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은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다. 여기서 '가족'에 해당하는 '오이케이오이'(oikeioi)의 원형 '오이케이오스'(oikeios)'가족','식구','권속'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표현은 과거에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간택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임을 자랑하며 유대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인 혈통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 말이 적용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한 가족'은 하느님을 가장으로 모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더 이상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어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0) 

에페소서 2장 20~22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를 건물에 비유하고 있다. 단순히 건물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자기 육체로 허무신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세우신 성전이다. 

이 성전 건물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터)위에 세워졌고 그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에페2,20~21), 건물의 재료는 그로 말미암아 새로 난(거듭 난) 성도들이다 (에페2,22;1코린3,9). 

여기서 '사도들'과 병행하여 쓰인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약 교회를 창설한 후에 교회가 이 땅에 뿌리 내리던 초대 교회시대에만 있었던 신약 교회의 예언자들을 가리킨다(1코린12,10.28.29; 에페4,11).

한편,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란 표현은 다음의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코린토 전서 3장 11절에서는 성전 건물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으며, 바로 그 전절인 코린토 전서 3장 10절을 보면 사도 바오로 자신이 그 기초를 놓았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기초 역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라고 보고, 그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복음 전파에 의하여 확장되어 간다는 의미가 된다. 

둘째로, 본문의 '기초'를 건물의 '기초'라고 보지 않고 '시작'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지어진 새 성전에 놓인 최초의 돌로서, 그 위에 계속해서 다른 성도들이 돌이 되어 세워질 수 있는 '시작'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기초'로 번역된 '테멜리오'(themelio)'기초','토대','터' 뿐만 아니라 '시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견해 모두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따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의 복음을 깨달은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깨달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의 '기초'를 닦았고, 또한 친히 교회 구성원의 구심점이 되어 다른 모든 성도들이 그들을 따라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모퉁잇돌'에 해당하는 '아크로고니아이우'(akrogoniaiu)의 원형 '아크로고니아이오스'(akrogoniaios)'끝'(마태24,31), '머리'(히브11,21)를 의미하는 '아크론'(akron)'모퉁이'(마태21,42), '구석'(사도26,26)을 의미하는 '고니아'(gonia)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모퉁잇돌'(the chief corner stone), '구석머리'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건물의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서 건물의 기초로 삼을 뿐 아니라 벽과 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기초들을 말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건물을 세우는 자가 자신의 이름을 바로 이 모퉁잇돌에 새겨 건물이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였다. 

본문은 이사야 28장 16절의 말씀의 성취라고 볼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기초이실 뿐 아니라 교회가 그분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모퉁잇돌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친히 자신이 직접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다. 믿는 이는 물러서지 않는다."(이사28,16)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복음(요한20,24-29)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는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8-29)

'토마스'에 해당하는 '디뒤모스'(Didymos; Thomas)는 아람어(Aramic)적인 표현으로 '쌍둥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중성'이라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 요한 복음사가가 이것을 밝힌 것은 육적인 열정에 비해 영적인 믿음이 뒷받침되지 못한 그의 신앙 상태를 그대로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이런 토마스가 7일간 계속되던 유월절 축제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신 주일로부터 7일이 지나 다시 주일이 된 '여드레 뒤에'  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신앙 고백을 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테오스 무' (ho kyrios mou kai ho theos mou; My Lord and my God)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저의'에 해당하는 '무'(mou; my)라는 1인칭 단수 소유 대명사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해서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진정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원문에서는 '~이시며''~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 동사가 생략되었고, 각 단어들 앞에 각각 '호'(ho)라는 관사가 각각 사용되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神性)이 더욱 강조된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자 직접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먼저 볼 필요도 없이 그의 의심들이 눈 녹듯이 모두 사라졌고, 이 고백의 말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놀라움에 가득찬 탄성과 같은 것이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토마스가 이전에 자신이 함께했던 역사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많은 토마스와 같은 사람에게도 능력을 발휘하는 영혼의 부활이요, 육체의 부활이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이었다. 토마스가 체험한 이 부활의 능력은 그를 의심많은 제자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제자로 바꾸어 버렸다.

한편, 요한 복음 20장 27절에서는 '믿음없는 자'에 해당하는 '아피스토스'(apistos;  faithless)'믿는 자'에 해당하는 '피스토스'(pistos; believing)서로 대조 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9절에서는 토마스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헤오라카스~페피스튜카스'(heorakas~pepiteukas)'보지 않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hoi me idontes kai pisteusantes; these  who have not seen and you have believed)가 서로 대조되었다.

첫번째의 대조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촉구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 (요한20,31)을 반영한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선택은 당시의 등장 인물들에게 부과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에서 독자들인 초대 교회 성도들과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던져지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조는 성경의 어떤 인물들도 당시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높은 신앙에 대한 촉구이다.

즉 토마스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보지 않고서도 믿는, 참으로 더 복된 자들이라는 말이다.



축일: 7월 3일 성 토마스(토마) 사도,


의심

'믿지 않음', 또는 '의심'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믿고 싶지 않아서 안 믿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믿고 싶지만 안 믿어져서 못 믿는 것입니다.

믿고 싶지 않아서 안 믿는 경우의 좋은 예가 요한복음 9장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시는데(요한 9,7),
바리사이들은 그 일을 안식일에 했다는 이유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기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요한 9,16).
바리사이들은 그 눈먼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합니다(요한 9,19).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안 믿었고, 믿기를 싫어했고,
그래서 눈앞에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의심하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9,41).
믿으려는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영혼이 눈먼 상태이고,
그것은 신체적으로만 눈먼 사람보다 더 눈이 먼,
비참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믿고 싶지만 안 믿어져서 못 믿은 경우의 좋은 예는 토마스 사도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다른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하자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가 예수님의 상처 자국을 직접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요한 20,25).
토마스 사도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이고, 믿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믿고 싶지만 안 믿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에 못 믿은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스 사도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20,27).
이 말씀은 토마스 사도의 의심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의 소망에 응답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가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을,
또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토마스 사도의 의심과 믿음만 기록되어 있는데,
공관복음을 보면,
다른 사도들도 토마스 사도와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6-17)."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마르 16,14)."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루카 24,40-41)."

네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를 모두 종합하면,
토마스 사도만 예수님의 부활을 못 믿었다고 말하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 됩니다.
다른 사도들도 모두 그랬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믿지 못한 것은
믿고 싶지 않아서 안 믿은 것과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판관 기드온의 이야기가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기드온을 부르시고,
그에게 민족을 구원하는 임무를 맡기셨을 때,
그는 하느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판관 6,17).
하느님께서는 기드온을 꾸짖으시기는커녕
기꺼이 세 번이나 표징을 보여 주십니다(판관 6,21.38.40).
기드온은 천사의 말을 믿고 싶어 했을 텐데
자기의 처지를 생각할 때 너무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에
안 믿어져서 못 믿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믿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은총을(표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인간 쪽에서는 '믿으려는 노력'이고,
하느님 쪽에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믿고 싶지 않아서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고 싶다고 요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마태 12,39).

요즘에도 믿으려는 마음 없이, 또 믿음을 반박하기 위해서
'기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도 그것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고 시도하면서
그 일이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안 믿는 이유를 계속 만들어낼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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